낙동강 Ω형으로 감싼 섬에 ‘전통’이 오롯 | 등록자 : 너브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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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찾아서] 경북 영주 무섬마을
옛스런 고택들과 돌담 골목 ‘살아 있는 민속촌’ 안동 하회·예천 회룡포 더불어 대표적 ‘물돌이’
물은 자연스럽게 낮은 곳으로 흐른다. 산에 막히면 돌아 흐르고, 절벽을 만나면 떨어져 폭포를 이룬다. 강물이 산에 막혀 오랜 세월 돌아 흐르는 동안 강 한쪽엔 모래가 쌓이며 너른 평지가 형성된다. 이렇게 강줄기가 감싸 안은 지역에 들어선 마을을 물돌이마을, 물돌이동으로 부른다.
경북 '칠백리 낙동강' 줄기에 이런 마을이 여럿 있다. 안동 하회마을, 영주 무섬마을, 예천 회룡포가 대표적이다.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 무섬마을은 태백산에서 발원한 내성천 줄기가 소백산에서 흘러내린 서천 줄기와 만나 몸집을 키운 뒤 한바탕 용틀임을 하며 만들어낸 물돌이마을이다. 무섬이란 물섬(또는 뭍섬)에서 왔다. 일제 때 행정지명을 한자로 표기하며 수도리(水島里)가 됐다.
무섬 전통마을보존회장 김한세(70)씨가 말했다.
"우리 마을 뒷산은 태백산 끝자락, 앞산은 소백산 끝자락이라. 태백산 물과 소백산 물이 합쳐서 350도 가까이 돌며 우리 마을이 만들어진 기요. 매화나무 가지에 꽃이 핀 형세라 해서 '매화낙지(梅花落枝)'형, 또 물 위에 연꽃이 뜬 형세인 '연화부수형(蓮花浮水)'인데, 그래 노니 길지(吉地) 중에 길지라."
강변 널찍한 모래밭과 울창한 숲 사이 들어앉아
무섬마을의 자랑거리는 즐비한 고택들이다. 마을로 들어서 한 집 한 집 들여다보면 전통마을의 매력이 드러난다. 40여채의 집 가운데 30여채가 조선 후기 사대부 가옥이거나 초가집이다. 사랑채·안채·대청마루에 마당까지 갖춘 고색창연한 한옥들과 돌담이 골목을 이루며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다. 모두 주인이 직접 거주하는 집들이다. 만죽재·해우당 등 9채의 가옥이 문화재자료, 민속자료로 지정됐다.
가장 오래된 한옥은 만죽재다. 반남 박씨 판관공파의 종가로 이 마을에 처음 정착한 박수(1641~1699) 선생 시절 지은 집이라고 한다. 해우당은 19세기 말 의금부 도사를 지낸 해우당 김낙풍 선생이 지은 집으로 '해우당' 현판은 흥선대원군의 친필이다.
초가집도 옛 모습 그대로다. 소규모의 '초가삼간'집이 아니라 부엌을 실내로 들인 '겹초가집'이다. 김씨가 초가의 지붕의 용마루 양쪽 끝 구멍을 가리켰다. "저게 바로 까치구멍이라 카는 긴데. 실내 부엌에서 나오는 연기를 저 구멍으로 빼는 기라."
논도 밭도 없는 이곳에 마을이 들어서게 된 것은 마을을 이룬 이들이 양반계층이었기에 가능했다. 무섬마을 직경 30리 밖 땅이 모두 무섬 마을 소유의 땅이었다고 한다. 토지가 안동·예천 경계에 솟은 학가산 밑까지 이를 정도로 부촌이었다.
김씨가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를 가리켰다. "저 산이 학을 닮은 학가산이라. 우린 문필봉이라 카는데 안동 쪽 사람들은 볼품 없다꼬 문디산이라 카데."
소작농들은 농사를 지어 강 건너 무섬마을로 곡식을 날랐다고 한다. 이런 관행은 50년대 토지개혁 때 사라지고 마을의 위상도 쇠락했다. 지금도 무섬마을엔 논은 전혀 없고, 밭도 옛 집터를 일궈 채소 따위를 심어 먹는 텃밭뿐이다.
육이오 전까지도 120여호에 500여명이 살았다는데 지금은 40여호에 50여명이 산다. 대부분 70~90대 어르신들로, 60대 이하는 단 두 명뿐이다. 주민 중 일부는 도시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은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사는 이들이다.
김씨가 대청마루 문을 열고 화투를 치고 있는 할머니들에게 인사를 건넨 뒤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저 노인네들 연세가 얼맨지 아는교. 한 분은 아흔느이, 한 분은 여든아홉, 또 한분은 여든스이라. 눈도 밝고 귀도 밝고 쌩쌩한 어른들이라예."
김씨는 "옛날엔 여자들이 여기로 한번 시집오면 죽어서야 나갈 수 있었다"며 "가마 타고 외나무다리 건너 들어왔다가 상여 타고 나갔다"고 말했다.
외부 소통은 3개의 외나무다리거나 배
1972년 강에 무섬교가 놓이기까지 건넛마을로 가려면 배를 타거나 외나무다리를 놓아 건너다녔다. 해마다 가을이면 폭 30㎝ 가량의 나무판자를 이은 3개의 외나무다리를 놓았다고 한다. "장보러 가는 다리, 학교 가기 위해 기차 타러 가는 다리, 농사지으러 가는 다리 이 세 개를 각 방향으로 놓는 기라."
명맥이 끊어졌던 외나무다리는 4년 전부터 해마다 10월 150m 길이의 외나무다리를 만들어놓고 축제를 펼치면서 재현됐다.
재미있는 건 한옥들 중 마당 한 구석이나 봉당 기둥 옆에 토종 벌통을 들인 집이 많다는 것이다. '김덕진 가옥' 부엌에서 토란대 껍질을 벗기던 이정호(91) 할머니가 말했다.
"벌통 살피는 거 누가 해주나. 내 다 하지."
열일곱 살에 예안에서 이곳 김씨 집안으로 시집 와 평생 살고 있다는 이씨는, 대청마루 기둥에 기대 세운 3층짜리 벌통을 가리키며 "벌 나고 들이고, 통에 진흙을 발라 2층, 3층으로 올리는 일"을 직접 했다고 말했다. 섬계고택 마루에 앉아 부채질을 하고 있던 김두한(86)씨도 말했다.
"내 환갑 때 마래(말이야). 벌이 집안으로 들어와 소쿠리 안에 바글바글하길래, 그걸 받아가지구 마래, 이래 번식씨게 가 열다섯 통이나 된 기라. 어제 아래도 마래, 벌이 저 나무 위에 가 바글거래, 나뭇가지 끝에 바가지를 달아 이래 이래 하니 다 드가대. 그래 해가 올해만 여덟 통을 받은 기라."
김씨가 집 봉당을 따라 줄줄이 놓인 벌통을 하나 하나 가리키며 자랑스러워했다.
김씨는 벌 치는 일말고도 돗자리 만드는 일의 전문가였다. 산에서 자라는 띠를 베어다 해마다 두어 개씩 '띠 자리'를 만들어 낸다고 했다.
김씨가 "내, 자리 매논 거 구경 함 시켜 보래?" 하더니 방에 들어가 섬세하게 짜인 띠 자리를 가지고 나왔다.
"자리 하나를 한 잎이라 카는데, 한 잎 매는 데 한 이십일 걸래. 인제는 나이도 많애가 띠를 잘 뽑아오도 몬해. 그래도 겨울에 마래. 밤에 잠도 안 오고 하니까 마래, 그때 마이 하지."
무섬마을에서 제사 지낼 때면 꼭 띠 자리를 쓰는데, 그 이유는 띠처럼 무성하게 자손이 번성하라는 뜻이라고 한다. 김씨가 마루 한 구석에 놓인 '자리 틀' 앞에 앉아 자리 엮는 시범을 보여주며 말했다. "이 자리를 깔고 자문 마래, 저 따우에(땅 위에) 깔고 자도 누기(습기)가 안 차는 기라."
올해 말까지 경관생태마을로 새 단장 한창
박씨·김씨 후손들이 옛 것을 소중히 여기고 전통을 지키며 살아가는 평온한 무섬마을. 이 마을에도 한때 위기가 있었다. 육이오 때도 별 피해가 없었던 이 마을은 60~70년대 개발 바람이 거세게 불면서 "마을의 목아지"가 잘릴 위기에 처했었다고 한다.
다시 전통마을보존회장 김한세씨가 말했다.
"우리 마을을 하늘에서 보믄 꼭 오메가(Ω) 형이라. 이 잘록한 목아지 부분의 양쪽 물길의 거리가 직선으로 한 60m밖에 안되는 기요. 근디 박통때 물길을 뚫어 이쪽 강바닥을 다 들판으로 맨들어버리겠다고 한 기요. 어떡하긴. 주민들이 마을 목 잘린다꼬 결사 반대해가, 장비까지 다 왔다가 고마 몬하고 돌아갔지."
앞서 일제 때는 중앙선 철길이 '잘록한 목아지' 지역을 통과하도록 계획돼 있었으나, 이것도 주민들이 "혈이 끊긴다"며 반대운동에서 나서 철길을 돌렸다고 한다.
"물길이고 기찻길이고 다 혈을 자르는 짓이라. 우리 마을 주민들은 여기에 거의 종교적인 신념을 갖고 있는 기라. 그래 마을이 살아난 기요."
무섬마을은 지금 재단장이 한창이다. 문화재 전문가들이 동원돼 고택들을 수리하고, 마을 한쪽에 짓기 시작한 대형 한옥의 마을자료전시관도 완성돼 가고 있다. 내년초 전시관을 개관한 다음 그 옆으로는 전통문화 교육과 숙박을 할 수 있는 무섬체험관도 건립할 예정이다.
경북도에선 무섬마을을 올해 말까지 강과 뭍의 수려한 자연경관과 생태계를 탐방할 수 있는 경관생태마을로 가꾸기로 했다. 순환생태탐방로 만들기, 나무 심기, 그늘막과 쉼터 만들기 등을 추진한다.
"에, 첫째 전깃줄이 없는기라. 보소 전깃줄 하나 있나. 다 땅속에 묻은 기요. 둘째는 오폐수 종말처리장이 다 갖춰진 거요. 그러니 강물도 맑고 깨끗한 기라. 셋째는 경관이 수려한 거라. 저 남산에 오르면 오메가맨치로 잘록한 마을이 한눈에 보이요. 가보소. 그리고 남산은 남쪽에 있어서 남산이 아이고, 서쪽이지만 서산이라칼 수 없으니까네 남산이라 하는 거요."
'오메가 형'의 마을 모습을 사진 찍으러 남산에 올랐다. 송전탑부터 능선을 따라 칡덩굴을 헤치고 오르내리며 한참을 헤맸는데도 숲에 가려 마을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내려와 한 주민에게 물으니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숲에 가려 안 보이요. 굳이 볼라믄 높은 나무 위로 올라가서 봐야 할기요."
영주/글·사진 이병학 한겨레 여행전문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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