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두서 자화상과 실다리 안경
윤두서 자화상
얼마 전 윤두서 자화상에서 눈 주위의 동그란 흔적이 실다리안경 때문이라고 하는 글을 보고 과연 그럴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자료로 보여준 김득신이 그린 밀희투전密戱鬪牋 등 몇몇 그림을 보면서 안경이 그런 깊은 흔적을 남길 수 있는가에 다시 생각해보았다. 나도 안경을 오래 써왔지만 콧잔등에 흔적 생각보다 깊지 않다. 그리고 내가 의문이 갔던 것은 오래 전에 들은 이야기 때문이다.(실다리 안경은 아래 링크 기사 참조)
우리나라 최초의 안경은 ‘이것’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60705&CMPT_CD=P0001
어렸을 때 서양인들이 쓰던 동그란 외눈이 안경을 보면서 신기하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어느 분이 우리나라 사람은 눈 주변 구조가 달라서 그런 안경을 사람은 못쓴다고 하였다. 그 이유가 서양 사람에 비해 우리 얼굴이 평면적이란 것이다. 서양사람 눈은 움푹하게 들어가서 눈앞에 동그란 렌즈를 끼울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 말을 듣고 서양인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그렇다는 것을 알았다.
밀희투전
실다리안경이 지금 안경보다는 무거웠을 것이다. 지금 안경은 대부분 플라스틱으로 만들기 때문에 안경이 가볍다. 그러나 내가 처음 안경을 쓰기 시작할 때만 해도 렌즈를 유리로 만들어 지금 보다는 훨씬 무거웠다. 옛날에는 경주 남석이라는 자수정으로 만든 것도 있었으니 돌을 얹어 놓은 것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그런 안경알에다 실로 귀에 거는 구조이니 실다리안경은 구조상 안정적으로 고정되기 힘든 구조이다. 따라서 오래 착용할 때는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고정한 한 것으로 보인다. 아래 링크된 사이트의 설명에 의하면 추를 달아 안경이 내려가지 않게 하는 것도 있고, 안경테를 부드러운 재료로 만들어 코에 걸리게 하는 것도 있고, 밀희투전에서 보듯이 망건 끈에 거는 방식 등 다양한 방법으로 고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다리 안경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oks0210&logNo=10033257010
다른 여러 자료를 찾아보아도 안경이 광대뼈 위쪽에 걸리게 하거나 앞서 언급한 외눈이 안경처럼 안경을 양 눈에 걸쳐 사용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안경이 광대뼈 위에 걸치지 않았다는 것은 눈 주위에 흔적이 남기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안경이 고정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처럼 귀에 거는 안경이 나오기 전까지는 장기간 착용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기 또 하나 살펴보아야 할 것은 윤두서의 생애이다. 윤두서(1668-1715)는 47살에 돌아가셨다. 사람에 따라 40대 초반에 노안이 오기는 하지만 대부분 사십대 중반 이후에 오고, 조금 늦은 사람이 오십대 초반에 오기도 한다. 나도 50대에 들어서 노안을 느꼈다. 윤두서에게 노안이 왔다고는 해도 그리 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안경을 착용한 시간도 그리 길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설사 윤두서 안경이 광대뼈 쪽에 오려 놓는 방식이었다고 해도 착용기간이 그리 길이지 않아 눈 아래 안경자국이 남을 정도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한국초상화에 대한 책을 살펴보면 눈 주위에 동그란 흔적을 표현하는 것은 17세기 이후부터 많이 나타난다. 이 시기가 안경을 본격적으로 사용한 시기와도 일치하기 때문에 이런 추측은 가능한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안경의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초상화에서 사실성의 문제와 깊은 연관이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 초상화에서 전신사조傳神寫照라는 개념이 언제부터 구체화되었는지는 조금 더 찾아봐야겠지만 우리 초상화에서 정치함이 살아나기 시작한 것은 윤두서 이후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특히 입체감이 살아나는 것은 윤두서 이후라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18세기 이전의 초상화는 선으로 얼굴을 묘사했고 입체감이 부족했다. 그런 것을 윤두서 자화상에서 입체감을 살려내었다는 것이다. 이태호는 <옛 화가는 우리의 얼굴을 어떻게 그렸나>라는 책에서 윤두서는 자화상을 그릴 때 “얼굴의 굴곡과 주름을 따라 음영을 준 곳에 입체감이 살아나도록 가채加彩”를 했는데 “이것은 초상화의 평면적인 표현방식에서 새로운 변화를 예고하는 기법”이라고 했다. 또한 “초상화 형식에서 조선후기의 변화를 선도한 것”이라고 했다.(181쪽)
내가 찾아본 초상화도 분명 윤두서 자화상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윤두서 이전의 초상화는 평면적이라고 한다면 윤두서 이후의 초상화는 입체감이 살아나고 있으며 선적인 표현 보다는 면적인 표현이 더 우세하다. 이런 점은 분명 18세기 때 그린 초상화라도 그 이전의 것을 모사한 초상화를 보면 더욱 명확하게 나타난다.
한 예로 정조 때 다시 그린 송시열(1607-1689)의 초상화를 보면 이런 전제로 보면 선線으로 얼굴의 주름 등과 같은 것을 세밀하게 표현하였지만 윤두서 초상화처럼 입체적이지는 않다. 이것은 송시열 생전에 그린 것을 모사했을 것이므로 어느 정도 원본의 기법을 전제로 하였기 때문이다.
이태호는 같은 책에서 윤선도 자화상은 서양화 입체화법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이야기하고 있다. 얼굴이 입체적인 서양얼굴에서는 측면에서 빛을 비춰 음영의 대비를 강조하는 반면 윤두서자화상은 전면에서 빛을 비춰 골격과 주름을 따라 음영을 표현하는 정도였다고 이야기하고 있다.(상기서 99쪽) 즉 서양화법의 영향을 받아 얼굴이 입체화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윤두서가 그린 심득경의 초상화와 비교해도 한층 더 발전된 모습을 보인다. 심득경의 초상화는 실제로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심득경이 죽고 그린 것이라 사실성이 떨어진다는 것을 전제하고 보아도 기법에서 이전의 선적 표현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윤두서의 초상화는 입체감이 살아 있어 훨씬 발전된 기법을 보인다. 따라서 윤두서의 초상화는 심득경의 초상화를 그린 이후(1710년) 그린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쨌든 윤두서 초상화 이후의 초상화는 입체감도 살아 있고 인물의 성격을 표현하는 것에도 사실에 가깝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사실성의 표현, 인물의 정신을 표현하는 전신사조의 개념도 윤두서초상화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이태호는 사실적 표현이 가능했던 것을 서양에서 초상화를 그리는 기법인 카메라 옵스쿠라를 사용했을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이제 다시 본 주제로 돌아가 그렇다면 눈 주위의 서클은 왜 생겼는가 하는 점이다. 나이가 들면 사람들 눈 주위에 지방이 끼면서 눈 아래 반달모양의 지방층이 생긴다. 윤두서 초상화에서 나타난 것도 바로 지방층에 대한 표현이다. 이런 모습은 바로 내 눈 주위에도 있다. 나이가 들면 눈 주위에 지방층이 생겨 윤두서초상화에서 나타난 모습으로 변한다. 이런 것은 모든 사람이 비슷하다. 이런 모습을 표현한 것이 서양초상화에도 있다.(상기서 99쪽 사진참조)
조선 후기 초상화 중에는 이런 써클이 그려지지 않은 것도 있다. 그것은 나이가 들어서도 눈 주위에 지방층이 쌓이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이하응의 초상화도 눈에 동그란 서클이 그려 있다. 후기에 그린 것이라 너무 도식화 되었다는 느낌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때만 해도 지금과 같은 형식의 안경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눈 주위 서클이 안경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며 윤두서 초상화에서 나타난 눈 주위의 원형흔적은 실다리안경 때문이 아니라 나이가 들어가는 흔적일 뿐이다.
추 기
박은순은 윤두서 초상화 아래가 신체부분이 사라진 것은 20세기 중엽 그림의 때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사라진 것이라고 한다.(공재 윤두서/20쪽) 조선미는 오랜 세월 탓에 유탄柳炭 흔적이 사라진 것이라 하고 있다.(한국의 초상화/230쪽) 그러나 이태호는 직접 감정하였다고 하면서 종이 뒷면에서 먹 선묘로 전체 윤곽을 잡은 다음 앞면에서 얼굴을 그린 배선법으로서 얼굴을 그린 후 다른 부분의 구성상 합당치 않다고 여겨 그리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옛 화가들은.../183쪽)
참고문헌
옛 화가들은 우리 얼굴을 어떻게 그렸나/이태호/생각의 나무
공재 윤두서(조선 후기 선비 그림의 선구자)/박은순/돌베개
한국의 초상화/문화재청/눌와
초상화의 비밀/국립중앙박물관
한국의 초상화(形과 影의 예술)/조선미/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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