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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온돌 다시 읽기(수정본)

깜보입니다 2010. 4. 28. 08:50
온돌 다시 읽기

살아가는 환경이 변화하면 사람의 행동에 변화를 주고 결국은 사람의 사고에까지 영향을 주게되는 것이다. 예로 우리가 더운 지방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면 지금의 삶과는 전혀 다른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더운 나라에서는 우선 옷이 많이 필요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옷을 수납하기 위한 가구가 단출하게 된다. 변화는 이것에 그치지 않는다. 주변의 자연환경 또한 지금 살고 있는 것과는 달라서 아름다움에 대한 느낌도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몸 또한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서서히 이러한 기후에 적응하기 위하여 변화가 된다. 더운 지방에서 오래 살다가 보면 더위에 적응이 되어 조금만 추운 지방에 가더라도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춥다고 느끼게 된다. 이처럼 사람은 환경에 적응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집이라는 것도 어떻게 보면 우리가 만들어 놓은 환경이다. 그렇기 때문에 살고 있는 집이 변하게 되면 집안에서 사는 사람의 행동이나 사고도 저도 모르는 사이에 집에 적응해가면서 변화하게 된다.

전혀 다른 구조의 집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이전에 살았던 집과 새로운 집과의 생활에서 자신에게 어떠한 변화가 있는지를 꼼꼼하게 관찰하여 보면 행동, 생활, 사고 그리고 구체적으로는 가구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단독주택에 살 때와 아파트에서 살 때의 차이점을 비교하여 보자 단독주택에서 살고 있는 사람은 김장을 하여 마당에 묻어두고 먹는다. 그러나 아파트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어 냉장고 또는 깊은 김치맛을 원하는 사람들은 주변사람의 도움으로 받게된다. 또한 아파트에서는 청국장과 같은 냄새나는 음식을 먹기가 그리 쉽지 않다. 아파트 실내에서 운동을 할 때는 아랫집의 눈치를 살펴야 하지만 단독주택에서는 그러할 필요가 없다. 반면에 아파트에서는 도둑에 대한 걱정없이 외출을 할 수 있지만 단독주택에서는 쉽게 그렇게 하지 못한다. 이처럼 집의 형식에 따라 생활에는 많은 차이를 보이게 된다. 이러한 차이를 이해하고 나면 '사람이 집을 만들지만 집은 사람을 만든다'는 것을 깊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한옥을 대표하는 특징으로 온돌을 손꼽는다. 온돌이 우리의 주생활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커서 오히려 이제는 온돌이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인지를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온돌이 집에 전면적으로 도입되었다는 것은 주생활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삶의 모든 것을 결정한 중요한 요소로 이해하고 있다. 즉 온돌이 온 나라에 도입된 이래로 우리의 생활은 전면적으로 재편되었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가 이러한 온돌을 다른 나라에 없는 고유의 난방시스템만으로 이해하는 것은 온돌이 우리에게 준 영향의 극히 일부만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온돌이라는 난방시스템의 도입은 온돌이전의 생활과는 전혀 다른 생활이 요구된다. 우리 집의 또 하나의 특징인 신을 벗는 생활도 온돌이 없었으면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생활이다. 즉 신을 벗는 것은 온돌이 때문에 이루어진 생활인 것이다. 온돌이전의 난방은 난로와 같이 한 지점에서 발생하는 복사열로서 난방을 하는 것이지만 온돌은 바닥면 전체의 복사열을 이용한 난방이다. 이러한 난방의 특성 때문에 열효율을 높이기 위하여서는 바닥에서 방열하는 면적을 최대한으로 늘리는 것이 중요하다.

80년대 이후에 지어진 아파트는 바닥이 모두 온돌로 되어있다. 그러나 난방을 위한 온수배관을 할 때 붙박이장을 제외하고는 가구의 배치를 고려하여 특정부위에 바닥 난방을 제외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하여 바닥 전체에 일정하게 난방을 보내고 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신을 벗고 생활하기 때문에 난방이 되는 곳과 되지 않는 곳의 느낌의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집 전체가 충분히 따뜻하더라도 난방이 되지 않는 곳에 발을 대거나 앉았을 경우 매우 불쾌한 감정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바닥 전체가 난방이 되는 상태에서는 가구로 바닥을 가리는 것은 열의 효율을 낮추게 되는 근본요인이 된다. 특히 침대 같은 것으로 바닥을 가리는 것은 목재로 만들어진 침대 자체에도 좋지 않고 열효율 측면에서도 매우 비효율적인 것이다. 온돌의 경우 바닥면적의 1/5을 가린다면 열효율은 1/5정도 줄어든다고 생각하면 거의 맞는다고 할 수 있다.

과거 나무나 짚 등을 때어 난방을 하였던 온돌에서는 지금보다도 더욱 연료를 절약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그리고 지금보다도 기밀성과 단열성능이 좋지 않았던 과거에는 열효율을 최고로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바닥을 가구로 가리지 않도록 실내의 가구를 최소로 하는 방향으로 집이 구조를 개선하여 갔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고려시대의 가구와 조선시대의 가구 특히 온돌이 완전히 정착된 후의 가구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현재 조선조 초기나 고려시대의 가구의 예가 없어서 단정을 할 수 없으나 고려시대의 그림을 보면 분명 입식생활을 하는 모습이 나타나 있어 조선조와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입식생활에서는 많은 가구가 필요하게 된다. 특히 집에서 탁자와 의자는 없어서는 안될 가구이다. 그러나 좌식 생활에서는 탁자는 쟁반으로 대치될 수 있어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가구가 되고, 의자는 더욱 필요가 없는 가구가 되어 버린다. 그리고 조선조 초기까지 침상의 기구로 사용하였던 와탑(臥榻)은 조선조 후기에 들어서는 거의 그 자취를 찾기 힘들게 된다. 이렇듯 온돌의 도입은 집안의 가구에도 큰 변화를 가져온다. 한옥에 벽장이 많은 것은 온돌과 무관하지 않다. 온돌의 특성에 맞추어 난방에 지장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수납의 장소를 가구에서 벽장으로 옮겨간 것으로 이해하여도 무관할 것으로 생각한다.

온돌의 특징은 바닥이 전반적으로 따뜻하기 때문에 바닥에서 올라오는 느낌이 매우 좋다. 그렇기 때문에 온돌바닥에 앉는 것이 오히려 편하고 안온하게 느껴진다. 이러한 이유로 온돌에서의 생활방식은 자연스럽게 좌식생활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좌식생활의 정착은 천장의 높이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눈높이와 천장의 높이는 깊은 상관관계를 갖는다. 같은 천장의 높이라고 하여도 앉아서 생활할 때와 서서 생활할 때 그 느낌이 다른 것은 눈높이를 기준으로 하여 높이를 인식하기 때문이다. 같은 천장 높이라고 하여도 앉아서 생활할 때 훨씬 높게 느껴진다. 따라서 좌식생활을 할 때 천장의 높이는 입식생활을 할 때보다 낮아질 수밖에 없다. 한옥에서 대청과 방의 천장 높이가 다른 것은 생활의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앉아서 생활하는 방은 천장의 높이가 낮고 제사 등과 같이 공식적인 활동이 많이 이루어져 서서 생활하는 기간이 많은 대청은 천장이 높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천장의 높이는 방의 규모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방의 넓이와 높이는 긴밀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방의 넓이에 따라 천장의 높이가 결정된다. 방이 넓을 때 천장이 낮아지면 중압감에 답답하고, 방이 좁은데 천장이 높으면 감옥이나 우물 안에 앉아있는 듯 불안하게 느껴진다. 이처럼 방의 넓이와 천장의 높이는 어느 정도 비례가 맞아야 한다. 한옥이 단위 방의 규모가 작은 것은 천장의 높이와 비례를 맞추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넓은 방이 필요할 경우도 있다. 이러한 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단위의 방 몇 개를 개방하여 넓게 쓰는 방안을 강구한 것이 칸의 개념이다. 조선시대의 집을 보면 한 칸이 일반적으로 8자 단위로 되어있다. 미터로 환산하면 8자는 2.5m정도로서 예전처럼 가구가 단출하다면 생활하기에 그리 불편하지 않은 규모이다. 특히 잠을 자는 크기로는 오히려 안온하게 느껴지는 규모이다. 서양의 대저택을 보면 침실의 규모가 클 경우가 있다. 이러한 경우 침대의 사방을 커튼으로 가려 놓은 것을 영화 등을 통하여 많이 보았을 것이다. 이것은 방의 규모가 너무 클 경우 수면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편안한 수면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함이다. 이처럼 개인의 공간을 위한 단위는 8자라는 치수가 적정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단위를 기본으로 하여 칸반, 2칸, 4칸으로 구성되는 방은 요사이 말하는 모듈플랜(module plan)과 비슷하다.

좌식생활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바닥에 앉는 것이 편하다. 그렇기 때문에 바닥에 앉기 위하여 특별한 장치를 한다. 이러한 장치가 바로 장판지이다. 장판지는 앉는 생활에 적합하도록 개발된 마감재이다. 바닥의 열효율을 높이기 위하여서는 마감의 두께가 두껍지 않아야 한다. 고려도경에는 고려의 서민은 토상의 온돌에서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처음 온돌이 깔렸을 때는 상부는 흙바닥이었을 것이다. 그 위에 짐승의 가죽이나 짚, 멍석 등을 깔고 생활하도록 되었을 것이다. 고려시대까지만 하여도 서민들이 온돌을 사용하였고 귀족의 집에서는 숯불로 난방을 하였다고 한다.(한국생활사박물관 7권 42쪽) 숯불로 난방을 한 것은 나무를 땔 경우 연기 때문에 생활하기가 힘들었고, 그을음으로 집을 더럽혀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고려시대의 귀족의 집은 온돌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닥은 전(塼)을 깔았다고 한다. 조선조 초인 세종 때까지도 이러한 습속이 남아있어 나라에서 집 바닥에 까는 전(塼)을 정승 이상의 관료에게 나누어주었다는 기록이 있다.(맹씨행단 성역화사업 종합정비 기본계획 아산군 1994 35쪽) 이렇게 상류층 가옥에 온돌의 보급이 늦어진 것은 청결 등과 같은 관리의 문제와 미적 감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온돌의 마감재료가 마련되지 못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러한 문제를 일거에 해소한 것이 바로 장판지의 개발이라고 생각한다. 장판지의 개발로 온돌에서 품위 유지를 위한 청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조에도 장판지를 일반인들이 쉽게 사용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 만큼 만드는 과정이 종이보다는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조에 종이를 구하는 것은 양반들에게도 그리 쉽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옛날의 편지를 보면 종이를 아끼기 위하여 종이의 주변부까지 글을 빼곡이 써넣은 것을 쉽게 볼 수 있는데 이렇게 편지를 쓴 것은 종이가 귀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종이를 쉽게 구할 수 있었다면 이렇게 편지를 작성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쉽게 구할 수 없는 종이이고 보니 기름을 먹인 장판지의 경우는 더하였을 것이다. 하여간 장판지가 온돌 위에 깔리고 나서는 집은 예전의 전바닥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청결 문제와 기타의 생활상의 관리 문제를 원활하게 해결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되자 상류층에도 온돌의 보급이 급속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물자가 풍족한 상류층계급에게 온돌이란 그리 시급한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온돌은 돌과 흙의 잠열을 이용하여 오랜 시간동안 열을 공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고안된 난방시스템이다. 그러나 풍족한 상류층에게는 이러한 것이 필요성을 긴박하게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난로를 통하여 늘 따뜻한 열기를 공급받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신을 벗고 오르내릴 수밖에 없는 이러한 난방은 오히려 불편하게 느꼈을 수도 있다.

장판지의 개발은 온돌에서의 생활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킨다. 앉는 것에 거리낌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다보니 집에서의 생활이 철저하게 좌식생활로 변화된 것이다. 앞서의 가구의 문제에서도 언급하였던 열효율 유지에 적합하도록 집의 구조와 가구가 변한 것처럼 모든 가구는 좌식생활에 적합하도록 개조되어갔다. 우선 가장 큰 변화는 집안에서 의자가 사라졌다는 점이고 다음으로 책상도 앉는 높이에 맞도록 변화하고 가구도 높게 만들지 않고 낮게 제작되었다. 또한 장판지가 상하지 않도록 책상이나 소반의 발 아래에는 길게 나무를 덧대어 다리의 구조를 보강하여 주면서 끌림에 장판지가 상하지 않도록 고안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가구에만 그치지 않는다. 집의 구조에도 변화를 가지고 오게된다. 머름대는 철저하게 앉은 사람을 고려하여 높이가 결정되었다. 만일 온돌에서도 입식생활을 하였다면 머름대의 높이는 요사이 사무실건물에서처럼 70cm이상의 높이를 유지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외관에도 영향을 주어 지금과 같은 한옥의 모습으로 보이게 된 것이다. 만일 우리가 계속 입식생활을 하여왔다면 우리의 집의 문과 창의 전체적인 모습은 중국의 집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온돌과 그에 따른 가구의 변화는 집의 활용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우리의 밥상을 보면 쉽게 움직이고 보관이 가능하도록 발을 접을 수 있도록 되어있다. 이러한 변화는 방의 활용에 있어 많은 사고의 변화를 가져온다. 한옥에서는 안채, 또는 사랑채처럼 남녀 구별에 따른 집의 분화는 있어도 기능 구분에 따른 실의 구분은 없다. 한옥에서는 기능별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은 크게 나누어 방, 부엌, 창고 외에는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서양의 집을 보면 침실, 응접실, 거실, 가족실, 주방, 식당, 창고 등 기능에 따라 수없이 많은 방들이 발전되어 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용도에 의하여 구분되는 것이지만 이렇게 구분되는 것에 일조를 하는 것은 가구이다. 우리의 집은 가구가 없기 때문에 가구에 따라 구분이 될 조건이 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침대가 있기 때문에 침실이라는 실이 구분되어 불리는 것이다. 그러나 한옥에서는 이불의 펴면 침실이요, 이불을 개어 다락에 넣으면 거실이고 응접실이다. 또한 밥상을 펴면 식당이고 밥상을 접으면 다시 거실이 된다. 이렇듯 한옥에서는 방은 매우 복합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한옥의 방은 서양에서 분화된 방의 모든 기능을 한곳에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옥에서의 방의 이름은 안방, 사랑방처럼 사용자에 따른 구분이나 건넌방, 문간방처럼 어느 곳에 위치하였는가에 따른 이름 밖에는 없다. 즉 온돌이라는 특수 구조와 그에 따른 가구의 변화가 서양과는 전혀 다른 가변성이 풍부한 주거를 만들어냈다.

지금과 같은 한옥의 구조가 조선조 초기 이전에서도 존재하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가구의 특성 때문에 온돌이 전면적으로 도입되기 전의 방은 서양처럼 그 용도에 따라 구분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한다. 특히 좌식생활을 하는 경우 기능에 따라 소용되는 가구가 많은 면적을 차지하기 때문에 고려시대의 상류층의 집은 최소한 거실과 침실 그리고 식당 정도는 구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고려시대의 집의 구조를 이러한 관점에서 연구하여 나간다면 의외의 결과를 얻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제 온돌이 들어옴에 따른 집의 구조의 변화를 찾아보자. 우선 온돌이라는 특수 구조 때문에 변화하는 것은 기단의 변화이다. 온돌을 깔기 위하여는 기단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초기의 구들은 단순한 구조로 되어있어 기단이 그리 높지 않았으나 온돌이 발달하여감에 따라 더욱 높아졌다고 한다. 온돌이 발전하면서 부넘이 등의 구조가 추가되면서 온돌을 설치하기 위한 높이가 점점 높아져 최종적으로는 현재의 높이가 되었다는 것이다.(맹씨행단 내 고택을 중심으로 본 고려말 목조건축에 관한 연구: 정연상 56쪽-59쪽) 이러한 온돌은 현대에 와서는 근본적인 변화가 있게 된다. 예전에는 아궁이에 불을 때서 열기를 고래를 통하여 공급하던 방식이 외부에 보일러라는 열원을 두고 온수로 바닥을 난방하는 방식으로 변하게 되어 이제는 예전과 같은 높이가 필요가 없게 되었다. 충남 홍성의 조응식가옥(중요민속자료 198호)을 보면 온돌을 들인 본채와 온돌을 들이지 않은 광은 기단의 높이에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점을 보더라도 기단의 높이는 온돌의 설치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온돌 때문에 가장 많은 변화를 가져온 것은 아마도 부엌일 것이다. 고구려의 벽화의 예처럼 예전의 부엌은 반빗간 형식으로 집과는 별도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부엌에서 이용하는 열기가 난방과 관계가 없기 때문에 굳이 부엌을 집과 연관시킬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한옥에서도 여름에는 부엌 뒷마당에 별도의 화덕을 설치하여 음식을 만들었던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난방열과 취사열을 어떻게 이용하는가에 따라 집의 구조가 달라지게 된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집에서 부엌이 집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난방과 취사가 분리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조선조의 집은 열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부엌이 집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조선조에 부엌이 건물 내로 들어오고 특히 사람들이 거주하는 방과 바로 연결된 것은 취사와 난방을 같이 이용하여 열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겠다는 의지에서 나온 결과이다. 실제적으로 우리 나라의 날씨를 보면 난방이 전혀 필요가 없는 시기가 그리 많지 않다. 특히 중부 이북지방을 보면 여름한철을 제외하고는 거의 난방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취사열을 난방에 활용한다는 것은 매우 합리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상류주택에서는 앞서 언급한 내부환경의 문제 등과 난방이 충분히 공급되었기 때문에 부엌의 독립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고려시대 이전의 부엌은 열의 사용법에 있어 현재와 비슷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시대 상류주택에서 부엌이 집안으로 완전히 들어오지 않은 것은 아마도 냄새 등의 문제와 하인들이 식사준비를 하였기 때문에 노동의 효율성을 고려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 지금과는 다른 구조를 형성한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은 근세의 종부들의 삶을 보고 부엌이 여성들을 노동에 묶어두는 주범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조선조의 사회구조가 해체되면서 예전에 노비 등이 하던 많은 가사노동을 안주인인 여성들이 직접 하게되면서 나타난 현상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러한 현상이 발생한 것은 급격한 사회의 변화에 상대적으로 변화에 둔감한 집이 적응하지 못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기와집들은 조선조에는 많은 노비들을 거느리고 살았던 집이다. 이러한 사회구조에서 안주인이 가사노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을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한다. 집안의 노동의 대부분을 노비가 전담하였기 때문에 집의 구조가 불편하여도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20세기 초입을 전후하여 노비가 방면되고 임금노동자로 전환되면서 경제 여건이 허락되지 아니한 많은 집들은 이전과 같은 저렴한 비용으로 노동력을 살 수 없게 되었다. 집안의 경제력이 노동력을 살 수 없게 되자 이제는 안주인들이 직접 노동에 참여하게 되었던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사회상을 보고 예전의 집을 폄하(貶下)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근세에 들어 왜곡된 집구조를 개선한 것이 요사이의 주거 방식이다. 지금의 집을 보면 과거와는 사뭇 다르다. 예전과 특히 많은 변화를 한 것은 여성의 가사활동에 많은 배려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집에 대한 연구 중 많은 부분인 가사노동의 최소화에 대한 연구라는 것만 보더라도 조선조의 집에서 많이 변화하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집을 설계하다보면 집에 대한 의사결정권이 대부분 안주인에게 있다는 것을 개인적으로도 많이 경험하게 된다. 이것은 현대에 있어 집은 안주인의 영역이라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제 구조적인 문제를 떠나서 온돌이 우리에게 미친 정서에 대하여 살펴보자. 정서적인 문제는 주관적인 견해가 많이 가미되기 때문에 개인적인 판단이 많은 것으로 이해하고 읽어주길 바란다. 지금의 온돌은 온수로 간접 난방을 하기 때문에 방 전체가 골고루 따듯하다. 그러나 예전의 온돌은 직접 불을 때어 난방을 하였기 때문에 불에 가까운 곳이 상대적으로 뜨겁다. 그래서 전통의 온돌에는 요사이는 희미해진 개념인 웃목과 아랫목이 있었다. 이러한 웃목과 아랫목의 구별은 방안에서도 상석과 하석의 구별을 가능하게 한다. 특히 추운 겨울 윗사람이 방안에 같이 있을 경우 우리는 당연히 따뜻한 아랫목을 윗사람에게 양보한다. 가뜩이나 자유유서의 유교적 개념이 강하였던 조선조에는 방의 구조까지도 당연히 상하를 구별하는 것은 당연하였을 것이고 그러한 상하개념에 일조를 한 것이 바로 온돌이다. 우리 나라뿐 아니라 모든 나라에도 이러한 상석과 하석의 개념은 있었으나 우리와는 달리 상하의 구분은 가구의 배치나 입구의 방향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우리 나라처럼 난방의 문제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가족간의 유대에서 있어서도 온돌은 일조를 하였다. 따뜻한 아랫목에 같은 이불을 덮고 옹기종기 모여서하는 대화는 가족애를 키우기에 아주 좋은 조건이었다고 생각한다. 사회학적으로 대화의 거리는 그 사회구성원간의 친밀도를 의미한다고 한다. 연인사이의 거리는 스킨쉽(skinship)이 가능한 거리를 유지하고 사이가 그리 가깝지 않은 경우 일정한 거리를 띄어 놓고 대화를 하게된다. 그러나 추운 겨울의 온돌은 이러한 사회적 거리를 자연스럽게 좁히는데 일조를 하고 있다. 이러한 자연스러운 상황을 통하여 가족간의 이해를 높이게 되어 가족을 중요시하는 사회적 정서가 형성된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사람은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은 것이 사람의 공통된 심성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글을 읽지 않아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기는 어렵지만 좌식생활을 하게된 것이 우리에게는 보수적 성향으로 흐르게 한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조선조를 통하여 나타나는 문예 우위의 성향은 성리학적인 사고를 기반으로 한 것에도 기인하지만 온돌문화라는 정적인 문화에도 그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한다. 신을 벗고 앉아있는 사람들이 움직임에 대하여 적극적일 수 없다. 행동하기보다는 사고하는 습관을 더욱 길러 주는 것이 바로 온돌이 아닐까.

위에 언급한 것 이외에도 온돌이 우리의 정서에 미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많다. 지금의 입장에서는 이 문제를 더 이상 언급하기에는 개인의 역량의 한계를 느낀다. 앞으로도 객관적인 안목을 견지하면서 이러한 문제 더욱 관심을 가지고 찾아볼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여러 사람들의 경험이 같이 공유될 때 더욱 쉽게 찾아질 수 있는 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을 읽는 분들의 많은 도움을 부탁드리며 글을 마친다.
출처 : 사단법인 한국의 재발견
글쓴이 : 최성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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