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대 문화정책의 산실, 규장각의 재발견
김 문 식(단국대 사학과 교수)
조선시대에 국가의 문화정책을 담당한 대표적 기구를 꼽으라면, 필자는 세종대의 집현전(集賢殿), 성종대의 홍문관(弘文館), 정조대의 규장각(奎章閣) 세 기구를 거론하고 싶다.
집현전은 1420년(세종 2)에 설립되어 세종대의 문예부흥을 주도했던 기구인데, 1456년(세조 2)에 집현전에서 성장한 다수의 관리들이 단종을 복위시키는 운동에 가담하면서 폐지되고 말았다. 홍문관은 1478년(성종 9)에 설립되어 조선후기까지 지속되었는데, 집현전이 가졌던 기능을 고스란히 계승한 학문 기구였다. 집현전과 홍문관은 중국과 조선의 중요한 도서를 수집하여 보관하거나, 국가의 주요 기록물을 작성했고, 국왕의 질문에 대비하는 자문기구로서의 기능을 가졌다. 집현전과 홍문관은 오늘날의 국립 도서관, 정부기록 보존소, 언론기관을 하나로 합쳐 놓은 기구와 같았다고 하겠다.
규장각은 영조가 사망하고 정조가 즉위하던 해인 1776년에 왕궁 안에 설립된 기구인데, 집현전과 홍문관의 기능을 계승하면서도 당대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한다는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 그러면 정조대 문화정책의 산실이었던 규장각의 기능을 살펴보자.
법고창신의 규장각
정조는 즉위한 바로 다음날, 창덕궁(昌德宮) 후원에 규장각을 설립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는 정조가 전혀 새로운 기구를 만든 것이 아니라 종래의 기구를 계승하면서 발전시킨 법고창신(法古創新, 옛 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함)의 조치였다.
처음으로 규장각을 설립할 것을 제안한 사람은 양성지(梁誠之)였다. 양성지는 세조에게 송나라 황제들이 어제(御製, 황제나 국왕이 지은 글)를 보관하는 건물을 별도로 지어 관리에 만전을 기했음을 언급하면서, 조선 국왕들의 어제를 보관하는 규장각을 경복궁(景福宮) 안에 설립할 것을 제안했다. 국왕의 어제를 중시함으로써 국왕의 권위를 높이는 동시에 국왕의 권한까지도 강화할 수 있다는 취지에서였다. 양성지의 건의를 실천으로 옮긴 국왕은 숙종이었다. 숙종은 1694년(숙종 20)에 종친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던 종정시(宗正寺)에 규장각이란 건물을 세우고, 역대 국왕들의 어제와 어필(御筆, 황제나 국왕의 친필)을 보관하게 했다. 이때 숙종은 ‘규장각(奎章閣)’이란 현판을 직접 써서 건물에 걸었다.
정조가 설립한 규장각은 이러한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그 기능을 크게 확대한 기구였다. 숙종이 건립한 규장각은 어제와 어필을 비롯한 왕실의 물품들을 보관하는 건물에 불과했다. 그러나 정조가 건립한 규장각은 왕실의 물품을 보관하는 것은 물론이고 중국과 조선에서 편찬되는 각종 도서들을 소장하고, 소수의 정예 요원들을 이곳에 소속시켜 국가의 주요 정책을 마련하는 정치기구로 키워나갔다. 정조는 숙종의 어필 현판을 새로 건립한 규장각 건물에 옮겨달면서 숙종의 정책을 계승한다고 밝힘으로써, 새로운 정치기구의 설립에 반대하는 신료들의 논리를 깨트릴 수가 있었다.
역대 국왕들의 기록 정리
규장각이 담당한 최초의 업무는 선왕인 영조의 어제를 편찬하는 일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국왕이 사망하면 즉시 실록청을 설치하여 돌아가신 국왕의 실록을 편찬했다. 정조가 규장각을 설립했을 때에는 할아버지인 영조의 실록이 편찬되고 있었는데, 정조는 이와는 별도로 영조의 어제와 어필을 목판이나 돌에 새겨서 보존하게 하고,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영조의 어제들을 수집하여 깨끗하게 정리해 두었다. 규장각 건물이 완성되자 그 이름을 ‘어제각(御製閣)’ 또는 ‘어제존각(御製尊閣)’이라 했는데, 이는 ‘영조의 어제를 보관하는 건물’이라는 의미였다.
영조의 어제를 편찬하는 작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정조는 자신의 어제를 편찬하는 일에 관심을 두었다. 그때까지 국왕의 어제는 본인이 사망한 후 남겨진 글들을 수습하여 편집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그런데 영조는 국왕으로 있으면서 자신의 어제집(御製集), 즉 문집을 여러 차례에 걸쳐 간행했고, 정조는 이를 계승하여 자신의 문집을 편찬하게 했다. 정조의 문집은 1777년에 처음 편찬되었는데 이는 정조가 세손 시절에 지었던 시와 산문을 모은 것이고, 1781년부터는 규장각에서 국왕 정조의 어제를 편집하는 업무를 전담했다. 정조가 사망한 후 정조의 문집은 ?홍재전서(弘齋全書)? 184권이란 방대한 분량으로 편찬되었는데, 이는 규장각의 사전 편찬 작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정조는 또한 역대 국왕의 행적에서 모범이 될 만한 것을 선별하여 정리한 ?국조보감(國朝寶鑑)?을 편찬했다. 실록은 각 국왕의 행적을 잘 정리했지만 외부로 공개하지 않는 기록이므로 다른 사람들이 열람을 할 수가 없었다. 조선의 왕실에서 ?국조보감?을 편찬하여 보급한 것은 후대의 국왕들이 열람할 수 있는 실록을 만들겠다는 의도에서였다. 정조는 영조의 보감을 편찬하면서 보감이 나오지 않았던 열 두 국왕의 보감까지도 함께 만들었는데, 그 결과 모든 국왕의 보감이 동일한 체제로 정리되었다. 이렇게 편찬된 ?국조보감?은 종묘의 신실(神室)에 국왕별로 보관되었다.
정조가 영조의 어제를 비롯하여 역대 국왕들의 기록을 정리한 것은 선대로부터 자신에게 이어지는 왕권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의미가 있었다. 정조는 특히 숙종 - 영조 - 정조로 이어지는 정통성을 강조했다.
초계문신 제도를 통한 친위세력의 양성
정조가 25세의 나이로 국왕이 되었을 때 그의 권력적 기반은 매우 취약했다. 그의 측근에 홍국영이나 서명선, 채제공 같은 소수의 지지자가 있었지만, 국왕의 개혁정치를 뒷받침할 정치세력은 전혀 형성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정조는 친위세력의 양성에 관심을 두었는데, 문반의 관리는 규장각의 초계문신 제도, 무반의 관리는 선전관 제도와 장용영의 육성을 통해 해결했다.
초계문신(抄啓文臣制) 제도란 37세 이하 문과 시험에 합격한 관리들 중에서 학문적 재능이 있는 사람들을 선발하여 교육시키다가, 40세가 되면 졸업시키는 일종의 ‘공무원 재교육 프로그램’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사가독서(賜暇讀書)’라 하여 관리들에게 일정 기간 휴가를 주어 학문을 연마하게 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초계문신 제도는 이를 응용하여 만든 제도였다. 정조는 초급 관리들 가운데 정예 요원을 초계문신으로 선발하여 일정한 기간 동안 유교 경전 및 역사서를 학습하고 다양한 문체의 문장 작법을 수련하게 했다. 이때 초계문신이 현직에 있으면 본래의 직무를 면제해 주었고, 실직이 없는 사람에게는 군직(軍職)을 주어 녹봉을 받으면서 학문에 전념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초계문신에 선발된 관리들은 국가로부터 다양한 혜택을 받았지만, 그들의 교육 과정은 매우 엄격했다. 이들은 매월 규장각에서 학습한 내용을 가지고 시험을 보았고, 시험 결과에 따라 상을 받거나 벌을 받았다. 시험은 매월 규장각의 관리가 주관하는 두 가지의 시험(경전 읽기, 문장 짓기)과 정조가 주관하는 한 가지 시험(문장 짓기)이 있었는데, 후자는 문제의 출제에서 채점에 이르는 전 과정을 정조가 직접 관리했다.
더위나 추위가 심해지면 초계문신들은 방학을 했다. 그러나 방학이라고 하여 학습이 중단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때 정조는 초계문신에게 문제를 내주고 집에서 답안지를 작성하게 했는데, ?홍재전서?에 수록된 경사강의(經史講義)는 정조가 내린 문제와 초계문신의 답안 가운데 우수한 것을 골라서 편집한 것이다. 그런데 정조가 출제한 문제는 당대의 학문 정보를 총동원하여 작성한 것이기 때문에, 답안지를 작성해야 하는 초계문신들도 학문 연구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초계문신은 1781년(정조 5)에 20명이 선발된 이후 정조대에만 총 11차례에 걸쳐 142명이 선발되었다. 그 중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정약용은 1789년에 초계문신에 선발되었고, 그의 형인 정약전은 1790년에 선발되었다. 또한 19세기의 세도정치를 열었던 김조순은 1786년에 초계문신에 선발되었다.
초계문신은 정조가 집중적으로 육성한 인재로 당대의 학문과 현실 정치에 나타나는 각종 문제점을 연구하고 대책을 마련했다. 이들은 정조가 추진한 개혁정치의 실무자로 활동했는데, 정조가 주도한 규장각의 재교육 시스템을 통해 학문과 실무적 능력을 겸비하도록 훈련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도서 수집과 국가적 출판 사업
정조가 궁궐 안에 왕립 도서관을 세우고 국내외의 도서를 수집한 것은 세손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정조는 1762년에 사도세자가 사망한 이후 국가의 대통을 계승할 신분인 동궁(東宮)이 되었는데, 이때부터 국왕이 될 때까지 줄곧 경희궁(慶熙宮)에서 생활했다. 정조는 경희궁 안에 주합루라는 2층 건물을 세워 학문을 연마하는 장소로 사용했고, 그 옆에 정색당이란 서재를 만들어 자신이 수집한 도서들을 보관했다. 말하자면 정조는 동궁 때부터 개인전용 도서관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정조는 국왕이 된 후 새로운 도서를 수집하는 임무를 규장각에서 담당하게 했는데, 국내 도서의 경우 규장각 이문원에서 구입을 요청하고 탁지부나 비변사에서 비용을 제공하게 했다. 중국 도서를 구입할 경우에는 이문원에서 국왕에게 보고하여 허락을 받으면, 규장각 관리가 중국을 방문하는 사신단에 포함된 역관에게 비용을 지급하여 북경 현지에서 구입하게 했다.
중국 도서의 구입과 관련하여 유명한 사건은 1777년에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전질을 구입한 것이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북경을 방문하는 이은과 서호수에게 ?사고전서(四庫全書)?를 구입해 오라고 명령했다. 1772년에 ?사고전서?를 편찬하기 시작했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고전서?는 그때까지도 편찬이 진행되는 중이었고, 편찬이 완료된 이후에도 외국에서는 구입할 수 없는 귀중 도서였다. 북경을 방문한 사신단은 ?사고전서? 대신 ?고금도서집성? 전질을 구입해 왔는데, 그 분량이 1만권, 5,022책에 이르는 거질이었다. ?고금도서집성?이 수입되면서, 조선 학계에는 상당한 파급효과가 나타났다.
정조대의 도서 수집은 주로 규장각에서 담당했는데, 1781년에 정조는 규장각에 소장된 도서 목록을 정리하게 했다. 그 결과 ?규장총목(奎章總目)?이 작성되었는데, 여기에는 중국본 도서 2만여 권과 조선본 도서 1만여 권을 합하여 총 3만여 권의 서적이 수록되었다. 당시 규장각 도서는 정조가 경희궁에 거처하던 시절에 정색당에 보관했던 것, 홍문관에 소장된 도서를 규장각으로 이관한 것, 강화부 행궁에 보관했던 명나라 도서, 정조가 작성한 ?내각방서록(內閣訪書錄)?을 바탕으로 청나라에서 구입해 온 신간 도서를 합한 것이었다.
정조는 도서 수집과 함께 대대적인 출판 사업을 전개했다. 1777년에 정조는 국립 출판소라고 할 교서관을 규장각에 통합시켰다. 이렇게 해야 체(體, 규장각)와 용(用, 교서관)을 모두 갖추게 되며, 교서관을 궁궐 가까이로 이전시켜야 출판 작업이 편리하다는 서명응의 건의를 받아들인 때문이었다. 정조는 규장각 소속의 관리가 교서관의 관리를 겸하게 하여 도서의 편찬과 출판 업무를 일원화시켰다.
도서를 출판하려면 많은 활자가 필요했다.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활자의 주조에 많은 관심을 가졌는데, 총 5차례에 걸쳐 100만여 자의 활자를 주조했다. 정조가 처음으로 만든 활자는 임진자와 정유자였는데, 이는 모두 세종대에 만들어진 갑인자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만든 활자는 정리자인데, 이는 1795년(정조 19)에 화성에서 개최된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를 정리한 ?정리의궤?를 인쇄하기 위해 특별히 주조한 구리활자였다. 정리자는 이후 화성의 축성을 정리한 ?화성성역의궤?나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와 같이 정조와 깊은 인연을 가진 도서를 인쇄할 때 주로 사용되었다. 정조가 규장각을 교서관에 통합시키고 많은 활자를 주조한 것은 규장각에서 많은 도서들을 인쇄하여 보급시키기 위해서였다.
정조대의 규장각에서는 엄청난 출판 사업이 전개되었다. 오늘날 우리들은 정조 시대를 ‘조선 후기의 르네상스’라 부르는데, 이 시기에 자국의 제도와 문물을 정비함과 아울러 이를 방대한 도서로 출판해 낸 것에 근거한 것이다. 규장각에서 편찬한 도서의 규모는 정조가 작성한 ?군서표기(群書標記)?를 통해 파악되는데, 이는 정조가 21세이던 1772년부터 그가 사망한 1800년까지 편찬한 도서의 내역을 정리한 목록집이다. ?군서표기?에 의하면 정조의 저서는 89종 2,490권에 이르며, 신료들이 작업을 분담하게 하여 편찬한 도서가 64종 1,501권에 이른다. 따라서 정조대에 편찬된 도서의 총량은 153종 3,991권이 된다.
다음은 정조의 측근 신하였던 서형수가 작성한 ?군서표기?의 서문이다.
하(夏) 은(殷) 주(周), 삼대(三代)는 높다. 그러나 한나라, 당나라 이후 저술의 책임은 모두 한미한 출신의 학자들에게 돌아가, 짧은 붓과 흰 비단을 가지고 더듬거리며 일생을 마쳤다. 자신의 학설을 후세에 남긴 사람은 공안국(孔安國)과 정현(鄭玄)에서 시작하여 송나라, 명나라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런 부류였다. 그러나 천년에 한번이나 있을까 하는 행운을 만나 국왕의 지위에 있으면서 과거의 업적을 계승하고 미래로 이어주는 아름다운 저술을 남겼다는 소리는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다만 송나라 태종의 어찬(御撰)은 총 18부 240권이며, 인종의 어찬은 총 100권, 신종의 어찬은 총 90권이다. 그렇지만 어집(御集)이 그 속에 포함되어 있으니. 이 역시 풍부한 저술이라고는 할 수가 없다.
우리 성상(聖上, 정조를 말함)께서는 세손 시절부터 공부에 전념했는데, 낮부터 시작하여 새벽종이 울릴 때까지 항상 손에 책을 들고 있으면서 다른 일이 없었다. 국왕 자리에 올라서는 잃어버린 책이나 빠진 글을 사방으로 찾고 널리 채집하여 장정(章程)을 두루 갖춰놓지 않은 것이 없었다. 따라서 전후로 직접 편찬하거나 명찬(命撰)한 서적 백 수십 종을 합하여 ?군서표기?를 만들었다.
근대의 저술들은 매양 무용지물이란 비난을 면치 못하여, 아침에는 향기가 나는 서가에 꽂혔다가 저녁에는 대나무 광주리로 던져지는 것은 어째서인가? 선배들이 언급한 것을 주워 모으고 겉모양은 기왕의 의례를 따랐지만, 현재에 알리더라도 세상의 교화와 상관이 없고, 후대에 전해져도 실용에 보탬이 없다.
?군서표기?에 수록된 책 가운데 경(經)은 정자와 주자 이후 해결하지 못한 공안(公案)이며, 사(史)는 사마천(司馬遷)과 반고(班固) 이후로 드러나지 않은 서법(書法)이다. 그 외에도 현행 제도, 만물에 미쳐가는 혜택, 언어와 문자의 차이 및 득실 등에 두루 통하여 책을 펼치면 환하게 드러난다. 요컨대 독자들이 도를 본체로 하고, 덕을 쌓으며, 과업을 실천하고, 널리 섭렵하게 하니, 이를 깨닫고 깨우친 효과는 오히려 자잘한 쓰임에 해당한다. 전(傳)에 ‘천하를 경영하고 조화를 풀무질하여 성인의 일을 끝마쳤다’고 했으니, 우리 성상께서 이런 일을 하셨다. 아, 세상에 드문 일이다.
이상에서 서형수는 정조가 편찬한 도서의 양이 방대할 뿐만 아니라 그 질에 있어서도 매우 우수한 것임을 강조했다.
정조대의 출판 사업은, 규장각에 소속된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 규장각에 소장된 방대한 도서들을 연구하여 편찬한 도서를, 규장각의 출판 기능을 통해 즉시 간행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정조대에 편찬된 도서들은 오늘날 우리가 조선시대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된다.
친위세력을 통한 개혁정치의 실현
정조는 규장각의 초계문신 제도를 통해 친위세력을 꾸준히 양성했고, 이들이 국가기구의 중진으로 진출하자 본격적인 개혁정치를 전개했다. 정조가 친위세력을 활용한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하에서는 두 가지 사례를 소개하기로 한다.
첫 번째 사례는 정조가 초계문신 출신 관리를 암행어사로 파견하여 지방 수령을 감찰한 경우이다. 정조는 대부분의 시간을 궁궐 안에서 지냈기 때문에 지방 백성들의 생활을 직접 살필 수는 없었다. 정조는 왕릉 행차를 통해 백성들과 접촉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이는 왕릉이 위치한 경기도 내의 일부 지역에 국한된 일이었다. 정조는 민생을 살피기 위해 암행어사를 지방에 파견했는데, 이때 초계문신 출신 관리를 대거 파견하여 자신의 개혁 의지가 지방으로 파급되도록 했다.
1794년에 경기도에는 큰 흉년이 들었다. 사정이 다급해지자 정조는 백성들을 구제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현지 사정을 파악하기 위해 15명의 암행어사를 한꺼번에 파견했다. 여러 지역의 사정을 파악하려고 다수의 암행어사를 파견하는 일은 있었지만, 경기도 안에 이렇게 많은 인력을 투입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 때 정조는 흉년의 피해가 워낙 심각했으므로 빠른 시간 안에 상황을 확인하려 했고, 암행어사의 감찰 활동이 다른 지역에 알려지기 전에 현지 사정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싶었다. 암행어사가 감찰할 사항에 대해서는 정조가 작성한 봉서(封書)로 전달되었는데, 정조는 자신이 내렸던 지시사항을 소개하면서 현장에서 이 지시가 어떤 방식으로 이행되는지를 조사하라고 했다. 얼마 후 암행어사들이 돌아와 감찰 결과를 보고했고, 조정 중신들의 회의를 통해 각 수령에 대한 상벌이 결정되었다. 그런데 이때 파견된 암행어사들의 대부분은 초계문신 출신이었으며, 정약용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두 번째 사례는 지방의 인재를 선발하는 과정에서 초계문신 출신 관리를 이용한 경우이다. 정조는 1790년대에 들어와 지방의 인재들을 국왕이 직접 선발하는 빈흥과(賓興科)를 실시했다. 지방 유생을 선발하는 과정은 대체로 다음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1. 관찰사가 제술 시험을 치를 유생과 강경 시험을 치를 유생을 선발하여 국왕에게 명단을 보고한다.
2. 시험을 치를 유생들이 정해진 날짜에 지방 감영에 집결한다.
3. 중앙의 관리가 정조가 작성한 문제를 가지고 감영에 가서 1차 시험을 치른다.
4. 중앙의 관리가 시험 답안지를 서울로 가져오고, 정조가 이를 채점하여 2차 응시자를 선발한다.
5. 선발된 유생은 서울로 와서 정조 앞에서 2차 시험을 치른다.
6. 정조는 최종 합격자를 선발하고 성적에 따라 과거에 급제시키거나 초시를 면제하거나 문방구를 지급한다.
7. 관찰사는 빈흥록을 간행하여 시험에 응시한 지방 유생에게 배포한다.
빈흥과가 진행되는 동안 정조는 문제의 출제부터 답안지를 채점하여 최종 합격자를 선발하기까지 모든 절차를 직접 관리했다. 그런데 정조가 출제한 시험문제를 가지고 지방으로 파견된 관리나 서울에서의 2차 시험을 감독하는 관리들은 모두 규장각에 소속된 관리이거나 초계문신 출신 관리가 담당했다.
이를 보면 초계문신 출신의 관리들은 정조가 추진하는 개혁정치의 의도를 가장 잘 이해하고 이를 현장에서 실천하는 핵심 세력으로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정조대 문화정책의 산실이었던 규장각의 기능을 살펴보았는데, 이는 전통 문화의 계승과 발전, 새로운 정보의 지속적 수집과 보급, 개혁 비전을 가진 인재의 양성, 인재의 활용을 통한 개혁정치의 실현으로 요약할 수가 있다.
정조대의 문예부흥은 최고지도자인 국왕의 치밀한 계획과 이를 지지하는 엘리트들의 협력으로 이뤄졌는데, 2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 혜택이 계속되고 있다. 오늘날 우리들이 바람직한 문화정책을 모색하면서 규장각을 중심으로 전개된 정조대의 문화정책을 검토하는 이유는 당시의 정책이 여러 면에서 후대의 귀감이 되기 때문이다.
※ 참고도서
김문식 외, ?규장각, 그 역사와 문화의 재발견?,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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