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e이야기

[스크랩] 벽초 홍명희 생가

깜보입니다 2008. 12. 10. 18:12

 

 

평면도

전 경

 

홍명희생가(洪命熹 生家 충북민속자료 제14호 문화재명 : 괴산 동부리고가)

 

장편소설 임꺽정을 집필한 벽초 홍명희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벽초 홍명희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가 독립운동을 하였지만 월북하여 북한에서 부수상까지 지냈다는 것 때문에 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금기시 되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남북화해무드를 타고 이제는 누구라도 거리낌없이 최소한 그의 문학에 대하여는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시절이 되었다. 그러한 무드를 타고 현재 괴산은 홍명희 문학축제를 매년 가을에 개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모든 사람에게 환영받는 것은 아닌가 보다. 문화재청의 문화재명은 괴산 동부리가옥으로 되어있고 괴산군청의 싸이트에는 홍명희의 아버지인 홍범식가옥으로 되어있는데 괴산군청의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주민 중 일부가 월북한 공산주의자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에 대하여 반대하였기 때문에 일제에 항거에 자결한 홍범식 가옥으로 결정한 것이라고 한다. 

 

이 집도 홍명희만큼이나 우여곡절을 겪은 집이다. 이 집의 사랑채는 1919년 3·1운동 당시 홍명희가 괴산 지방의 3월 19일 만세 시위를 준비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 집은 1984년 중요민속자료 146호(괴산 이복기 가옥/槐山 李馥基 家屋)로 지정되었던 집이다. 그 후 소유주의 요구로 1990년 문화재의 지정에서 해제되었다가 홍명희가 다시 세상에 주목을 받게 되면서 괴산군청에서 매입하여 다시 복원한 것이다.

 

이 가옥은 1730년(雍正8년)경에 건축된 것이라고 하는데 현재의 모습은 1860년대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집은 1910년 경술국치에 항거 자결순국한 홍명희의 부친인 홍범식(洪範植)의 고택이자 홍명희가 괴산 3.1만세시위를 준비한 역사적인 장소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홍명희가 계속 살았던 것은 아니다. 홍명희가 만세시위로 옥살이를 하는 동안 가세가 기울어져 가족이 근처 제월리로 이사갔다가 홍명희가 출옥한 후 서울로 이사갔다고 한다. 그러나 서울로 이사간 후에도 홍명희는 가끔 이곳 괴산으로 내려와 지친 심신을 달래기도 하였다고 한다.

 

현재 이 집은 많이 고쳐진 상태이다. 집의 사랑채와 안채의 부재 중 남아 있는 것은 10%도 되지 않는 것 같다. 지정 당시에는 안채와 사랑채, 사랑채에 부속된 아랫사랑채와 사랑채로 통하는 문 그리고 뒤뜰에 있었던 광채만이 있었다. 대문간채와 담장 등은 새로 지었으며 안채의 구성도 1984년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될 당시의 평면과 비교해볼 때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전반적으로 새롭게 고쳐지어지고 새롭게 추가된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오래된 고택의 느낌은 찾기가 힘들다. 마치 영화촬영 셋트장을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든다. 이렇게 된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문화재 지정이 해제되면서 오랫동안 관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관리가 되지 않는 동안 원형 보존이 불가능할 정도로 훼손되었다. 군청이 이 집을 매입하여 복원하기 직전이었을 당시 본인이 이 집을 두 번째로 찾았는데 그 때 이미 이 집은 거의 폐가 수준으로 훼손되었다.

 

이러한 상태였던 건물이다 보니 이 집에서 문화재적인 가치를 찾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집의 문화재적 가치보다는 이 집이 가지고 있었던 특성을 찾아보는 것과 문학사적으로 큰 족적을 남긴 홍명희의 생가였다는 사실과 그리고 우리 독립운동의 산실이었다는 역사적 가치를 찾는 것이 더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다시 고쳐진 규모는 대단히 크다. 복원하기 전보다 집터도 훨씬 더 넓게 잡았다. 이렇게 크게 고쳐지었다고 해서 집의 규모를 일부러 크게 만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원래 이 집은 대지가 1200여 평으로서 한때 50여명이 살던 대저택이었다고 한다. 또한 홍명희 집안을 보면 증조부인 홍우길이 이조판서 역임하였고, 할아버지인 홍순목은 영의정을 지냈으며, 아버님인 홍범식도 금산군수를 역임하였을 정도로 위세가 대단하였던 집안이었다. 따라서 현재 복원한 모습이 원래의 모습과 비슷하였을 것이다.

 

 

 사랑채전경

 

이 집의 배치는 특이하다. 안채와 사랑채가 병렬로 배치되어있다. 이러한 배치를 가진 집이 그리 많지 않다. 병렬로 배치한다는 것은 안채에 대한 감시 내지는 보호의 기능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대지 규모로 보아도 사랑채가 뒤로 들어갈 이유는 없는 것으로 보이는데 왜 이러한 배치를 하였는지 궁금하다.

 

안채는 ㅁ자 형태로 되어있는데 ㄷ자 형의 안채 앞쪽에 곳간채가 맞물린 형태이다. 안채의 입구는 정면에서 보이지 않는 측면에 있다. 안채 앞으로는 중문과 중문에 연결되어 있는 곳간채로 구성되어 있어 앞에서는 안채로 통하는 중문을 찾기 힘들게 되어있다. 이렇게 안채의 입구가 측면에 돌아 위치하고 있어 자연스럽게 내외하도록 되어있다. 

 

중문입구 

 

안채는 3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완벽하게 대칭으로 구성되었다. 안방과 건넌방의 구성에 차이를 찾기 힘들 정도로 대칭으로 되어 있는데 이러한 형식은 전북 정읍의 김동수가옥 외에는 그리 흔하지 않은 모습이다. 대청은 전면 세칸, 깊이가 칸 반 규모로 넓게 구성되어 있다. 복원하기 전의 안채는 완벽한 ㅁ자 형태였다. 그리고 건넌방 쪽은 동측으로 반칸 규모의 퇴칸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툇마루로 복원되어있다. 고증에 의하여 복원하였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얼마 전 남아있었던 형태로 복원하는 것이 맞지 않았나 한다.

 

안채전경

 

사랑채는 안채와 병렬로 배치되어 있다. 사랑채는 잘 다듬은 2벌대 기단 위에 전면 5칸 측면 두 칸 규모로 지어졌다. 사랑채는 반 칸의 전퇴를 가지고 있고 방의 깊이는 칸반 규모로 이루어져 있어 방의 규모가 조금은 크게 느껴진다. 그러나 5칸 규모의 사랑채 중 4칸은 툇마루를 가지고 있으나 맨 우측은 전후 각각 한 칸으로 나누어 뒤쪽은 부엌 앞쪽은 방으로 꾸몄다.

 

사랑마당 남쪽에는 다른 집에서는 볼 수 없는 아랫사랑채가 위치하고 있다. 아랫사랑채는 4칸의 규모인데 부엌 한 칸, 방 두 칸 그리고 대청 한 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낮은 외벌대 기단으로 사랑채와 격을 달리하고 있다. 이 사랑채도 대문 쪽으로는 낮은 담으로 둘러쳐 마당을 형성하고 있어 그런대로 격식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이곳은 주로 외부에서 온 손님들이 묵었던 방으로 사용되었던 듯 하다.

 

안채 뒤쪽에는 동측에 3칸 규모의 사당이 있고 서측에 6칸 규모의 ㄱ자 형태의 광이 있다. 이 외에도 건넌방 동쪽 마당에 한칸짜리 쌀 뒤주가 있고 김치광이 있다. 이러한 광의 규모가 작지 않은 것으로 보아 과거 이 집의 살림살이가 만만치 않았음을 느끼게 한다.

 

광채전경

 

이 집은 뒤로는 바로 뒷산과 면하고 있고 도로보다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지금의 모습만으로는 조금 옹색하게 보인다. 그러나 과거에는 이렇지 않았을 것이다. 집 앞을 흐르는 개울의 바닥이 높아지면서 범람을 방지하기 위하여 둑이 쌓이면서 집이 도로보다 낮게 위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둑이 없었을 때 이 집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참으로 시원하고 풍요로웠을 것이다. 세월의 흐름 때문에 집의 분위기가 변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집을 볼 때는 세월의 흐름까지도 이해하여야 한다. 

 

홍명희 생가를 보면서 문화재로서 가치이전에 질곡을 겪었던 근·현대사를 다시 보게되었다. 일제강점에 온몸을 던져 항거한 홍씨 가문은 결국 이 집을 떠나게 되었고, 해방 후 복잡하였던 정세로 인해 다시 월북하였다. 일제에 대한 항거는의 역사는 무시한 체 단지 월북을 했다는 이유 때문에 이 집의 보전가치에 대한 논란이 현재까지도 이어져 온다. 이 집은 <임꺽정>의 문학사적 가치는 차치하고 라도 집 자체로서 보전가치가 있었던 집이었다. 만일 홍명희가 월북하지 않았다면 이 집은 다른 어떠한 고택 못지 않게 주목을 받을 것이다. 집에까지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는 현실이 아쉽기만 하다.


 

출처 : 사단법인 한국의 재발견
글쓴이 : 최성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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