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e이야기

[스크랩] 사천왕상 지물과 명칭에 대하여

깜보입니다 2011. 11. 14. 10:38

四天王像 持物과 名稱에 대하여

 

이미 앞선 본인 글에서 사천왕상의 명칭이 조선시대 들어와 변화된 문제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다. 고려시대까지는 북방다문천이 탑을 들고 있고 다른 천왕들의 지물은 일관성이 없어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는데 조선시대 들어서 북방다문천의 지물이 변화되었다. 이런 문제에 대해 본인은 노명신이 주장했던 조각계열과 불화계열로 나누어 보아야 한다고 했다.

 

노명신은 <朝鮮後期 四天王像에 대한 考察/미술사학연구202호>이란 논문에서 조선조에 들어와 지물이 과거와는 다른 모습으로 변화된다고 주장하면서 이런 변화는 <약사유리광왕칠불본원공덕경염송의궤공양법/藥師琉璃光王七佛本願功德經念誦儀軌供養法>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동방 지국천은 비파를, 서방 광목천은 용을, 남방 증장천은 검을, 그리고 북 다문천은 당과 탑을 가지는 것으로 표현하는데 이것은 주로 조각계열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불화계열에서는 다라니경을 참고하여 동방 지국천이 칼을, 서방 광목천이 당과 탑을, 남방 증장천이 용과 보주를, 북방 다문천이 비파를 들고 있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변화에는 조선시대 들어와 라마교의 영향을 받아 소의 경전이 변화되었기 때문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천왕상의 명칭에 대하여

http://blog.naver.com/seongho0805/150019435011

 

그러나 이런 문제는 2004년 1월에 조사된 복장유물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복장을 봉하는데 쓰였던 봉함목에서 각 사천왕의 방위를 밝혀주는 묵서명이 발견되면서 사천왕상의 방위에 대해 혼란이 발생하였다. 이런 문제에 대하여 연구한 논문이 <순천 송광사 사천왕상 발굴자료의 종합적 연구/2006/이하 송광사>로 발간되었는데 그 책에 의하면 순천 송광사 사천왕의 지물은 다음과 같다.

 

북 다문천 : 비파/동 지국천 : 칼/남 증장천 : 용과 여의주/서 광목천 : 당과 망구스

 

조선시대 지물에 변화에 대해서 앞서 말한 노명신 외에도 문명대, 이종문 등 여러 사람이 지적한바 있다. 그러나 결정적인 증거가 발견되지 않아 대부분 라마교의 영향으로 변화되었지만 북 다문천의 지물이 탑이라는 것은 조각에서는 변화가 없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북 다문천의 지물을 기준으로 다른 지물을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송광사 사적기에서 조차 북 다문천이 탑을 들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송광사 135쪽)

 

그러나 이제 임영애의 송광사 사천왕상에 대한 연구결과로 문화재청 뿐만 아니라 많은 절에서 이제 사천왕상의 존명을 순천 송광사의 기준으로 적고 있다는 점에서 이 문제를 정확히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문제에 대해서 순천 송광사 사천왕상에 대한 논문이 나오기 전 가장 심도 있게 다룬 자료는 이대암이 쓴 <四天王/2005>이라는 책이다. 이대암 역시 지물이 바뀌게 된 것이 라마교의 영향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원나라 마지막 황제 순제順帝의 명에 따라 지어진 완성된 쥐융관(居庸關)의 사천왕이 지물이 달라졌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초기 경전에 나타난 지물을 보면 북방다문천을 제외하면 일정한 원칙이 없었다. 그러므로 고려시대까지 일부 활을 가진 사천왕상에 대한 논란 외에는 북방 다문천이 보탑 또는 탑을 들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론異論이 없었다.

 

초기경전에 나타난 사천왕지물(출처 : 사천왕 220쪽)

經典

漢譯

年代

동방지국천

남증장천

서방광목천

북다문천

오른손

왼손

오른손

왼손

오른손

왼손

오른손

왼손

다라니집경

茶羅尼集經

653-54

새끼

불탑

불공견색다라니자재왕주경

不空絹索多羅尼自在王呪經

693

활과 화살

일자불정륜왕경

一字佛頂輪王經

705

-

-

금강저

금강저

불공견색신변진언경

不空絹索神變眞言輕

707-9

금강저

금강지구결金剛智口決

보현연명법普賢延命法

723-36

-

-

칼 또는 새끼

삼지창

보탑

반야수호십육선신왕형체

般若守護十六善神王形體

723-36

-

-

-

금강봉

보탑

법화만다라위의형색법경

法華萬茶羅威儀形色法經

746-74

보주

-

-

보탑

제설부동기

諸說不同記

?

-

-

삼지창

-

보탑

동보기

東宝記

?

삼지창

방망이

새끼

삼지창

보탑

별존잡기

別尊雜記

?

-

-

삼지창

-

* 원문에는 무기를 특징별로 한자로 刀와 劍과 등과 같이 구분하고 있으나 생략하였음

* 약사유리광왕칠불본원공덕염송의궤공양법藥師琉璃光王七佛本願功德念誦儀軌供養法에 의하면 동 지국천은 비파, 증장천은 보검, 광목천은 용과 여의주 또는 견색, 다문천은 보탑을 들고 있다고 한다.(조선후기 후불목각탱 연구/47쪽, 조선후기 사천왕상에 대한 고찰/112쪽)

 

이런 것이 원나라가 라마교를 국교로 하면서 라마교에서 지물을 동방지국천이 비파, 남증장천이 칼, 서방광목천이 보탑과 뱀, 북방다문천이 당과 망구스로 변화되었고, 다시 앞서 언급한 원나라 쥐륭관부터 북방다문천의 지물은 그대로 놓고 서방광목천의 지물을 탑 대신 여의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이후 명나라에 들어오면서 원나라의 색깔을 없애기 위해 북방다문천의 망구스가 탑으로 변화되고 서방광목천의 모습은 용과 여의주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이런 변화를 이대암은 원나라에 의해 들어온 이방 종교인 라마교가 중국토착불교와 절충하는 과정으로 보고 있다. 어쨌든 명나라에 들어서 우리가 알고있는 북 다문천 불탑, 동 지국천 비파, 서 광목천 용과 여의주, 남 증장천 칼로 정착되어 사천왕상의 지물이 바뀐 것이라 한다.

 

이대암은 쥐륭관에서 변화가 시작되어 다문천이 불탑을 가진 것을 명대 라마계로 분류하고 다문천이 불탑대신 망구스를 가지고 있는 것을 원대 라마계로 분류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대부분의 절에서 명대 라마계의 사천왕이 만들어졌는데 수타사, 순천 송광사, 흥국사, 용문사는 원대 라마계를 따르고 있다고 한다. 어쨌든 지물이 변한 것은 분명 라마교의 영향 때문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순천 송광사 사천왕상에 표기된 방위가 맞다면 왜 갑자기 이렇게 방위가 변화된 것일까.

 

임영애는 조선 전기 사경인 묘법연화경판화(1448년)과 광평대군부인 신씨 발원문(1459년)에서도 송광사 사천왕상과 같은 배치와 지물로 표현되어 있다고 한다.(송광사 141쪽) 그리고 불화에서 송광사의 지물과 같이 표현된 경우는 많이 발견되고 있다. 여러 논문에서 이 문제 때문에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이대암도 북방다문천이 비파를 들고 있는 것을 예외적인 사례라고 하며 무시하고 있다.

 

반대로 송광사 사천왕상을 연구한 임영애는 "경전 중에 북방천왕이 불탑을 든다는 언급은 다라니집경 뿐"이라고 하면서 "동방천왕이 비파를 든다는 기록은 藥師琉璃光王七佛本願功德念誦儀軌供養法에 나오는데 이때도 동방과 남방천왕을 제외하고는 조선 후기 사천왕상의 지물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고 "동방=비파, 북방=불탑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하며 생각했던 것처럼 조선후기 사천와의 지물이라는 것이 반드시 지켜야할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송광사 139쪽)

 

임영애는 이 부분에서 앞서 언급된 다른 경전의 예를 무시하고 있으며 이대암이 언급한 중국의 명대 라마계의 다른 예는 언급하지 않는 문제가 있다. 이대암도 그렇고 임영애도 그렇고 우선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며 중요한 근거들에 대한 고찰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임영애는 명나라 비로사 존명의 예를 들면서 명나라에서 방위개념이 변화되었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둘 다 논리적으로 명확한 해석이 부족한 느낌은 분명하다.

 

임영애와 이대암의 해석 차이는 사천왕상 배치에 대한 차이라고 생각한다. 임영애는 송광사 사천왕상에서 발견된 묵서명과 조선시대에 들어와 불화의 존명이 바뀐 것을 근거로 방위의 개념이 변화된 것으로 보고 있고 이대암은 원말 변화된 것을 그대로 우리가 받아들인 것이라고 보고 불화에서 지물이 바뀐 것을 예외적인 사항으로 치부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분명한 이유를 밝히는 것에는 소홀히 하거나 아직 자료부족으로 해석이 불명확한 것도 사실이다.

 

두 사람 견해 차이는 존상배치에서 방위개념의 차이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아래 그림은 이영애와 이대암이 보는 사천왕상의 배치이다.

 

대웅전

대웅전

당, 탑

비파

당, 탑

비파

입구

입구

이대암의 방위개념

임영애의 방위개념

 

사대천왕의 배치의 개념에서 방위순환은 둘 다 모두 시계방향을 따라 이루어진다. 이런 순환에 대해서 임영애는 우요삼잡右遶三匝과 관계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송광사 137쪽) 어쨌든 이대암의 방위개념에서 90도만 틀면 임영애의 방위개념으로 변화된다. 이것이 방위개념과 지물에 있어 혼란이 오는 이유이다.

 

나는 문제를 살피기 전 우선 사천왕상의 권속과 지물과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동 지국천왕의 권속은 건달파와 바사카, 남 증장천의 권속은 구반다와 사리다, 서 광목천은 용과 부다나, 북방다문천은 야차와 나찰(명칭은 대원사 신장상 기준)이다.

 

* 이대암은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의 8부신중과 사천왕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 한다.(사천왕 208쪽) 김정희도 불타 8부중과 사천왕8부중 두 가지로 나누고 있다.(신장상 47쪽)

 

이 권속과 지물을 보면 어느 정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예를 들어 건달파는 노래하는 신이므로 비파가 어울리고 서 광목천의 권속은 용이므로 용이 어울리며, 북 다문천은 부처님의 도량을 지키면서 부처님 설법을 많이 듣는다고 해서 다문多聞이라 했으며, 북 다문천만이 부처님의 자비력을 계승하여 진언을 설하는 자격을 얻었다고 한다.(사천왕 207쪽) 따라서 불법을 의미하는 탑을 지닌다는 것이 어울리는 면이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지물은 사천왕의 기본성격과 맞는다고 할 수 있다.

 

이대암도 비파가 지국천왕의 지물이 된 것은 "당나라 경전 어느 곳에서도 없지만 지국천와의 권속이 건달파가 음악의 신인 것이란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천왕의 캐릭터를 보다 강하게 부각시켜주면서 도상적으로도 이전의 지물인 칼이나 창을 쥐었을 때보다 다른 천왕과 뚜렷이 구별"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사천왕 227쪽)

 

어쨌든 기본적으로 이전 우리가 알고 있던 지물과 사천왕의 성격은 일치한다. 그러므로 이대암이 주장하는 바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1776년에 그려진 천은사 아미타후불탱화와 1800년대 초반에 만들어진 대승사 목각후불탱에서도 송광사의 예와 같은 존상명칭이 있는 이상 무조건 무시할 수는 없다. 지금 상황으로 보아서는 최소한 조선 후기에는 존상의 변화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박도화의 조선 전반기 불경판화의 연구에 근거한다면 조선 초기부터 변화가 있었다고 할 것이다.)

 

지금 문화재청이나 각 절에서는 최근 송광사 연구에 근거하여 존명을 쓰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조선시대 사천왕상의 존명은 순천 송광사 존명을 기준으로 봐야 할 것 같다. 그러나 관련 글을 보면서 왜 이렇게 변화되었는가 하는 점이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경전에 근거하지 않은 지물의 변화는 쉽게 수긍할 수 없는 매우 중대한 문제이다. 그럼에도 그에 대한 근거를 명확히 밝히고 있지 못하다. 이대암의 주장처럼 단순한 실수에 의한 예외인지 아니면 어떠한 이유인지는 앞으로 더 밝혀져야 할 부분이다.

 

추신 :

 

사천왕문이 언제 생겼는가에 대해서 이대암은 별전으로 모시던 사천왕이 천왕문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은 송나라 仁宗(1023-64)때라고 한다. 인종은 제위 초에 각 절의 입구마다 천왕전을 세우라는 명을 내렸다고 한다. 이것이 천왕문에 시작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것은 한참 뒤로 보고 있다.

 

이대암은 1337년에 세워졌다는 통도사 천왕문의 기록에 의문을 보이고 있다. 우선 현재 천왕문이 18세기에 세워졌다는 것도 있지만 조선시대 최초로 지어진 보림사 천왕상이 1539년이고 대부분의 사천왕상이 17세기 이후에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또한 현재 남아있는 사천왕상이 대부분 임진란 때 활약한 부휴선사나 그의 제자인 벽암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이 임진란 이후 불력으로 국난을 극복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화재청 사이트에 의하면 보림사의 천왕상이 1515년에 조성된 것이라 한다. 따라서 사천왕문의 시작은 통도사의 기록대로 고려 후기부터라고 보아도 크게 틀지는 않을 것 같다. 우리가 산지사찰이 많이 생기면서 산지 사찰의 특징인 여러 산문의 과정이 언제 완성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한 근거가 없는 것 같다.

 

고려도경의 안화사의 기록을 보면 산중사찰로 기록되어 있다. 계곡을 한참 들어가 있는 절은 山門閣지나 몇 리를 가면 안화문이 나오고 그 다음에 안화사로 들어간다고 되어있다. 이 사실로 지금의 일주문이 있고 한참 들어가서 절로 들어가게 되어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일주문(산문각)-사천왕문-불이문으로 이루어지는 진입은 통도사기록으로 보아 고려시대 후기부터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 같다.

 

참고문헌

사천왕/사진 관조/글 이대암/한길아트

신장상/김정희/대원사

송광사 사천왕상 발굴자료의 종합적 연구/강순애 등/아세아 문화사

토함산 석굴 불상/문명대 외/(사)한국미술사연구소

朝鮮後期 四天王像에 대한 考察/노명신/미술사학연구 202/

완주 송광사/미술사학연구/1999

조선후기 후불목각탱 연구/이종문/미술사학연구 209

新羅四天王像의 硏究/문명대/불교미술 5/1980

출처 : 사단법인 한국의 재발견
글쓴이 : 최성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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