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억울한 하소연을 담은 발괄〔白活〕
소지류에 해당하는 옛 문서 가운데 ‘발괄’이 있다. 발괄이란 억울한 사정을 글이나 말로 관아에 하소연한다는 뜻의 이두吏讀 1) 표현이다. 현재도 ‘비대발괄’이라 하여 ‘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면서 간절히 청하여 빌다’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고, ‘개 소 발괄 누가 알아주나犬牛白活 有誰存察’라고 하여 ‘조리 없이 지껄이는 말’이라는 뜻으로도 쓰이니 억울한 사정을 알리는 것이 간절하고 급하여 조리 없이 떠드는 말과 같음을 나타낸 것이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 『유서필지儒胥必知』2) 에 발괄은 일반 백성이 좋은 산소를 찾기 위해 벌이는 다툼(산송/山訟), 빚을 갚지 못하여 벌어지는 다툼(채송/債訟), 사람을 꾀어 끌어가 벌어지는 다툼(인물초인/人物招引), 사람을 때려 생긴 다툼(구타/毆打), 국가에 대한 의무였던 군역에 관련된 다툼(탈군역/탈軍疫) 등과 같은 일로 관에 청원을 올릴 경우에 사용되었다고 하였다. 어느 정축년의 해. 정월에 조생원댁의 노비 복쇠는 여주목사에게 청원하였다. 흉년이 크게 들어 모두가 재난을 당하였을 때에 우리 상전上典도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다른 이들은 세금을 면하고 혜택을 입었으나 우리 상전이 제외되었는데 잘 살펴 혜택주기를 바란다는 하소연이다. 이에 대해 여주목사는 흘림체의 글씨로 ‘분배하여 나누어주라俵給向事’라고 처분하고 관인을 찍었다. 주인인 조생원을 대신하여 관에 호소한 사정을 사또〔使道〕께서 알아준 것이다. 이같이 소지의 한 부분에 문서를 받은 수령이 직접 살펴본 뒤에 내리는 판결문을 뎨김〔題音〕 또는 제사題辭라고 하였다. 거주했던 지역의 수령에게 받은 처분이 뎨김이라면, 보다 높은 관직인 관찰사에게 받은 처분은 제사라고 불렸다. 이렇게 처분이 적힌 소지는 다시 청원자에게 돌려주고 증거 자료로서 보관하도록 한 것이다.
손가락과 손바닥으로 자신을 증명하다 소지에 등장하는 노비들은 모두가 주인을 대신하고 있다. 이름도 다양했으니 돌쇠, 복돌, 복남, 귀복, 만복, 임술 등 한 번쯤은 들어본 호칭이다.
배비안댁의 묘를 관리하는 노비 복동이 주인을 대신하여 청원하였다. 상전의 묘가 읍내 추동에 있는데 지동면에 거주하는 윤생원이라는 이가 자신의 부친 묘를 상전의 선산 가까이 함부로 조성하였으니 이를 바로 잡아달라는 것이다. 이 소지에는 눈 여겨 볼 것이 하나 있다. 종이 위에 써내려간 유려한 필체가 아니라 소지라는 제목 밑에 그려진 우물정자 모양의 그림〔井〕이다. 그 안에는 좌촌左寸이라 적혀 있다. 이는 글을 쓰지 못하는 복동이 자신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왼손가락을 종이 위에 대고 그 크기를 그린 것이다. 이렇듯 옛 문서에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손 그림을 그려낸 것이 많으니, 손가락을 그린 것을 수촌手寸이라 하였고, 손바닥을 그린 것을 수장手掌이라 하였다.
사대부士大夫가 직접 올린 소지, 단자單子와 상서上書
사대부가 친히 관사官司에 올리는 청원서는 단자 또는 상서라고 불렸다. 문서를 쓰는 방식은 발괄과는 조금 다른 형식으로 내용은 산송 또는 충忠과 효열孝烈 등의 뛰어난 행실을 기리기 위하여 정려旌閭를 베풀어 달라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현대에는 조상의 묘를 만들고 모시는 일과 군신君臣•부자父子•부부夫婦의 삼강三綱에 근본을 둔 행실을 기리는 행위가 많이 잊혀져 있으나 유교사상을 근본으로 했던 조선사회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문제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노비가 대신하여 호소하던 소지와는 다르게 사대부들이 직접 나서서 청원하였던 것이다.
한편 내용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은 경우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을 함께 써 올리기도 하였는데 이를 등장等狀이라고 하였다. 나아가 자신이 사는 고을의 수령에게 소장을 올렸으나 해결되지 못한 경우에 각 도의 관찰사가 정무를 보던 감영監營에 다시 청원서를 올렸으니 이를 의송議送이라 하였다.
어느 임술년의 정월에 전 현령을 지냈던 홍순원洪舜元 등 여러 사대부들이 경기도 관찰사에게 글을 올렸다. 당시 남양부 서면에 자리한 선산에 이규장李奎章이라는 이가 멋대로 자신의 부친의 묘를 조성하였으니 이를 처리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처음 남양부사에게 제출되었던 상서는 거부되고 말았다. 이에 남양홍씨 문중의 28명이 참여하여 이 의송을 작성한 것이다. 관찰사는 제사를 통하여 다른 집안의 분산墳山 가까이에 멋대로 투장偸葬 3)하는 것이 놀랍다고 하며 범인을 잡아다 공의에 따라 처벌하고, 남양부사가 이를 해결하지 않았다고 하니 관官을 옮겨서 사건을 처리하라고 판결내리고 있다. 조선시대의 엄정하고자 했던 법집행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암행어사의 마패인馬牌印
소지류의 옛문서에서는 또 하나의 특별한 사실을 찾을 수 있다. 바로 조선시대에 왕의 특명으로 지방군현에 비밀리에 파견되었던 암행어사暗行御史의 판결이 보인다는 사실이다. 암행어사는 수령의 훌륭한 정치와 탐학한 정치를 판단하고〔得失을 따지다〕, 백성의 고통이나 어려움을 살피는데〔疾苦를 살피다〕 목적을 두어 자연스럽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해결하고자 했던 소지류의 문서에 많이 나타나는 것이다.
암행어사는 관가에 행차하여 공문서를 검열하고, 창고를 조사하였다. 만일 불법적인 사실이 발견되면 수령의 관인과 병부兵符를 압수하고 창고에 ‘봉고封庫’ 두 자를 쓴 백지에 마패를 날인해 창고 문을 봉하는 것이다. 또한 감옥에 수감된 죄수를 점검하고, 억울한 사연을 담은 소지를 접수하고 판결 처분하여 억울함을 풀어주기도 하였다.
이때 어사가 접수하고 처분한 문서에 마패 도장이 찍히는 것이다. 곧 암행어사라는 직함과 그 수결手決 4)이 들어있는 문서는 많은 수난을 거쳐 그 억울함이 해소되었음을 보여주는 문서인 것이다.
우리 주변에 남겨진 고문서는 인간 사회의 여러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 가운데 소지류는 특히 갈등과 바람願의 현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더욱 생생한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표면적인 사실을 읽어내는 노력 못지않게 주변의 자료를 보완하여 분쟁 당사자들의 속마음과 어느 쪽이 옳았는가를 읽어내려는 모습도 중요하다. 그러한 태도가 인간사 다툼의 시작과 끝을 전하는 소지류 고문서를 대하는 옳은 태도일 것이다.
주석:
1) 이두란 신라 때부터 한자(漢字)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적던 표기법이다. 한문을 국어 어순에 따라 배열하고 이에 토를 붙인 것으로 고려와 조선 시대의 문서들에 그 흔적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2) 관청과 민간에서 널리 사용되었던 이서체문장(吏胥體文章) 곧 이두(吏讀)로 쓰여진 공문서식(公文書式)을 정리한 책.
3) 남의 산이나 묏자리에 몰래 자기 집안의 묘를 쓰는 일.
4) 관직에 있는 사람이나 양반들이 사용하였던 자신만의 표시로 직함 아래에 자필로 썼다. 현대의 사인(sign)과 비슷하다.
글•사진•정제규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사진•여주향토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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