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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근대 신식 학교의 상징, 붉은 벽돌로 지어진 학교

깜보입니다 2012. 8. 16. 10:31

근대 교육의 도입


 

성균관, 향교, 서원, 서당 등의 전통적인 학교와 구별되는 새로운 근대 교육기관인 학교가 설립되기 시작한 것은 1880년대부터이다. 정부에 의해 동문학, 육영공원이 설립되었고, 외국인 기독교 선교사에 의해 배재학당, 이화학당 등의 학교가 세워졌다. 민간에서도 원산학사를 설립하여 운영하거나 서당을 개량하여 시대의 변화를 예비하고 대응하는 새로운 교육을 실시하고자 하였다. 1890년대에는 정부가 갑오 교육개혁을 단행하여 소학교, 중학교, 사범학교, 외국어학교, 실업학교 등을 전국 각지에 세웠고, 민간에서도 부국강병, 애국계몽, 교육구국의 열망으로 학교 설립과 운영에 적극적이었다.


 

근대학교-붉은 벽돌로 지어진 2층 학교의 교사


 

무엇을 ‘근대’, ‘근대학교’로 볼 것인가는 논쟁이 많고, 최초의 근대학교에 대해서도 전문가들 사이에 논의가 분분하다. 그러나 일반인들에게 개화기에 도입된 신식 근대학교에 대한 하나의 공통된 이미지는 ‘붉은 벽돌 2층 학교 교사’이다. 새로이 설립되는 근대학교가 모두 르네상스식, 서양식 2층 붉은 벽돌 건물로 지어진 것은 아니다. 그런데 중학교 3학년 국사교과서에 실려 있는 사진처럼 대표적인 근대 신식학교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의 학교 건물은 붉은 벽돌로 된 2층 교사이고, 당시 주변 건물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외관을 선보였다. 이는 이후 근대 신식 학교의 상징처럼 수용되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2층 높이의 학교 건물은 일제시대 후반기까지 교사와 강당의 주요한 외관이었다. 사적으로 지정된 대전 삼성초등학교 교사 외에도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부산진일신여학교 교사, 강경 중앙초등학교 강당 등이 대표적이다. 학교 건물에 대해 건축사적 접근과 평가도 가능하겠지만 무엇보다 개화기와 일제시대 학교 설립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교사건축을 위해 지역 주민과 유지 나아가 권번券番의 기생들도 기부와 모금에 적극 참여하였다는 점은 꼭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근대교육문화-학교 종, 운동회, 졸업식, 교복, 교지, 졸업앨범


 

확연히 구분되는 교사의 외양 이외에 설립 과정 및 교육 운영에서도 근대 신식학교는 여러 가지 독특한 모습을 드러냈다. 배재학당의 경우는 1885년 6월 우여곡절 끝에 조선 정부로부터 의료와 교육사업을 허락받고 일본을 경유하여 입국한 아펜젤러가 영어교습으로 시작한 학교이다. 이 학교에 고종은 1887년 2월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교명의 현판을 내렸는데, 아펜젤러는 국왕으로부터의 교명 하사가 외국인 선교사가 운영하는 학교에 대한 당시 조선인들의 거부감과 두려움을 완화해 줄 것으로 기대하며 기뻐하였다. 배재학당은 서구의 과학과 문학 교육과정에 대한 철저한 훈련을 제공하고자 한문, 영어, 천문, 지리, 생리, 수학, 수공, 성경, 체조, 창가 등의 교과를 개설하고, 『사민필지』와 같은 교과서를 가르쳤다. 이외에도 졸업식 거행, 현미경과 같은 실험실습 기자재 구비, 학생 토론회 개최, 축구·야구·테니스 등의 체육 경기와 운동회를 개최하였다. 이것들은 근대시기 새로운 학교 문화로 자리 잡았으며, 학생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근대 학교 및 교육에 대한 경험을 제공하였다.


 

1890년 만들어진 배재학당 규칙에는 “학교에 나올 때나 수업을 할 때나 쉴 때는 반드시 종을 울린다”라는 내용이 있다. 당시 전통교육 기관에서는 주로 쇠 종이 아닌 북을 울려 수업의 시작과 끝을 알렸다. “학교 종이 땡땡땡”으로 시작되는 노래의 배경에는 쇠 종을 울려 시간에 맞추어 학교 일과를 진행했던 근대 교육 문화의 추억이 서려있는 것이다.


 

배재학당에서는 1894년 4월부터 체조시간에 교련을 실시하였다. 학생들은 상투를 한 채 모자를 쓰고 전통 복장을 그대로 입고, 아펜젤러 교장이 직접 만든 목총을 들고, 구령을 붙여가며 거리행진을 하였다. 이것은 당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구경거리였는데, 이를 통해 사람들은 근대 문화를 체험하고 근대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해나갔다. 배재학당 졸업식은 정부 관리를 비롯한 내외빈이 참석한 가운데 교육의 성과를 뽐내는 장이었다. 1897년 7월의 배재학당 졸업식에는 한문과 영어의 공개 강독이 시행되었는데, 여기서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조선의 독립을 역설하는 영어 연설로 청중들을 사로잡았다. 학생 자치 활동을 통해 단련된 대중 연설의 솜씨를 자랑했던 것이다. 당시 연설회 및 대중 강연회 개최는 학생들의 자치적인 사회 참여 활동의 큰 흐름이었다.


 

교복 착용에 대한 기록을 보면, 성재 이동휘가 강화도에 1905년 설립 운영한 육영학교 학생들이 서울 나들이를 하면서 교복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 육영학교 학생들은 두루마기 위에 비단 허리띠를 두르고, 허리띠 위에 오얏 꽃 표식을 달아 육영학교 학생임을 드러내었다. 이후 각 학교마다 특색 있는 교복과 교표가 제정되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입은 교복과 교표를 보고 무슨 학교에 다니는지 알아보았고, 또 교복 입은 학생이라는 이유로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으며 때론 상당한 사회적 특권을 누리기도 했다. 학교 운동회 역시 학교를 둘러싼 근대교육문화의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당시 운동회는 학생뿐 아니라 학부모 및 지역민들에게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몇 개의 학교가 연합하여 운동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는데 달리기, 이어달리기, 공 던지기, 깃발 뺏기 등 육상 종목의 경기와 행진, 연합체조 등 제식 훈련이 함께 진행되었다. 당시 학생들의 풍악대를 앞세운 운동회 날의 시내 행진, 제복과 모자를 갖추어 쓰고 절도 있게 체조하거나 군사 훈련하는 모습은 사람들에게 근대 학교의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사진이 보급되면서 단체 졸업 사진 한 장이 학창시절을 기념하는 소도구로 등장하였고, 1910년대 후반부터 졸업 앨범이 제작되기 시작했다. 앨범에는 안경 쓴 학생들이 가끔씩 보이기도 했다. 졸업식장에서는 급기야 시계, 도시락 그릇 같은 근대적 생활용품들이 상품으로 등장하였다.


 


다양한 근대교육문화유산을 매개로 학교 문화에 대한 상상력을 길러야


 

학교라는 근대적 공간에서 이루어진 다양한 문화들을 오늘날과 연결시켜 체험해 볼 매개물들이 적지 않다. 기억의 담보물로써 역사를 읽어내고 재구성, 재해석하는 매개물을 문화재화한다면 근대교육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야 할 문화재는 다양하다. 국왕이 내린 학교 현판, 학생들이 수업에서 사용했던 교과서, 피아노, 실험 기자재 등의 기구, 학교 종, 교복과 교표, 앨범과 교지 등의 유형의 것들을 비롯하여 운동회, 연설회, 풍악대 거리행진 등의 무형의 것들도 있다. 우리가 물려받은 자산으로, 오늘날 학교와 교육문화, 나아가 근대문화 이해의 기초자료로 널리 활용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현재 학교 건물 위주의 교육문화재 접근에서 벗어나 학교 교육 문화에 대한 폭넓은 관점에서 근대 유산들을 조사하고 등록하고 보존하는 일이 시급하다.


 

근대교육문화유산을 통해 깨끗하게 차려입은 교복을 입고 학교 종이 울리는 붉은 2층 벽돌집 교사로 힘차게 걸어 들어가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어린시절을 풍성하게 만나는 기회가 되었으면, 그 시절의 추억이 뭉개뭉개 피어올라 행복한 미소를 짓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글·강명숙 배재대학교 교직부 교수, 한국근현대교육사 전공 사진·문화재청

출처 : 사단법인 한국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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