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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익산 김안균가옥, 조해영가옥

깜보입니다 2013. 2. 18. 15:44

김안균가옥배치도(자료출처 : 한국의 건축문화재 8)

조해영가옥배치도(자료출처 : 한국의 건축문화재 8)

 

김안균가옥(金晏均家屋/도 민속문화재 제23호/전북 익산시 함라면 함열리 457)

조해영가옥(趙海英家屋/도 문화재자료 제121호/전북 익산시 함라면 함열리 473)

 

사진은 본문 맨 아래 있음

 

두 집을 같이 소개하는 것은 같은 마을에 있는 두 집이 일제 강점기 초기에 지어진 집으로 시대의 상황을 읽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같은 마을에서 시차를 따라 지어짐으로서 서로 비교하여 살펴볼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지어진 시기는 때 조해영 가옥은 1918년 김안균 가옥은 1922년에 지어진 것이다. 두 집은 어느 집이 더 크다 할 수 없을 정도로 대저택이다.

 

이 집을 지어진 시기에 이 집안에 대한 정보가 없지만 당시 엄청난 부자였던 것만 분명한 것 같다. 해방이후에도 농업 비중이 70%를 상회할 정도로 높았으므로 이 집을 지을 당시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따라서 토지를 얼마나 가지고 있었는가가 부의 척도였을 것이며 이런 집을 지었다는 것이 당시 이 두 집은 엄청난 토지를 소유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집은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집으로서 시대적 특징이 잘 나타나 있는 집이다. 전체적으로 전통한옥의 구조를 하고 있지만 일본문화 또는 일본을 통해 들어온 문화영향이 많이 나타난 집이다. 조선이 개방한 19세기 말에서 일제강점기까지 지어진 집이 꽤 많이 남아있다. 그런 집들은 공법, 재료 평면구성에서 이전의 집과는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 때 지어진 집은 매우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기존한옥의 형태를 그대로 답습한 건물에서부터 외래문화를 적극적으로 반영한 건물 등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다. 또한 공법이나 재료에서 기존한옥의 형식을 그대로 답습하였다고 해도 자세히 살펴보면 이념이나 사고의 변화에 따른 제반 사항이 반영되고 있다. 예를 들어 남녀 생활공간의 구분이 모호해진다든지, 화장실이 집안에 설치되는 것 등 평면상에 새로운 변화가 모색되고 있다.

 

이 두 집 역시 이런 변화를 쉽게 읽어볼 수 있다. 두 집을 돌아보면 우선 조해영 가옥이 먼저 지어지고 김안균 가옥이 나중에 지어졌는데 김안균 가옥이 조해영 가옥을 참고하여 더 크고 화려하게 지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즉 후에 지어진 김안균 가옥이 조해영 가옥을 의식해서 더 과시하려 지어진 집이다. 그러나 집 양식을 보면 조해영 가옥이 더 일본풍을 따르고 있고 김안균 가옥은 전통한옥을 고수하면서도 은근히 일본풍을 도입하였다.

 

집의 내용으로 만 본다면 조해영 가옥이 더 친일적인 느낌이 풍긴다. 김안균 가옥은 전통적인 한옥의 규범을 따르고 있다. 대문간에 있는 전정前庭과 안채를 가르는 벽이 기존 한옥에서 보여주는 담이 아니라 반 칸 규모의 헛간이 늘어서 있는 구조로 되어 있고 전정의 벽도 기둥이 두 개씩 세우고 기둥사이에 중인방을 노출시킨 구조가 낯설다. 또한 전정前庭벽체 지붕의 기와가 원래 그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본식 기와로 덮여있어 일본풍이 강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런 점을 제외하고는 집전체가 한옥의 기본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조해영 가옥은 그렇지 않다. 사랑채 전면에 일본풍이 강하게 느껴지는 포치를 두었고 지붕 끝에는 처마 끝에 처마홈통을 돌리고 빗물을 내리 받는 선홈통까지 설치하여 한옥과는 다른 느낌을 준다. 또한 별채는 완전히 일본식으로 지었다. 우리 건물에서도 전면에 포치를 둔 예가 있다. 대표적인 예가 왕릉 앞에 있는 정자각丁字閣이고, 이 외에도 전주 경기전, 그리고 흥국사 원통전, 선암사 원통전이 있는데 이런 경우는 의례를 위한 공간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서양 집에서 있는 포치의 의미로 만들어진 것은 20세기 들어서 서양 건물이 들어서면서이다. 대표적인 예가 창덕궁 희정당이다. 희정당은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20년 다시 지 것으로 어차御車의 정차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이외에도 서울 가회동에 있는 산업은행관리가옥이 희정당과 같은 해에 지어진 건물로서 서양의 포치와 같은 개념으로 돌출되었다. 그러나 조해영가옥에 설치된 포치는 처마보다 안쪽에 있어 기능적인 것보다는 입구로서의 상징성만이 강조된 것이다. 또한 포치의 형태가 앞서 소개한 두 건물은 한옥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 비해 조해영 가옥은 일본풍을 보이고 있다.

 

이것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1922년 지어졌다는 별채이다. 별채는 완전한 일본식건물이다. 지붕을 구성하는 방식이 한옥 구조이고 방에 온돌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와나 평면형식, 장마루의 마루방 그리고 외관에서는 완벽한 일본식 건물이다. 이런 집을 지었다는 것은 이 집을 지은 사람이 완벽한 일본식 생활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일본식 집을 지었다는 것은 일본식으로 생활하겠다는 의지이다. 따라서 집을 지은 사람의 친일성향을 보여주고 있다.

 

더욱이 이 집 사랑채 상량문에 대정(大正) 7년이라는 연호를 썼다고 하니 그 성향을 더 느끼게 한다. 같은 시대에 지은 집이라고 해도 달성 삼가헌 문간채에 상량문에 있는 개국開國 4244년(서기西紀 1911년) 즉 일제에 항거하며 우리의 뿌리를 찾고자 하는 단기檀紀연호를 쓴 것과 비교된다.

 

조해영 가옥은 사랑채와 별채 그리고 문간채와 별당이 남아있는데 대지 규모에 비해 처음에 지어진 집 전체가 남아있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한국의 건축문화재(전북)에 소개된 내용을 보면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사랑채이고 사랑채 남쪽에 안채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사랑채 뒤쪽에도 양옥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건물배치상황과 마당의 크기를 보면 안채가 들어서기는 조금 애매한 넓이가 아닌가 한다. 이 책에서는 5, 6칸 정도 규모가 아니었을까 추정하고 있는데 지금 규모의 사랑채를 지을 집에서 안채가 5,6칸 정도 규모였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현재 남아 있는 사랑채 평면은 ㄱ자와 ㄴ자를 붙여놓은 형태이다. 집은 겹처마에 물익공집이다. 이 시기를 전후에 지어진 고급한옥에서는 대부분 물익공을 사용하고 있다. 물익공은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왕실과 관련된 집안에서만 할 수 있었던 구조이다. 그러나 갑오경장이후 조선전통사회구조가 와해되면서 조금 만 잘나간다는 집에서 새로 집을 지을 때는 모두 이런 물익공구조를 사용하였다. 바로 옆에 지은 김안균가옥 역시 물익공집이다.

 

새로 복원한 솟을대문 옆에는 안채와 사랑채를 구분하는 내외담이 설치되어 있다. 내외담은 경복궁 자경전 앞의 십장생 굴뚝 벽화를 모방한 십장생문양의 꽃담으로 구성하였다. 그러나 김안균 가옥에서는 사랑채와 안채를 벽돌로 쌓은 내외벽으로 나누고 중문을 설치했는데 그 벽은 지금 대부분 사라졌지만 그림이 아닌 문자문양으로 벽체를 장식하고 있다.

 

김안균 가옥은 내외담을 중심으로 좌우에 ㄴ자 건물을 대칭으로 배치하였다. 두 건물은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이렇게 안채와 사랑채를 복도로 연결된 민가는 아마도 이 집이 유일하지 않은가 한다. 더 재미있는 것은 복도가 끝나는 사랑채 창유리를 스테인드글래스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궁궐도 아닌 민가에서 스테인드글래스를 사용했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졸부근성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든다.

 

안채와 사랑채는 외관에서 차이를 보인다. 규모는 안채가 크지만 안채는 차분하고 안온한 느낌을 주게 하는 반면 사랑채는 화려함이 돋보이도록 지어졌다. 누마루 경우는 돌로 사다리꼴 기둥처럼 만든 초석(梯形礎石)을 사용하였는데 이 높이가 조해영 가옥의 누마루에 사용한 초석보다 높다. 사랑채의 깊이도 조해영 가옥이 한 칸 규모로 되어 있는데 비하여 두 칸 규모로 하고 기단의 높이도 더 높게 해서 조해영 가옥보다 높고 화려해 보인다.

 

집이 지어진 내력을 보면 두 집안은 아마도 마을에서도 그리 가깝게 지내지는 못했을 것 같다. 누가 더 졸부인지 모르겠지만 두 집을 보면 서로 자기 부를 자랑하려고 안달이 난 사람들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처음 조해영 집안에서 집을 짓자 김안균 집안에서 저 집보다는 더 크고 화려하게 짓겠다고 해서 지어진 집이 현재의 김안균 가옥이다. 분명 김안균 가옥이 조해영 가옥보다는 여러 면에서 한 단계 더 고급으로 지어졌다는 것이다.

 

정해영 가옥의 대문이 솟을대문이고 김안균가옥의 집대문이 평대문인 것을 보면 아마도 김안균 가옥의 가문이 지체가 높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콤플렉스 때문에 집을 더 화려하게 지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집이 크고 화려하다고 해서 그 집안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집을 돌아다니다 보면 대부분 한옥들에 사람이 사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지만 그럼에도 어떤 품격을 느껴지는 집이 있다. 그러나 이 두 집에서는 단지 크고 화려한 집이라는 것 외에는 어떤 품격을 느낄 수 없었다.

 

집을 설계하면서 여러 건축주를 만난다. 대부분 자기 집을 지으려 하는 사람들이라면 재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돈으로 집을 짓지만 그들이 결코 살 수 없는 것이 품격이다. 건축주의 인품이 없으면 집도 그렇게 된다. 또한 많이 안다고 해서 인품이 길러지는 것도 아니다. 인품은 갈고 닦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지 돈이 많고, 많이 안다고 해서 나오는 것이 결코 아니다. 화려하지 않아도 품격이 있는 집 역시 돈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집 주인의 인품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두 집에서 인품이 없는 사람들의 집이 어떠한 가를 느낀다.

 

조해영가옥사랑채(솟을대문에서 본 모습)

조해영가옥사랑채(안마당에서 본 모습)

사랑채 누마루

사랑채 물익공

사랑채 포치(정면)

사랑채 포치(측면)와 상부 처마에 설치된 물받이 처마홈통

기둥에 설치된 선홈통

조해영가옥 별채

조해영가옥 십장생 내외벽

김안균가옥 안채

김안균가옥 전정벽체

김안균가옥 대문간의 전정前庭/앞에 보이는 문은 사랑채로 들어가는 중문

김안균가옥 사랑채

김안균 가옥 사랑채 누마루

김안균가옥 안채와 사랑채를 나누는 내외벽/벽체에 문양이 있음

안채와 사랑채를 연결하는 복도

연결복도 내부

출처 : 사단법인 한국의 재발견
글쓴이 : 최성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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