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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왕릉에서의 임시건물에 대한 자료

깜보입니다 2012. 6. 2. 21:51

왕릉에서의 임시건물에 대한 자료

 

왕릉에 대한 자료를 찾아 공부하는 중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장례절차와 탈상까지 3년에 걸친 기간에 사용하는 건물이 지금과 같은 왕릉에 있는 정자각이나 재실 말고도 임시건물로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영악전靈幄殿, 가정자각假丁字閣, 假齋室이다. 이외에도 나인가가內人假家가 있었다.

 

이런 임시 건물이 있었던 것은 당연한 것이라 생각한다. 장례라는 것이 일시적인 행사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에 따른 가건물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건물들에 대해서 알려지지 않은 것은 임시 건물이기 때문에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 건물은 모두 임시 건물로서 영악전과 가재실은 초석을 설치하지 않고 땅에 기둥을 박는 굴립주 형태로 지어지고 지붕도 기와를 사용하지 않고 초가로 지어진 건물이다.

 

우선 영악전은 왕이 모셔진 관인 재궁梓宮을 임시로 모셔두기 위한 곳이다. 영악전은 재궁이 이동하는 동안 멈출 때 모시기 위한 곳으로서 노제소路祭所, 주정소晝停所, 능소陵所에 만들어지는데 노제소와 주정소는 국장도감에서 준비하고 능소는 산릉도감에서 준비한다고 한다. 효종이 돌아가신 후 숭릉을 조성할 때부터 사라졌다. 이것이 사라진 것은 숙종의 전교로 없어진 것이라 한다.(조선시대 능제에서의 영악전의 기능과 건축형태/신지혜)

 

* 조선왕조실록에 있는 영악전에 대한 하교내용

산릉에 영악전을 짓지 말도록 명하다/숙종 즉위년(1674) 9월 17일

명하여, 산릉(山陵)에 영악전(靈幄殿)을 짓지 말고, 잠시 재궁(梓宮)을 정자각(丁字閣)에 봉안(奉安)하게 하였으니, 역사(役事)가 커서 백성을 수고롭게 하기 때문이었다.

 

영악전은 극히 짧은 기간만 존재하는 건물이기 때문에 매우 단순하게 지어졌을 것이다. 여주 영릉英陵 재실에서 기획전으로 하고 있는 ‘조선시대 왕의 탄생과 죽음’ 이라는 전람회에서 순종의 장례식 사진을 보면 능에 초가로 지붕과 벽을 감싼 가건물이 있는데 이것이 능상각으로 추정된다. 이 재료와 지붕 엮은 모습이 영악전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을까 한다. 이 사진에는 동그란 건물에 앞으로 건물일부가 정자각처럼 돌출한 모습인데, 신지혜는 영악전의 형태를 정자각과는 대칭되는 형태 즉 뒤쪽으로 재궁이 설치공간이 돌출되는 형태로 추정하고 있다.(조선시대 능제에서의 영악전의 기능과 건축형태/신지혜)

 

다음은 가정자각이다. 가정자각은 그야말로 가설시설물이다. 원래 왕이나 왕비의 관이 하관하고 나면 삼년상 동안 정자각에서 모든 제례가 행해진다. 그러나 합장묘合葬墓이거나 한 능역에 두 분을 모신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ex: 세조광릉) 또는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ex: 여주 효종寧陵)의 경우 정자각은 하나 밖에 만들지 않는다. 이 경우 먼저 모신 분과 나중 모신 분과의 제례문제가 발생한다. 국조오례의에서 사망한 후 3년 상까지는 흉례凶禮로, 일반적인 제사는 길례吉禮로 분류하고 있다.

 

따라서 합장의 경우는 먼저 돌아가신 분에게는 길례로 모시고 나중 돌아가신 분에게는 흉례로 모셔야 하기 때문에 성격상 같은 정자각을 쓴다는 것이 맞지 않아 나중 모신 분을 위한 흉례를 위해 임시 정자각을 짓는데 이것이 가정자각이다. 가정자각은 단기간을 쓰고 해체하는 영악전과는 달리 25개월 이상을 사용하여야 하는 만큼 정자각과 비슷한 수순을 만들고 있다.(정자각과 가정자각의 조성원칙에 관한 연구/홍석주)

 

다음 가재실은 가정자각과는 다른 원칙에서 세워지고 있었다. 가재실 역시 흉례를 위한 건물이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기본적으로 능을 조성할 때 같이 세워진다. 흉례기간 동안 조석으로 제를 올리는데 이때 장만하는 음식이 길례 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고 준비하는 사람이 많아 3년상 기간 동안 저례를 준비하는 사람과 음식을 준비하는 공간으로 지어지는 것이다. 준비하는 사람과 물목이 많기 때문에 재실의 거의 두 배 이상의 규모로 지어지고 또한 나인들도 있기 때문에 별도로 나인을 위한 가건물도 같이 지어진다는 것이 특징이다. 나인 건물까지 고려하면 지금 재실의 3배 정도 되는 규모가 된다.

 

이 건물은 임시건물이므로 가구를 짜지 않고 초가로 지어진다고 한다. 가재실이 건물규모가 매우 크므로 경제적 어려움이 많아 숙종 때 만들어진 현종왕릉 조성시부터 가재실 기능 일부를 3년간 비워두는 정재실을 활용하는 것으로 하여 원래 90여 칸 규모였던 것을 40여칸 만 가재실로 짓도록 하였다고 한다.(조선시대 산릉의 가재실과 정재실의 운영/정정남)

 

또한 정자각의 형태에 대해서는 고려시대 유습이라고 한다. 고려시대 왕릉의 유구를 살펴보면 정자각형태의 건물이 왕릉 앞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강岡 아래 있는 것은 아니고 왕릉과 거의 붙어있는 형식이었다고 한다.(조선조 산릉 정자각 연원 소고/김동욱) 언급한 김동욱의 논문을 보면 정자각은 기본적으로 제례를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건물로 앞으로 돌출한 부분은 제사를 위해 기능적으로 필요해 돌출되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풍수를 연구하는 장영훈같은 분은 정향丁向에 위치하고 있어 정자각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개념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요사이 사람들이 과거 제도에 관심이 없다보니 오해하는 부분들이 있다. 예를 들어 3년상이라고 하면 지금으로 말하는 3년 즉 36개월 동안 시묘살이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예전의 3년은 3년째가 되는 해를 의미한다. 즉 25개월째에 탈상을 하였다는 의미이다. 탈상을 하는 것도 죽은 사람과의 관계에 따라 시마緦麻(3달), 소공小功(5달), 대공大功(9달) 기년朞年(1년) 삼년三年(만 2년)로 달라진다.

 

다음백과사전의 용어설명

시마緦麻 : 종증조(從曾祖), 삼종 형제(三從兄弟), 중증손(衆曾孫), 중현손(衆玄孫) 등의 초상이 났을 때 석 달 동안 입는다.

소공小功 : 증조부모, 재종형제(6촌), 종질, 종손 등의 상사(喪事)에 다섯 달 동안 입는다.

대공大功 : 대공친(大功親) 즉 종형제(4촌), 출가 전의 종자매, 출가한 고모나 자매, 중자부, 중손, 중손녀, 질부 등과 같은 혈연관계가 있는 사람들의 상사에 입으며, 복상 기간은 아홉 달이다.

기년朞年 : 상을 치르는 기간이 1년인 상례(喪禮)에 입는 상복. 조부모의 상례에 입는다.

출처 : 사단법인 한국의 재발견
글쓴이 : 최성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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