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라는 속담이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겸손하라.’라는 의미로, 선조들의 삶의 지혜를 보여준다. 벽립만인壁立萬이라는 사자 성어가 있다. 만 길 높이의 절벽이 온갖 풍상風霜에도 변함없이 우뚝 서 있는 의연한 모습을 비유할 때 사용한다. 이 속담과 사자성어는 삶에서 겸손과 의연함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특히 유학을 숭상한 선비들은 겸손과 의연한 삶을 이상으로 여기며 실천하였다. 겸손과 의연함 속에는 험난한 역사와 현실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타자를 배려하고, 어떠한 상황에도 흔들림 없이 살아 온 선조들의 절의節義와 삶의 좌표가담겨 있다. 겸손은 남을 존중하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다. 의연함은 자신을 견결하게 지켜나가는 삶의 자세와 실천이다. 겸손과 의연함은 얼핏 관련이 적은 듯하지만, 실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무엇보다 이 둘을 인생의 덕목으로 설정하여 실천한 선비 정신에서 우리가 계승할 정신 자산을 확인할 수 있다.
선비士의 내면 수양과 정신적 덕목의 추구
유학은 선인들의 삶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 유학의 일부 덕목은 지금도 우리의 삶에서 현재진행형으로 작동한다. 유학의 이념을 삶의 목표로 삼았던 존재는 선비士다. 선비는 유학의 이념을 정치적으로 구현하고 일상생활에서 그 덕목을 실천한 사람들이다. 이들이 삶에서 무엇보다 중시한 것은 겸손과 의연함이다. 유학 경전인 『서경書經』은 선비들이 이상적 제왕으로 여긴 요堯 임금의 덕德을 열거하면서 “진실로 공손하고 능히 겸양했다.”라 하여 제왕의 덕목으로 겸손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주역周易』에서는 “천도天道는 가득한 것을 덜어내고 겸손한 것을 더해 주며, 지도地道는 가득한 것을 변하여 겸손한 데로 보내주고, 귀신鬼神은 가득한 것에 화를 주고 겸손한 것에 복을 주며, 인도人道는 가득한 것을 미워하고 겸손한 것을 좋아한다. 겸손이란 높고 빛나며 나직해도 넘어질 수 없는 것이니, 군자의 도道이다.”라 하여 겸손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겸손을 실천하면 이로움을 받을 뿐만 아니라, 천지와 사람은 물론 귀신의 도움까지도 받을 수 있는 후원의 원천임을 함께 일러주고 있다.
공자 역시 『논어論語』에서 겸손과 의연함이 중요한 덕목임을 강조하였다. “군자는 크거나 작거나 많거나 적거나 간에 감히 거만하게 행동하지 않는다.”라 한 언급과 “군자는 의리를 기본으로 하여 예의 있게 행동하고 겸손한 태도를 취한다.”라 제시한 경구는 겸손을 강조한 메시지다. 또한 공자는 “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라는 삶의 방향을 제시하여 어떤 상황에도 굴하지 않는 의연함을 강조한 바 있다. 전근대 사회는 위정자로부터 선비에 이르기까지 정치와 일상생활에서 유학 경전에서 제시한 겸손과 의연함을 중요한 덕목으로 인식하고 이를 적극 실천하였다. 그런데 선비들이 추구한 겸손은 단순히 외양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랜 수양을 통해 내면으로부터 저절로 밖으로 우러나왔다. 이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견결하게 지키려는 의연함과도 통한다. 의연함이 있는 자는 항상 겸손하고, 겸손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비굴하지 않고 그 의연함을 지켜나가는 힘을 지닐 수 있다. 그래서 선비들은 겸손을 통해 내면을 닦고 그것을 밖으로 발현하여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의연함을 삶에서 드러내었던 것이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겸손과 의연함의 삶을 추구한 것도 이러한 의미에서다.
온순하고 겸손하며 자신을 낮추고 온화하게 처신하여 몸을 낮추고도 오히려 덜 낮추지나 않았는가 두려워하고 모든 지식을 드러내지 않고 속에 간직하고도 오히려 얕게 간직하지나 않았는가 두려워하는 것이 아마도 우리 유가儒家의 양용養勇하는 요법인 듯한데,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만계에게 주다答蔓溪>
다산은 일상생활에서는 물론 공부에서도 항상 스스로 부족한 것이 없는 지를 되돌아보고, 혹시라도 겸손하지 못한 경우를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을 삶의 덕목으로 내세웠다. 어떠한 경우에도 자신을 낮추는 자세는 유학을 신봉하는 자들이 추구해야 할 양용법養勇法임을 강조한 것이다. 다산이 제기한 양용법은 겸손함을 실천하는 것이 곧 용기를 기르는 방법이라는 것인데, 이때의 용기는 의연함을 내포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삶의 좌표와 선비 정신의 이상, 겸손과 의연함의 실천
· 흔히 죽은 자의 행적을 기록한 것을 묘도문자墓道文字라고 한다. 일생을 기록한 행장行狀이나 묘 앞의 비석에 새긴 비명碑銘, 그리고 글을 적어 묘 앞에 묻은 묘지명墓誌銘 따위를 모두 이른다. 우리는 묘도문자를 통해 죽은 자의 삶과 그 행적을 알 수 있다. 그 후손과 제자들은 죽은 자의 삶을 기리기 위해 이름난 문장가나 존경받는 학자들에게 청탁하여 묘도문자를 지었다. 묘도문자를 통해 죽은 자의 삶과 행적이 더욱 드러나고 빛이 났다. 그런데 이 묘도문자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바로 겸손과 의연함이다. 국왕은 물론 사대부와 일반 민에 이르기까지 체득하고 견결하게 지켜야 할 숭고한 덕목이자 실천적 가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학을 숭상한 시대에는 기려야 할 인물의 경우, 겸손과 의연함으로 그 인물의 삶을 되돌아보는 경우가 많았다. 숱한 인물의 행장과 묘비명墓碑銘을 보면 그 인물의 삶을 고평高評하는 수식어로 ‘겸손하고 공손하였다.’, ‘겸손하고 온화하였다.’, ‘겸손하고 후덕하였다.’, ‘겸손하고 신중하였다.’, ‘겸손하고 삼가는 태도를 지녔다.’ 등으로 표현하거나, 또한 ‘스스로 겸손하여 예절을 굽혀서 선비를 대하였다.’, ‘벼슬이 더욱 높아도 마음은 더욱 겸손하였다.’, ‘귀하면서도 겸손으로써 몸을 가지고, 부富하면서도 검소함으로써 스스로를 받들었다.’라 주목하여 그 인물의 삶과 행적을 드높였다.
그리고 선비들이 삶의 좌표로 삼은 또 하나의 기준은 의연함이다. 묘도문자에 ‘너그럽고 속이 깊어 의연하게 큰 도량이 있었다.’라든가 ‘큰 화가 조만간 닥칠 줄을 알면서도 의연하게 대처하여 의기소침한 적이 없었다.’거나 ‘변란을 만나거나 위태로움을 당해 죽음이 눈앞에 있는데도 의연하게 대처하면서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라 표현한 것은 죽은 자의 남다른 삶을 특기한 것이다. 어떤 상황에도 흔들림 없이 삶의 주체를 지키려한 그 인물의 의연함을 주목한 것임은 물론이다. 이는 곧 인간이 추구할 중요한 덕목으로 의연함을 생각하였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일찍이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19)의 행장에서 “성장하여 글을 읽고 학문을 닦을 줄 알면서부터는 의연하게 큰 뜻을 두었지만, 오로지 과거 보는 글에 뜻을 두지 않고, 성현의 위풍威風을 사모하여 넓게 배우고 힘써 행하여서 이룩함이 있기를 기약하였다.”라 하여 그 삶을 기린 바 있다. 이 역시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이상과 생각을 견결하게 지켜간 그 의연함을 주목한 것이다. 겸손과 의연함을 실천한 것을 기리는 것은 묘도문자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조선왕조실록』의 졸기卒記에도 잘 드러나 있다. 졸기는 공직생활을 한 사대부가 세상을 떠나면, 그 날짜에 고인의 생애를 뒤돌아보고 그 삶을 평하는 것을 말한다. 국가의 공식 기록인 실록에서도 인물의 삶을 평하면서 겸손과 의연함을 중시하고 있다. 실록을 기록한 사관史官이 인물을 기릴 때, ‘항상 겸손하고 세상을 두려워하여 조금도 함부로 행동하지 아니하였다.’라는 식으로 언급하고 있거니와, 이 표현은 죽은 자의 삶과 그 행적을 극찬한 것임은 물론이다. 겸손과 의연함은 선비들의 일상생활에서는 물론 정치의 공간에서도 그대로 구현된다. 일찍이 고려의 인종仁宗은 조서詔書를 내려 “제왕의 덕은 겸손謙遜을 우선으로 한다.”라 하여 국왕의 겸손을 강조하는가 하면, 조선의 성종成宗도 “하루아침에 발탁하여 등용하면 교만한 마음이 반드시 생기는 것이니, 모름지기 겸손한 자를 골라 임용하라.”고 하여, 정치 공간에서 인재 등용의 기준으로 겸손을 강조하였다. 특히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역관 신분의 제자 이상적李尙迪에게 <세한도歲寒圖>를 그려 준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이끗에 따라 관계가 쉽사리 변하는 세태 속에서도 사제 간의 의리를 초지일관 지켜 온 제자의 겸손함과 의연함에 감사를 표한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 선조들은 지난 역사 속에서 겸손과 의연함을 삶의 좌표로 삼고, 실천하는 것을 이상으로 여겼다. 이처럼 선조들이 삶의 좌표로 여긴 이러한 실천 덕목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다시 불러내어 숨을 불어 넣고 계승하여야 할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정신자산이 아니겠는가?
글·사진·진재교 성균관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
사진·문화재청, 국립민속박물관, 연합콘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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