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에서 백제의 마지막 숨결을 느끼다.
수준 높은 문화를 꽃피우며 해상강국으로 군림했던 백제는 700년이라는 긴 역사를 이어갔던 나라입니다. 비록 주변 나라들의 위협을 피해 한성에서 웅진(공주)으로, 그리고 다시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겨야 했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백제는 독자적이고 세련된 문화를 창조해냈습니다. 특히 사비로 천도한 이후부터 백제가 멸망하는 순간까지의 123년은 백제문화의 최전성기로 손꼽히지요.
우리나라의 250여개가 넘는 시·군 중 100년 넘게 한 나라의 수도였던 곳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드뭅니다. 100년 넘게 도읍지라는 지위를 유지하면서 백제의 멸망을 함께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부여는 충분히 특별한 곳입니다. 그러나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부여에 가봐야 하는 이유는, 이곳이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오롯이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을의 문턱에 다가선 요즘, 지식자원관리사업으로 구축된 문화재 학술조사 연구정보 DB(http://www.nricp.go.kr)의 도움을 받아 부여에 남아있는 백제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 부여의 역사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던 부여는 ‘사비'라 불렸던 곳입니다. 한강 유역에 터를 잡았던 백제는 원래 위례성을 수도로 삼았으나 고구려의 팽창정책에 밀려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천도했습니다. 그러나 백제의 제26대 왕이었던 성왕은 백제의 중흥을 이룩하기 위해 538년 웅진으로부터 이곳으로 천도하고, 국호를 남부여로 고쳤습니다. 이후 부여는 660년(의자왕 20)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백제의 수도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부여시대는 백제 역사상 문화의 최전성기를 구가했던 시기이자 일본 고대문화 형성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부여에는 왕궁지를 비롯하여 수많은 불교유적들, 왕릉유적, 부소산과 궁남지 등 완성된 백제문화의 흔적이 밀집되어 있습니다.
신라에 예속된 이후, 부여에는 672년(문무왕 12) 부여도독부가 설치되었고 715년(경덕왕 10)에 이르러서는 부여현(扶餘縣)으로 개칭되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1018년(현종 9) 공주와 병합하여 감무를 두고 다스리다가, 조선시대에는 1413년(태종 13) 독립하여 다시 부여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914년에는 16개 면으로 부여군이 형성되었고, 1960년 1월 1일 부여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 부여와 관련된 설화와 전설
■ 서동과 선화공주
궁남지(宮南池) 라는 연못가에 한 과부가 혼자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 연못에 사는 용(龍)과 정을 맺어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는 어머니와 먹고 살기 위해 마를 캐다 팔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그 아이를 서동(薯童)이라 불렀습니다.
기골이 장대하고 효성이 지극한 장부로 성장한 서동은 어느 날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가 대단한 미인이라는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마을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 주며 “선화공주가 남 몰래 시집가서 서동을 밤이면 몰래 안고 간다"라는 내용의 노래를 부르고 다니도록 했습니다. 이 노래는 곧 온 나라에 퍼졌고, 왕실의 오해를 사게 된 선화공주는 결국 귀양을 가게 되었습니다.
이를 미리 알고 있던 서동은 유배지로 향하는 공주 앞에 나타나 자신이 호위를 책임지겠다고 합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좋아하던 공주는 이내 서동과 사랑에 빠지게 되고, 결국 이들은 백제로 가서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훗날 서동은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그가 바로 백제의 제30대 왕인 무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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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익의 작품, 선화공주도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바로가기 |
■ 조룡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의 침공으로 사비성이 완전히 초토화 되었을 무렵, 고요하던 백마강에서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당나라 군선들이 부소산 근처에 접근하기만 하면 맑았던 하늘이 갑자기 어두컴컴해지고 어디선가 몰려온 돌풍으로 인해 강물이 거세게 소용돌이 쳤던 것이지요.
이런 상황이 한 달 가까이 계속되자 웅진성에 머물고 있던 소정방(蘇定方)은 당나라에서 데려 온 일관(日官)을 불러 그 원인을 알아보도록 했습니다. 그러자 일관은 백마강의 용신이 된 무왕이 하는 일이 틀림없다고 대답했습니다. 놀란 소정방이 묘책이 없겠느냐고 묻자 일관은 백마의 고기를 미끼로 던지면 용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 말했습니다.
그는 일관이 일러준 대로 부소산 북쪽 강물 속에서 솟아난 바위에 올라 철사 낚싯줄에 백마 고기를 끼워 강물 속에 던졌습니다. 그러자 물속에 있던 용이 백마 고기를 덥석 물었고, 그때부터 소정방과 용의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낚시에 걸린 용은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쳤으나 결국 하늘 높이 솟아오르더니 강 동쪽 마을에 떨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이후 소정방이 올라탔던 바위의 이름은 조룡대(釣龍臺)가 되었고, 용이 낚인 강도 백마강(白馬江)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 대조사(大鳥寺)와 미륵석불
성흥산 중턱에 있는 커다란 바위 아래 한 노승이 조그만 암자를 짓고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따뜻한 봄날, 양지바른 곳에서 참선을 하고 있던 노승이 깜빡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커다란 새 한마리가 날아와 황금빛을 발하며 현재의 대조사가 있는 곳에 앉아 큰 바위를 향해 계속 날개를 저었습니다. 그러자 햇빛에 반사된 한 줄기 빛이 바위에 집중되더니 그곳에서 관세음보살이 나타났습니다.
이후에도 노승은 여러 날 동안 같은 시각에 같은 꿈을 꾸게 되자 이를 가림 성주에게 알렸고, 성주는 곧바로 성왕에게 보고했습니다. 성왕은 이제 사비로 천도할 시기가 왔음을 알고 이곳에 대사찰을 짓도록 했습니다. 공사가 시작되자 신기하게도 공사 현장에 새가 날와와 울어 주위를 밝혔고, 새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피곤도 잊은 채 공사에 매진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10년이 걸릴 공사가 단 5년 만에 끝날 수 있었지요.
완공된 사찰은 황금빛 큰 새가 나타났다고 하여 대조사(大鳥寺)라 지었고, 관세음보살이 나타난 큰 바위에는 석불을 조성했다고 전해옵니다.
>> 부여의 주요 문화재와 유적지
■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
ㆍ지정번호 : 국보 제9호
ㆍ지정일 : 1962년 12월 20일
ㆍ소재지 :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54
백제시대에 세워진 석탑 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단 2기에 불과한데, 하나는 익산 미륵사지 석탑이고 다른 하나가 바로 부여 정림사지 석탑입니다. 정림사터 한가운데에 세워진 이 오층석탑은 한때 신라와의 연합 작전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뜻의 글귀를 이 탑에 남겨놓아 “평제탑"이라 불리는 수모를 겪기도 했지만, 발굴조사 결과 백제시대 때 사찰 창건시 세워진 석탑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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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 출처 :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 바로가기 |
우리나라 석탑의 시조라 불리는 정림사지오층석탑은 좁고 얕은 1단의 기단과 배흘림기법의 기둥표현, 얇고 넓은 지붕돌의 형태 등 목조건물의 형식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단순한 모방이 아닌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전체적인 형태가 매우 세련되면서도 단아하여 격조 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습니다.
■ 백제금동대향로
ㆍ지정번호 : 국보 제287호
ㆍ지정일 : 1996년 5월 30일
ㆍ소재지 :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산16-1 국립부여박물관
1993년 백제 나성(羅城)과 능산리 고분군 사이에서 출토된 이 대형향로는 백제미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유물입니다. 몸체와 뚜껑으로 구분되는 이 향로는 사실적이고 입체적인 조각으로 뒤덮여 있는데, 창의성과 조형성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불교와 도교가 혼합되어 있어 백제의 공예와 미술, 종교와 사상, 그리고 제조기술까지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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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금동대향로 출처 :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 바로가기 |
뚜껑에는 23개의 산들이 4~5겹으로 첩첩산중을 이루는 풍경을 보여주고 있으며, 다양한 악기를 연주하는 5인의 악사와 각종 무인상, 기마수렵상 등 16인의 인물상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또한 봉황, 용을 비롯한 39마리의 동물들도 표현되어 있으며, 뚜껑 꼭대기에는 목과 부리 사이에 여의주를 품고 있는 봉황이 날개를 편 채 힘 있게 서 있습니다. 활짝 피어난 연꽃을 연상시키는 몸체에는 26마리의 동물이 배치되어 있으며, 받침대는 몸체의 연꽃 밑부분을 입으로 문 채 하늘로 치솟듯 고개를 쳐들고 있는 한 마리의 용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
ㆍ지정번호 : 국보 제288호
ㆍ지정일 : 1996년 5월 30일
ㆍ소재지 :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산16-1 국립부여박물관
사리를 보관하는 용기로, 능산리 절터의 중앙부에 자리한 목탑 자리 아래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출토 당시 이미 사리감은 폐기된 상태였으므로 사리 용기는 없었습니다. 사리감은 위쪽은 원형, 아래쪽은 판판한 높이 74㎝, 가로·세로 50㎝인 터널형입니다. 감실 내부의 크기는 높이 45㎝ 정도로 파내어 턱을 마련하였는데 내부에 사리 장치를 놓고 문을 설치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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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 출처 :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 바로가기 |
감실의 좌우 양쪽에는 “이 사리감은 성왕(聖王)의 아들로 554년 왕위에 오른 창왕(昌王)[위덕왕(威德王)]에 의해 567년 만들어 졌으며, 성왕의 따님이자 창왕의 여자 형제인 공주가 사리를 공양하였다(百濟昌王十三秊太歲在 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라는 뜻의 글자가 10자씩 새겨져 있습니다.
이 사리감은 백제 역사 연구에 새로운 금석문 자료로서 백제와 중국의 문화교류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입니다. 또한 사리를 봉안한 연대와 공양자가 분명하고 백제사지(百濟寺址)로서는 최초로 절의 창건연대가 당시의 유물에 의해 명확하게 밝혀져 있어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 부소산성
ㆍ지정번호 : 사적 제5호
ㆍ지정일 : 1963년 1월 21일
ㆍ소재지 : 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산4
백마강 남쪽 부소산을 감싸고 쌓은 산성으로 사비시대의 도성(都城)입니다. 백제 성곽 발달사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평가받는 부소산성은 성왕 16년(538)에 왕궁을 수호하기 위하여 처음 성을 쌓은 것으로 여겨지며, 동성왕 22년(500)경에 이미 산 정상을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이 있던 것을 무왕 6년(605)경에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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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소산성 출처 :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 바로가기 |
성곽의 형식은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빙 둘러싼 테뫼식과 다시 그 주위를 감싸게 쌓은 포곡식이 혼합된 복합식 산성입니다. 동ㆍ서ㆍ남문터가 남아 있으며, 북문터에는 금강으로 향하는 낮은 곳에 물을 빼는 수구가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성 안에는 군창터 및 백제 때 건물터와 영일루, 사비루, 고란사, 낙화암 등이 남아있는데, 유사시에는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고 평상시에는 백마강과 부소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이용하여 왕과 귀족들이 즐기던 곳으로 쓰인 듯 합니다.
■ 능산리고분군
해발 121m의 능산리 산의 남사면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백제 무덤들로, 총 7기로 이루어진 고분군입니다. 일제시대에 1∼6호 무덤까지 조사되어 내부구조가 자세히 밝혀졌고, 7호 무덤은 1971년 보수공사 때 발견되었습니다. 고분의 겉모습은 모두 원형봉토분이고, 내부는 널길이 붙은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뚜껑돌 아래는 모두 지하에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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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산리고분군 출처 :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 바로가기 |
고분들은 내부구조와 재료에 따라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호 무덤(동하총)은 네모형의 널방과 널길로 이루어진 단실무덤으로, 널길은 비교적 길고 밖으로 갈수록 넓어지는 나팔형입니다. 널방의 네 벽과 천장에는 각각 사신도와 연꽃무늬, 그리고 구름무늬의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영향으로 보입니다. 2호 무덤(중하총)은 무령왕릉과 같이 천장이 터널식으로 되어 있으며,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3호 무덤(서하총)과 4호 무덤(서상총)은 천장을 반쯤 뉘어 비스듬히 만든 후 판석을 덮은 평사천장이고 짧은 널길을 가졌습니다. 이 형식은 부여지방에 많으며 최후까지 유행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 참고사이트
문화재청 (http://www.cha.go.kr)
부여문화관광 (http://buyeotour.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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