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삼국시대로, 역사에 나타난 최초의 사찰은 고구려 소수림왕 5년(375)에 세운 초문사와 아불란사입니다. 그 뒤를 이어 백제와 신라에서도 사찰을 짓기 시작했으나 문헌상에 남아 있는 사찰 중에서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대부분은 전란으로 소실되어 아예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거나, 터만 남아 있거나, 혹은 건물의 일부와 약간의 유물만 남아 있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지요. 실제로 고구려의 초문사와 아불란사는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으며, 신라의 황룡사와 흥륜사, 그리고 백제의 미륵사와 정림사 등은 현재 터만 남아 있는 상황입니다.
천년이 넘는 세월을 견뎌온 고색창연한 사찰들이 유난히 소중하게 느껴지는 요즘, 지식자원관리사업으로 구축된장서각 소장 국학자료(http://yoksa.aks.ac.kr)의 도움을 받아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중수와 보수를 거듭하며 유구한 역사를 이어나가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고찰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은하사(銀河寺)
경남 김해시 신어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은하사는 가락국 수로왕 때 허황옥의 오빠 장유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사찰로, 원래 이름은 ‘서림사’였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탄 이후 재건되었고, 몇 차례의 보수 끝에 ‘은하사'라는 이름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일반인들에게는 영화 <달마야 놀자>의 촬영지로 널리 알려져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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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해 은하사 대웅전 출처 : 장서각 소장 국학자료 ☞ 바로가기 |
허황옥은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로 16살 때 배를 타고 가야에 왔으며, 수로왕과 결혼하여 가야의 왕비가 된 인물입니다. 아유타국이 인도에 있었는지, 그리고 장유화상이 정말로 허황옥과 함께 와서 가야에 불교를 전해주었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하지만,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현재 김해 지방에는 장유화상과 관련된 수많은 전설과 유적지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진입로의 소나무 숲이 일품인 은하사는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신라와 고려의 많은 승려들이 수학한 유서 깊은 사찰입니다. 도 지정 유형문화재 238호인 은하사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맞배지붕의 다포집 양식으로, 대웅전 안 수미단에는 두 마리의 물고기가 마주하고 있는 문양이 새겨져 있어 신비로움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이 물고기를 ‘신어(神魚)'라고 하는데, ‘신어산(神魚山)'이라는 이름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신어 문양은 오직 김해지방에서만 볼 수 있는 탓에 일부 학자들은 이것이야말로 가야가 인도의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 전등사(傳燈寺)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정족산성 내에 자리 잡고 있는 전등사는 서기 381년 진나라에서 건너온 아도 화상에 의해 창건된 사찰입니다. 사찰이 처음 세워졌을 때의 이름은 진종사(眞宗寺)였으나, 1282년(충렬왕 8년) 왕비였던 정화궁주가 송나라에서 구해온 <대장경>과 옥등을 시주한 것을 계기로 ‘전등사'로 바뀌었고 이것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고려 왕실의 각별한 관심을 받은 전등사는 이후 충숙왕ㆍ충혜왕ㆍ충정왕 때에 연이어 중수 되었으나, 조선시대에 일어난 두 차례의 화제로 인해 사찰의 건물들은 완전히 소실되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지경 스님을 중심으로 재건이 시작되어 1621년 2월 전등사는 옛 모습을 되찾았고, 1678년에는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史庫)가 건립되면서 왕조실록을 지키는 사찰로 왕실의 보호 아래에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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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등사 전경 출처 : 장서각 소장 국학자료 ☞ 바로가기 |
조선 말기로 접어들면서 전등사는 그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국가를 지키는 요충지 구실을 하기도 했습니다. 1866년에는 개항을 요구하던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점령하는 일이 발생했는데, 이때 양헌수 장군이 휘하의 병력을 이끌고 초지진을 건너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무찔렀습니다. 조선군을 얕잡아보던 프랑스 함대는 이 전투가 끝난 뒤 전의를 상실하여 조선에서 물러갔고, 조정에서는 전투의 승전을 기리기 위해 전등사 동문 입구에 양헌수 장군 승전비를 세웠습니다.
현재 전등사 경내에는 대웅전, 약사전, 범종 등 보물급 유적을 비롯한 무수한 문화유적이 있습니다. 보물 제178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웅전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사원건축물로서 석가여래삼존과 1880년에 그린 후불탱화, 1544년 정수사에서 개판한 <법화경> 목판 104매가 보관되어 있습니다. 보물 제179호인 약사전은 대웅전과 거의 같은 양식으로 만들어졌는데, 석조로 조성한 약사여래상을 비롯하여 현황탱화와 후불탱화가 보관되어 있어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보물 제393호로 지정되어 있는 전등사 범종은 1097년 중국 하남성 숭명사에서 조성된 탓에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종과는 그 형태가 판이하게 다릅니다.
>> 불갑사(佛甲寺)
전라남도 영광군에 위치한 불갑사는 백제에 불교를 처음 전해준 인도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384년(침류왕 1년)에 창건했다고 알려져 있는 유서 깊은 곳입니다. 삼국시대에 활약했던 승려들의 열전을 모은 《해동고승전》에 의하면, 마라난타는 신통력을 가진 자로서 그의 수행 정도는 가히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인도 간다라에서 중국 동진으로 들어와 사람들에게 불교의 가르침을 전해주던 그는 이후 다시 백제로 들어와 불교를 전해주었는데, 당시 백제왕이 교외까지 나가 마라난타 대사를 맞아들였다는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그가 공식적인 문화교류 사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후반에 중창된 불갑사는 고려시대 각진국사(覺眞國師)가 머무르면서 크게 번창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시대 초까지 장엄하고 화려한 사찰이었던 불갑사는 정유재란으로 인해 소실되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1598년 법릉선사가 중창한 이후, 해릉ㆍ채은ㆍ청봉선사 등이 중수하였으나 사찰의 규모는 줄어들었습니다. 조선 후기 대대적인 중창이 이루어진 이래로 여러 차례의 중수가 이루어졌고,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의 중수ㆍ보수 작업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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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갑사 사천왕상 출처 : 장서각 소장 국학자료 ☞ 바로가기 |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 팔상전, 칠성각, 일광당, 명부전, 만세루, 천왕문 등이 있으며 이밖에 각진국사비와 사천왕상, 각진국사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참식나무 등이 있습니다. 보물 380호로 지정된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 다포계 건물로 문에 연꽃, 국화꽃, 보리수나무 무늬를 섬세하게 새겨놓아 매우 화려해 보인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1644년에 중건된 만세루는 정면5칸, 측면4칸의 중층형 문루건물로서 가구에 기교를 부리지 않은 웅건한 미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국내에서 제일 큰 목조 거상인 사천왕상은 원래 고창 연기사에 모셔져 있던 것으로서 연기사가 폐사된 후 1870년 설두대사에 의해 불갑사로 옮겨져 조선중기에 조성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 화엄사(華嚴寺)
전라남도 구례군 지리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화엄사는 544년 인도 승려 연기(緣起)가 창건한 사찰로, 화엄사라는 이름은 ‘화엄경(華嚴經)’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처음 세웠을 땐 해회당과 대웅상적광전만 있었으나, 642년(선덕여왕 11)에 자장율사가 건물을 중수했고, 670년(문무왕 10)에는 의상대사가 중수했습니다. 이후 몇 차례 더 중수된 화엄사는 임진왜란 때 전소되는 비극을 겪었으나, 1630년(인조 8)에 벽암대사가 재건을 시작하여 7년 만에 몇몇 건물을 건립, 폐허된 화엄사를 다시 일으켰습니다. 그 후 1701년(숙종 27)에는 선교양종(禪敎兩宗)의 대가람(大伽藍)이 되었고, 근세에 이르러 도광대종사의 전면적인 중수에 힘입어 지금의 화엄사로 중흥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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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엄사 전경 출처 : 한국정책방송원 ☞ 바로가기 |
대부분의 사찰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가람을 배치하지만, 화엄사의 경우 대웅전과 누문을 잇는 중심축과 각황전과 석등을 연결하는 동서축이 서로 직각을 이루고 있으며 대웅전 앞에는 동ㆍ서5층 석탑이 비대칭으로 서 있는 독특한 형식을 하고 있습니다. 화엄종의 중심사찰로 많은 고승들이 머물면서 화엄사상을 펼쳐나간 이곳에는 현재 17세기 이후의 건물들만 남아 있습니다.
대표적인 문화재로는 국보 제12호인 석등, 국보 제35호인 사사자삼층석탑, 국보 제67호인 각황전이 있으며, 보물 제132호인 동오층석탑, 보물 제133호인 서오층석탑, 보물 제300호인 원통전전 사자탑, 보물 제299호인 대웅전, 보물 제1040호인 화엄사 화엄석경이 있습니다. 그리고 부속 암자로는 구층암, 금정암, 지장암이 있습니다.
>> 분황사(芬皇寺)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에 위치한 사찰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634년(선덕여왕 3) 정월에 창건되었다고 합니다. 신라의 고승 자장과 원효가 머물렀던 곳으로, 특히 원효는 이곳에서 머물면서 《화엄경소》와 《금광명경소》 등 많은 저술을 남겼습니다. 원효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설총은 원효의 뼈를 부수어 상을 만들어 이곳에 봉안했는데, 이 고상은 고려시대까지 분황사에 남아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한편 분황사에는 신라의 화가였던 솔거(率居)가 그린 <관음보살도>가 있었고, 755년(경덕왕 14)에는 구리 30만 6,700근을 들여 약사여래상을 만들어 안치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이곳에 있던 천수대비 벽화는 영험이 있어서 경덕왕 때 눈 먼 아이가 그 앞에서 기도를 했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는 설화가 신라 향가 <도천수대비가>를 통해 전해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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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황사 석탑 출처 : 장서각 소장 국학자료 ☞ 바로가기 |
먼저 지어진 황룡사 바로 옆에 지어진 분황사는 본래 규모가 큰 사찰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고려 말 몽골 제국의 침략과 조선 시대의 임진왜란을 거치며 대부분 사라지고 지금은 작고 아담한 사찰이 되었습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모전석탑을 비롯하여 화쟁국사비 비석대, 석정, 석조, 초석, 석등, 당간지주 등입니다. 국보 제30호로 지정되어 있는 모전석탑은 현존하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원래는 9층이었다고 하나 현재는 3층만 남아 있습니다.
>> 부석사(浮石寺)
경북 영주시 부석면 봉황산 중턱에 있는 부석사는 676년 의상대사가 신라 문무왕의 뜻을 받들어 창건한 사찰입니다. 우리나라 화엄종의 본찰로, 의상과 당나라 여인 선묘의 애틋한 사랑의 설화가 남겨져 있는 곳이기도 하지요.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 의상은 잠시 동안 어떤 상인의 집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상인에게는 선묘라는 이름의 어여쁜 딸이 있었는데, 그녀는 이국의 승려인 의상에게 완전히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남몰래 의상을 흠모하던 그녀는 용기를 내어 자신의 마음을 전했지만, 의상은 끝내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의상은 당나라 수도 장안 근처에 있는 종남산에 찾아가 지엄대사의 문하에서 10년 동안 불법을 배웠습니다. 그 사이 선묘는 의상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며 그에게 줄 법의를 손수 만들어 놓았습니다.
모든 공부를 마친 의상이 신라로 돌아가려 한다는 소식을 들은 선묘는 서둘러 항구로 나갔으나, 의상을 태운 배는 이미 떠난 뒤였습니다. 발을 동동 구르던 선묘는 자신이 만든 법의가 무사히 전달되기를 빌면서 배를 향해 던졌고, 놀랍게도 법의는 의상의 품안으로 떨어졌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선묘는 의상의 귀국을 돕게 해달라고 빌며 바다로 뛰어들었고, 용이 되어 의상의 귀국길을 수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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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석사 전경 출처 : 장서각 소장 국학자료 ☞ 바로가기 |
무사히 신라로 돌아온 의상은 왕명을 받아 봉황산 중턱에 사찰을 지으려 했으나 그곳에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터전을 잡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들은 의상을 위협하며 내쫓으려 했고, 그는 마음속으로 부처님에게 어려움을 호소했습니다. 그러자 선묘의 용이 나타나 커다란 바위로 변하더니 공중으로 붕 떠올라 사람들을 내리칠 듯 위협했습니다. 혼비백산한 무리들은 모두 도망가 버렸고, 그제야 바위는 산중턱에 내려앉았습니다. 이 바위를 ‘부석'이라 불렀으며, 선묘의 도움으로 지어진 이 사찰의 이름은 ‘부석사'가 되었습니다.
많은 고승들을 배출한 부석사에는 무량수전앞석등(국보 제17호), 소조불좌상(국보 제45호), 조사당벽화(국보 제46호), 3층 석탑(보물 제249호), 당간지주(보물 제255호), 고려판각(보물 제735호), 원융국사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7호) 등 많은 중요문화재가 남아 있으며, 무량수전(국보 제18호)과 조사당(국보 제19호)을 비롯한 여러 건물들이 남아 있습니다. 특히 석룡, 대석단, 선묘정, 녹유전, 선비화 등은 창건설화와 관련이 있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 참고사이트
1. 불갑사 (http://www.bulgapsa.org)
2. 부석사 (http://www.pusoksa.org)
3. 전등사 (http://www.jeondeungsa.org)
4. 화엄사 (http://www.hwaeomsa.or)
5. 네이버 & 다음 백과사전
6. 문화재청
- 국가지식포털 객원기자 주유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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