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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집현전에서 기본과 창의를 찾다

깜보입니다 2012. 4. 20. 10:56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학문 연구기관이자, 세종 시대 학문과 문화 사업의 전성기를 이끈 곳 집현전集賢殿에서는 조선의 두뇌들이 모여 시대정신을 설정하고 연구와 편찬 활동을 수행해 나갔다. 집현전이라는 명칭은 고려 인종 때 처음 사용되었고 조선 정종 때도 집현전이 있었으나 얼마 뒤 보문각寶文閣으로 개칭되었다가 이마저도 유명무실한 기구가 되었다. 세종은 즉위와 함께 자주, 민본, 실용을 시대정신으로 인식하고, 집현전을 이러한 정신을 구현할 수 있는 기관으로 자리를 잡게 했다. 세종은 집현전을 완전한 국가 기관으로 승격시켜 학문의 중심기구로 삼는 한편, ‘재행연소자才行年少者’라 하여 재주와 행실이 뛰어난 최고의 젊은 인재들을 모았다. 신숙주, 성삼문, 정인지, 최항 등 세종 시대를 대표하는 학자들이 속속 집현전에 모여들었다.


 

시대 정신을 구현하는 곳, 집현전
집현전은 1420년(세종 2)에 설치되어 세조 2년까지 약 37년간 존속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짧은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집현전이 우리의 뇌리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것은 세종대의 대표적인 학문, 문화 활동이 이곳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집현전은 기본을 수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창의적인 활동을 한 대표적인 공간이었다. 집현전에는 세종대에서 단종대까지 총 96명의 학자가 거쳐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 문과 합격자의 명단을 기록한 『국조방목國朝榜目』의 기록을 보면 집현전 학자 전원이 문과 급제자 출신임이 나타난다. 그것도 수석인 장원 급제자가 정인지를 비롯한 16명, 2등이 6명, 3등이 신숙주 등 11명, 4등이 7명 등으로 전체 집현전 학자 중 절반에 가까운 46명이 5등 안에 합격한 그야말로 국가의 최고인재들이 발탁되었던 것이다. 이들 우수한 인재들에게 세종이 부여한 임무는 독서와 학문연구,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정책 결정과 국가 주요 간행물의 편찬 사업이었다. 세종대를 대표하는 업적인 훈민정음의 창제와 이에 관련된 편찬사업인 『용비어천가주해』, 『사서언해』의 편찬과 같은 성과도 집현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집현전이 위치했던 곳은 현재의 경복궁 수정전 자리로 국왕이 조회와 정사를 보는 근정전이나 사정전과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이는 그만큼 세종이 집현전에 대한 관심이 컸음을 의미한다. 세종 스스로도 학문이 뛰어난 군주였지만 홀로 정책을 결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세종은 누구보다 ‘소통’을 중시했고, 집현전에서 배출된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충분히 반영하여 정책을 수행했다.

집현전에서 완성된 기본과 창의의 성과물
집현전에서는 주로 고제古制에 대한 해석과 함께 정치 현안이 되는 정책 과제들을 연구하였고 중국의 서적들을 참조했지만 당시의 현실에 맞는 사례들을 수집하고 정리해 나갔다. 주택에 관한 옛 제도를 조사한다거나 중국 사신이 왔을 때의 접대 방안, 염전법에 관한 연구, 외교문서의 작성, 조선의 약초 조사 등 다양한 연구와 편찬 활동이 집현전을 중심으로 전개되면서 집현전은 15세기 민족문화를 정립하는 중심 기관이 되었다. 한편 집현전에 소속된 학자들은 왕을 교육하는 경연관, 왕세자를 교육하는 서연관, 과거시험의 시관試官,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史官의 임무도 동시에 부여받았다. 그만큼 이들을 국가의 기둥으로 키운 것이다.


 

집현전에서는 각종의 편찬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역사서, 유교경서, 의례, 병서, 법률, 천문학 관련 서적이 그것들로써 국가에 필요한 서적 편찬의 과제가 집현전에 부여되면 집현전 학자들은 과거의 법제와 학문 연구를 통해 이를 완수해 국왕인 세종에게 올렸다. 이러한 편찬사업은 세종 당대에 완성된 것도 많았지만 『고려사』와 같이 전대의 역사를 정리한 편찬사업은 세종대에 시작하여 문종대에 완성되었다. 그만큼 긴 안목을 가지고 과제를 부여하고 이를 완성했던 것이다. 집현전은 세종의 각별한 배려 속에서 수백 종의 연구 보고서와 50여 종의 책을 편찬하였다. 『향약집성방』, 『삼강행실도』, 『자치통감』, 『국조오례의』, 『역대병요』와 같이 의학, 역사, 의례, 국방 등 전 분야에 걸쳐 많은 책들을 편찬하여 세종시대 문화의 꽃을 활짝 피우게 하였다. 집현전의 설치는 무엇보다 세종이 혼자만의 힘으로 국가의 정책 결정을 하지 않고 다수 인재들에게 학문 연구를 지원하고 그 성과를 국가의 정책으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리고 집현전에서 배출된 쟁쟁한 인적 자원은 15세기 찬란한 민족문화를 완성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집현전이라는 국가 인재의 보고寶庫를 최대한 활용하면서 ‘함께하는 정치’의 모범을 보였다는 점에서도 세종은 위대한 국왕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집현전 학자들에 대한 배려
세종은 수시로 집현전을 방문하여 학자들을 격려하였다. 어느 겨울 밤 집현전에 여전히 불이 꺼지지 않은 것을 본 세종이 이곳에서 깜빡 잠이 든 신숙주에게 자신이 입고 있던 담비 가죽 옷을 덮어준 일화는 아직까지 전해지고 있는 미담이다. 이외에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에게 당시에는 최고의 특산물이었던 귤을 하사하여 이들 학자의 사기를 높여 주었다. 제주도에서 왕에게 진상하는 귤은 오늘날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가치를 지닌 귀한 음식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집현전의 학자들을 오랜 기간 이곳에 근무하게 하였기 때문에 승진이 늦어졌다. 세종대에는 일단 집현전 학사에 임명되면 다른 관직으로 전직됨이 없이 그 안에서 차례로 승진하여 직제학(直提學:종3품)이나 부제학(副提學:정3품)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관직 체계는 기본을 충실히 하고 장기적인 연구 환경을 조성하는 데에는 효과적이었지만, 집현전 학사들에게 승진이라는 동기부여에는 미흡했다. 따라서 학자들 사이에는 불만이 쌓였고 다른 부서로 옮기려는 학자들도 나타났다. 정창손은 22년, 최만리가 18년, 박팽년이 15년, 신숙주가 10년을 근무하는 등 집현전에 근무하는 연한은 다른 어떤 부서보다도 길었다. 이러한 상황을 파악한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을 제도적으로 배려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을 위해 사가독서賜暇讀書, 즉 왕이 하사하는 유급 휴가제도를 실시하였다. 심신이 지친 학자들에게 재충전의 기회를 준 것으로, 오늘날 대학교나 기업체, 공공기관에서 실시하고 있는 연구년(또는 안식년) 제도와 비슷하다. 사가독서는 세종 8년인 1426년 12월에 집현전 학사 권채, 신석견, 남수문 등을 집에 보내 3개월간 독서를 하면서 재충전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준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처럼 처음에는 집으로 보내 쉬게 했다가 이후에는 학문하기 좋은 조용한 절(진관사)에 보냈다가, 성종대에 이르면 아예 독서당(호당湖堂이라고도 칭함)을 만들어 사가독서 제도를 정착시켰다. 처음에 독서당은 용산에 있어 남호南湖라 하였다가 중종대인 1507년 현재의 서울 금호동 산자락으로 옮긴 후에는 동호東湖라 하였다. 지금 서울 성동구의 독서당길이나 한강의 다리 중 동호대교는 조선시대에 동호 독서당이 있었던 역사의 현장을 말해주고 있다. 이이가 왕도정치의 구현을 위한 철인哲人 정치사상과 당대의 현실 문제를 문답식으로 정리하여 국왕 선조에게 바친 『동호문답東湖問答』이라는 책은 바로 이곳 동호 독서당에서 쓴 저술이었다.


 

집현전의 의미
세종대 학문과 문화에 대한 투자의 산물로 탄생한 집현전. 집현전은 옛날 제도의 연구를 바탕으로 현안이 되는 정책을 해결하는 곳이었다. 또한 집현전 학사들은 경연관, 서연관, 사관의 기능을 겸하면서 왕실의 교육 담당, 외교 문서의 작성, 명나라 사신의 접대 등 정치의 일선에서 실무적 능력을 발휘하였다. 세종 시대를 대표하는 시대정신인 자주, 민본, 실용 정신은 집현전 학사들의 업무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중국의 사례를 검토하면서도 이를 조선에 맞게 적응하는 방안들을 연구했고, 편찬된 책들은 모두 민본과 실용의 관점이 적용되었다. 세종의 후원과 배려 속에 집현전은 기본을 탄탄히 하고 이를 바탕으로 창의적인 활동을 수행하는 대표적인 공간이 되었던 것이다. 집현전은 비록 37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만 존속했지만, 기본과 창의, 그리고 학문을 중시하는 그 정신은 그대로 계승되었다. 성종대의 홍문관이나 정조대의 규장각이 탄생한 것에는 집현전 설치와 그 기능이 가져 온 영향력이 적지가 않다.


 

글•신병주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사진•문화재청, 두피디아 포토박스

출처 : 사단법인 한국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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