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소수서원(紹修書院)에서 선비에게 등을 돌리다

깜보입니다 2009. 1. 27. 23:13

소수서원(紹修書院)에서 선비에게 등을 돌리다
露天에서 2009/01/21 22:18   http://blog.hani.co.kr/labienus/13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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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표소에서 소수서원 입구까지 이어진 오솔길을 이루는 노송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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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 입구에서 죽계천을 바라보는 참 경치좋은 정자 경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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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 내 유명한 건축물인 강학당. 소수서원은 내부수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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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 건너 편, 선비촌에서 내방객을 맞는 12지신상. 유교를 숭상하는 선비와 12지신의 상관관계를 나는 잘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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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촌 장독대 위로 쏟아지는 겨울 하오의 따스한 햇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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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이름있는 반가(班家)의 가옥이라 하던데, 그 이름을 기억하지는 못한다. 기억하고 싶지도 않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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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촌 내 열부각(烈婦閣)과 충복각(忠僕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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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가호호 대부분 기와 지붕을 얹은 선비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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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계천변 풍광이 좋다 싶은 자리면 어김없이 들어선 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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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에서 선비에게 등을 돌리다 

 

찾아가고자 했던 곳은 경북 영주의 부석사(浮石寺)였지 부석사 가는 길에 자리잡고 있다던 소수서원(紹修書院)은 안중에도 없었다. 주말 이틀을 이용해서 서울에서 경북 내륙과 강원도 영월까지 둘러 보고자 하는 계획 자체가 시간적인 여유를 많이 허락하지 않았던데다 설혹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 하더라도 "서원따위"를 구경하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몇 주전에 사무실에 뒹구는 <주간 조선>의 "[문화] 무사도? 신사도? 한국엔 선비도가 있소이다!"라는 제하 기사를 흘겨 보고는 요즘 말로 빈정이 팍 상해 버려 과연 좃선스러운 기사를 썼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그렇지 않아도 삐딱하게 여기던 "선비"라는 낱말에 아예 부화까지 치밀어서 내가 그깟 서원을 찾아 가리 싶었던 게다. 하지만 나의 패착은 주말 영동고속도로의 교통사정을 만만하게 봤던데 있었다. 토요일 오전 신갈분기점에서부터 차가 막히더니 용인을 지날 즈음에 이르자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차를 우회하는 국도로 돌리고 말았다. 영동고속도로와 나란한 42번 국도의 교통사정 역시 썩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고속도로보다는 한결 나았으며 여주를 지나 38번 국도에 접어들자 그제야 차가 제 속도를 내어 서울에서 출발, 네 시간 정도만에 제천분기점을 지나 부석사로 닿는 길에 차를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도로 위에서 잠시의 정체 구간을 만나면 조급증을 부리며 차를 험하게 몰아대는 못된 버릇이 또 여지없이 드러나고 말았고 국도의 불규칙한 노면상태까지 겹쳐 동승한 식솔들의 고생이 말이 아니었을 게다. 해서 부석사에서 15km 정도 못미치는 지점에 이르자 식솔들이 차 멀미마저 호소하는 통에 더 이상 운행 계속하겠다고 고집을 피울 게재도 아니었다. 마침 운전 중에 고개를 드니 코 앞에 소수서원이 있다는 교통 안내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고, 잠시 찬 바람을 쐬면 멀미도 가라앉겠지 싶어 그다지 내키지 않는 기분으로 찾아간 곳이 소수서원이었던 것이다.

 

역사에 과문한 내가 알기로 조선 왕조 오백년의 지배 이념으로, 또한 지배적 종교 제의로서 유학 혹은 유교, 좁게는 중국 송나라 때 사람 주희(朱憙)의 유학에 대한 해석을 추앙하는 주자학(朱子學) 혹은 성리학(性理學)에 이슬람에서의 메카와 같은 곳이 이 땅에 있다면 그곳은 바로 소수서원이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이 대단한 소수소원에 잠깐 스치고자 멈추어선 대가는 시작부터 만만치 않았다. 지금껏 문화재관람료를 지불했던 것을 되집어 보니 소수서원의 입장료는 그 대단한 역사에 걸맞게 책정했나 싶게 정말 만만치 않았던 것이며 대충 기억하기로는 지금껏 내가 치룬 문화재관람료 중 최고 수준이 아니었나 싶었다. 대체 무슨 대단한 볼거리가 있기에 이리 비싼 관람료를 받는 것인가 의아해하며 출입구에 발을 디디자 처음 우리 일행을 맞은 것은 수령이 조이 기 백년은 넘어 보이는 아름드리 노송들이었다. 그 노송들이 군락을 이룬 소슬한 오솔길을 걸으면서 이런 길을 걸을 때는 개똥 철학이 될지라도 나름 심오한 사색들이 머리 속에 가득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내 머리 속에 가득한 것은 오히려 조선 시대, 오점으로 얼룩진 서원의 역사였으며, 그 서원에 똬리를 튼 채 선비를 칭하던 자들이 남긴 부끄러운 작태들에 대한 기록이었다.

그렇게 오 분 여를 걸었을까. 오솔길의 끝에서 우리 일행을 처음 맞은 곳은 경렴정(景濂亭)이라는, 뜻은 고사하고 읽기 조차 쉽지 않은 이름을 가진 정자였으며, 그 정자 너머 한창 내부수리가 진행 중인 소수서원이었다. 내부 수리중이라 비싼 관람료를 받은 것이 송구해서였을까. "내부수리중"인 소수서원은 화살표를 세워 놓고 우리의 걸음을 겨울 바람에 얼어붙은 죽계천(竹溪川) 계곡 돌다리 너머 '선비촌'으로 안내를 했던지 몰아갔던지 했다. 소수서원 입구에서 입장권과 함께 건네진 얇은 안내물 위에는 소수서원과 함께 근래 지어진 것이 틀림없을 소수박물관과 선비촌과 유교문화학교를 소개하고 있었다. 소수서원의 입장료가 비쌀 수밖에 없던 까닭이리라.  재정이 넉넉하지 않을 중부 내륙지방의 지방자체단체가 "개발"한 박물관과 선비촌과 유교문화학교 건립의 재원은 어디서부터 온 것이며, 그 개발의 효익은 과연 누구에게로 돌아가게 되는 것일까.

 

조선 전기 왕권과 야합한 훈구파들이 왕권 찬탈에 크게 또는 작게 기여한 대가로 공신으로 책록 받는 방법을 통하여 공신전이라는 이름으로 토지에 대한 이권을 차지하고, 이 이권이 자자손손 상속되면서 국가 재정을 갉아 먹고, 백성을 가렴주구(苛斂誅求)하는 병폐가 이어지자 이를 비판하며 등장한 세력이 사림(士林)파라 불리는 사람들로 알고 있다. 이들은 사화(士禍)라는 이름으로 수없이 죽임을 당하는 속에서도 끊임없는 권력투쟁을 벌여 마침내 훈구파를 몰아내고 권력을 차지하게 되었으니 그 상징적인 사건이 1506년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중종을 새로운 임금으로 내세운 이른 바 중종반정(中宗反正)이었다. 이 중종반정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사림들이 스스로 공신 책록을 거부했다는 이야기는 아직 들어 보지 못했다.

사람파는 자신들의 지배이념을 증표하는 구체적 공간으로, 유학의 선현들에게 제사를 배향하고 또 후학들에게 유학을 가르치는 교육공간으로 서원이라는 것을 세우기 시작했으니 그 처음이 중종 때인 1542년 세워진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었다. 정권을 잡은 사림들은 줄기차게 서원의 경제적 기반을 국가에서 부담할 것을 '청원'했으며 그 구체적 결실을 처음 거둔 곳도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곧 소수서원이었던 것이다. "사림들의 청원을 받아들인" 명종 임금은 소수서원의 현판을 하사하고 - 이를 사액이라고 한다 - 전답을 제공하였으며, 서원에 면세의 특권과 병역 면제의 특권을 부여했다. 서원에 대해 세금을 빼주고, 그곳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군대에서 빼준다는데 서원이 더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이후 서원은 전국 방방곡곡에 우수죽순처럼 생겼고 숙종 대에 이르면 면세와 면역의 특권을 가지는 사액서원만도 전국에 130여 곳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사이 서원의 폐단을 인식하고 이를 바꾸어 보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시도들은 번번이 좌절과 실패를 맛볼 수밖에 없었으니 오히려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서원은 전국 방방곡곡에 더욱 단단히 뿌리를 내리며 국가 재정을 갉아먹고, 서원에 필요한 재정을 추렴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백성을 가렴주구하는 온상으로 변질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1864년에 집권한 대원군(大院君)이 자신의 정치개혁의 시발점으로 삼은 일이 바로 서원에 대한 일체의 특권을 철폐하였다는 점은 이미 곪을 대로 곪은 서원의 병폐를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일대 사건이었다. 대원군은 사표(師表)가 될 만한 47개소의 서원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였다. 그 서슬 퍼런 대원군의 서원 철폐에서도 살아남아, 오늘 나를 맞은 곳이 바로 소수서원이었던 것이다.

그 서원에 똬리를 틀고 앉아 유학의 선현들에게 배향하고, 성리학을 배우고 가르치던 선비라는 자들은 어떤 자들이며, 그들이 추앙하는 성리학이란 어떤 학문일까. 백과사전에 나열된 상식과 제도 교육 끝에 머리에 남겨진 잡다구리하고 얕은 지식으로는 도무지 범접도 못할 의문이다. 하지만 그 성리학이 '나'의 본질을 고민하는 학문, 내가 누구의 아들이고, 누구의 손자이며, 누구의 친척이고, 누구의 동문(同門)이며, 누구와 동향(同鄕)이고, 내가 속한 파당(派黨)이 어디인지는 분명히 구별하라고 가르치는 학문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다. 다만 내 지식이 얕아 거기에서 말하는 "구별과 차별"의 차이를 잘 알지 못할 뿐. 그 성리학이 또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는 것도 조금은 알고 있다. 임금과 신하가 다르고, 어른과 아이가 다르며, 남편과 아내가 다르고, 스승과 제자가 다르니 다 그에 해당하는 도리를 지켜야 그것이 곧 사람이라는 것이다. 뿐이랴. 임금과 신하가 다르고, 관료와 백성이 다르며, 양반과 상놈이 다르고, 적자와 서자가 다르니 세상 모든 이치에 선(先)이 있고 후(後)가 있어, 선(先)이 베풀고 후(後)가 따르면 참 아름다운 세상이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도 곁눈질로 훔쳐봐 조금은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세상의 질서에는 항상 선(先)의 호의나 호혜를 전제로 할 뿐, 그 선(先)이 악의나 악행을 베풀 경우 후(後)는 어찌 대처해야 할지 가르치지는 않을 것이다. 공자님 말씀이 참을 인(仁)이니, 참고 또 참으면 또 세상은 조용하고, 그래서 살기 좋아지는 것일까. 그래서 유교로 칠갑이 된 조선 사회는 온 백성이 살기 좋던 그런 세상이었던가.

또한 소위 그 선비라는 자들은 대체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던가. 죽계천 계곡을 따라 경치가 좋을 만한 곳이라면 어김없이 자리잡은 정자에서 유교의 경전해석에, 유학에 매진하던 그 선비들이 살던 흔적은 소수서원 건너 죽계천 계곡 옆에 마치 드라마의 세트처럼 복원해놓은 선비촌에 있겠는데 그 선비들이 성리학을 공부하고, 사색하는 동안, 그 경제 생산의 공백동안  선비를 먹여 살리는 생산을 감당하던 다른 누군가의 흔적을 안내하는 문구는 선비촌 어느 곳에서 찾을 수가 없었다. 겨울 하오의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선비촌 반가(班家) 기와장에는 선비를 위하여 그 기와장을 얹은 장인의 흔적이 남아 있어야 하고, 그 집 마당에 쌓아 놓은 볏집단에는 선비를 위하여 땀흘려 그 알곡을 거두어 들인 농부의 흔적이 남아있어야 하고, 뒤 뜰 장독대의 반짝이는 옹기들에는 선비를 위해 그 뚜껑을 여닫으며 평생을 보낸 아녀자의 흔적이 남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소수서원과 선비촌 사이에는 열부각(烈婦閣)과 충복각(忠僕閣)이 또 유교적 절의의 사표(師表)로 남아 있었다. 이 열부각의 충복각의 안내 설명은 이렇다. 조선 말기 '우리 고을' 여흥 민씨댁으로 시집 온 반남 박씨가 남편이 일찍 죽자 혼자 시집살이를 하게 되었단다. 그런데 이 반남 박씨를 흠모하던 이웃 천석꾼 김 아무개가 박씨를 집적거렸던 모양인데 박씨가 이를 받아 들이지 않자 박씨에 대해 온갖 헛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며 괴롭혔단다. 이에 참다 못한 박씨는 관(官)에 자신의 억울한 입장을 호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자신의 결백을 밝혔다고. 한편 이 과정을 지켜본 박씨네 종 고만석이 마님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 주고자 상경하여, 임금에게 이 일을 알려 신원을 회복하게 되었다고하며 그 후 소수서원이 주체가 되어 전국 유림들의 발의를 얻어 두 사람의 "가상한 뜻"을 기리고자 1863년에 각각 열부각과 충복각을 세웠다는 것이다. 나는 그 열부의 뜻이 얼마나 '가상한 것'이었는지 종내 이해할 수 없었고 다만 남편을 먼저 보내고 홀로 시집살이를 감당해야 했을, 이름도 남아있지 않은 반남 박씨 여인의 고단한 삶이 가여웠다. 그리고 노비(僕!)로서 곤궁한 생을 평생 끌어가야 했을 고만석이라는 종의 일생이 눈 앞에 보여 마음이 무거웠다. 그 과부의 정절과 종의 충성은 대체 누구를 향하는 정절과 충성이었기에 전국의 유림(儒林)들이 그리 쌍수를 들어 그 가상한 뜻을 기렸다는 겐지 답을 알 수 없었고 인간으로 차마 하지 못할 고통을 감내하게 만든 그 정절과 충성의 관념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 되물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 기껏 민란(民亂)이라는 한 토막 역사에 남은 채 지배계층의 가렴주구에 저항하다 목슴을 잃었던 그 숱한 사람들, 그들을 위해 이 땅 어느 곳에 안타까움을 전하는 돌 조각 하나가 서있던가. 그리고 종놈 돌이(乭伊)에게 시집간 종년 삼월이가 돌이를 위하 목숨을 끊었다한들 삼월이를 칭송하는 열부각이 이 땅 어디에 서 있던가. 언제나 유교적 가치에 근거한 열부(烈婦)는 여흥 민씨댁에 시집온 반남 박씨댁 규수여야 하는 전제가 필요했다.

조선 초기, 소위 양반 인구가 전체의 10%가 넘지 않았다 하던데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양반이 절대 다수를 차지했으며, 이제와 스스로 양반이 아닌, 선비가 아닌 '상 것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는 아이러니를 오늘날 경북 영주, 소수서원 곁에 들어선 유교문화학교에서는 어떻게 가르치고 있을까. 흔히 반만년 이어온 단일 민족이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이면에, 자랑스러운 고구려의 정복 역사가 바로 '우리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이면에 고려 말에 중국 송나라에서 한반도로 건너와 충청도 어디에 터를 잡고 유교적 학식과 덕망으로 나라에 큰 공을 세워 왕으로부터 충문(忠文)인지 문충(文忠)인지 모를 시호를 받아 문중의 시조가 된 사람의 후손이라는, 자랑스러운 반가(班家)의 후예라는 사람들이  21세기에도 주변에 넘쳐 난다는 아이러니에 대해서 유교문화학교는 어떻게 가르치고 있을까. 둘 중 하나는 가짜이어야 하겠는데 내가 사는 이 곳, 이 시대는 진짜와 가짜를 막론하고 나에게 유리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내 것이요, 내 것이니 진짜라는 터무니없는 논리가 판을 치고 있다고 보는 내 시선은 그곳, 소수서원의 어디에 머물고 있었을까.

 

내가 늘 아이와 같이 호흡하지 못하는 무성의한 아비여서 그랬을까. 나는 선비촌 구경에 열심인 아이에게 우리의 '전통'은 이곳과 아무런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고, 네가 어쩌면 '선비'라는 자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고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선비촌에 서서 우리의 전통과 자신의 뿌리에 대해 묻는 아이에게 내가 알기로 겨우 입이 풀칠하기에 족한 향촌의 자영농에 불과했던 너의 할아버지, 그분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여기 선비촌에 서있는 번듯한  기와집이 아니라 아마 초가집에서 평생을 사셨으리라, 어쩌면 이런 기와집은 한 평생 구경도 못했을지도 모르리라, 어떤 분은 한자로 된 유교 경전은 고사하고 우리말조차 글로 표현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리라 말할 수 없었다.  그것은 비단 너의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의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 역시 그러하였을 개연성이 훨씬 높을 것이라 말할 수 없었다. 이 와중에 계속 선비촌을 신기하게 둘러보는 식솔들의 걸음을 재차 재촉한 이유는 부석사로 향해야 할 여정이 남이 있는 때문만도, 그 여정을 감안하자니 겨울 해가 너무도 짧은 탓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 조악한 복원 '선비촌' 앞에서 거듭 우리의 전통을 묻는 어린 아들에게 나는 차마 여기에, 이곳에 너와 나의 전통이 있지 않다고 단호하게 잘라 말하지는 못했다. 다만 건물 앞에 서있는 안내판을 열심히 읽으라고 말해두고는 애꿎게 겨울 하늘을 올려다보며 사진만 찍어 대고 있었다.

그 사진을 찍는 손가락이 무척 시렸던 까닭은 한 겨울 한파 때문만도 아니었고 아름드리 소나무 가지가 늘어진 죽계천 계곡이 얼어붙어 있던 까닭도 아니었으리라. 소수서원을 등지고 서둘러 출입구로 돌아서는 내 입가에 낮은 소리로 맴돌던 말, '선비? 즐 쳐드삼!'은 마침 차갑게 불어오던 겨울 바람에 묻히고 말았다.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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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re Gagn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