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건은 왜 손자의 양육일기를 쓴 것일까?
『양아록』은 조광조의 문하생으로 사화에 휘말려 장조카가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하고 자신도 귀양살이하는 상황에서 병든 외아들이 결혼하자 손자가 태어나 가문을 이어가길 갈망한 나머지 이런 기록을 남겼다. 직접 손자 수봉의 탄생 순간부터 성장하는 과정을 시와 산문으로 기록한 조선판 육아일기다.
유배지에서 그는 손자를 직접 길러 무려 16세까지 육아의 과정에서 일어난 소소한 일들을 기록으로 남겼다. 전통사회의 양육은 어머니의 몫이긴 했으나 아버지들이 전혀 참여 않거나 묵인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일기라 하겠다. 조선 시대 전통가옥은 남녀의 생활공간이 구분되어 있었다. 당시 남자 아이는 일곱 살이 되면 어머니 품을 떠나 남자들의 공간인 사랑채로 옮겨 생활하게 했다. 그때부터 남자아이의 육아는 남자들이 담당 했던 것이다. 사랑채에서 할아버지 슬하에 글을 배우고 예의범절을 익혔으며, 손님이 찾아오면 인사를 올리는 곳도 바로 사랑채였다. 따라서 남자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집안의 남자 어른들과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이문건이 남긴 또 하나의 기록인『묵재일기默齋日記』는 이 사실을 증명한다. 손자가 6세 이전에는 여성들의 거처에서 자라게 하다가 6세부터는 자신이 머무는 별채에 데려와 항상 돌보며 가르쳤고, 이따금 외출할 때는 데리고 가서 어른들 틈에 끼어 있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집에 손님이 오면 어린이를 자기네끼리 놀지 않게 하고 어른들과 함께 있게 해서 생활에서 배우게 한다는데, 조선 시대 사대부가 그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 그럼『양아록』의 세계로 직접 들어가 보자. 조선 시대의 출산 풍속, 육아, 자녀 교육은 어땠을까?
조선 시대의 출산 풍속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지는 것일까? 마침내 며느리가 임신하여 출산하는 데 성공하자 탯줄을 자르고, 태를 태워 항아리에 담아 묻고, 유모를 선정하고, 목욕시키며 아기 옷을 입히고, 이름을 짓는다. 태의보존 상태는 아이에게 영향이 미친다고 믿었으며, 유모를 고를 때 젖이 많이 나는가는 물론 그 인성도 고려하며, 이름도 여러 번 고쳐 짓는 등 자녀를 위해 최선을 다했음을 알 수 있다. 작명하는 대목을 보면, 처음에는 숙길淑吉이라 지었다가 이내 준숙遵塾으로 고쳤다가, 고심 끝에 수봉守封으로 확정한다. 이 과정에서 스스로 점까지 치고 있어 당시 사람들이 이름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보여준다.
조선 시대의 육아 양상
이문건은 부인과 며느리가 머무는 아래채에 내려가 손자의 발육과정을 지켜보며 그 변화 과정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4개월이 되어 안을 수 있고 고개를 가누며 앉게 되기, 첫니 나기, 기어다니기, 윗니 나기, 일어서기, 걸음마 연습, 책 읽기 흉내 내기, 젖니 갈기 등이 그것이다. 기어다니기 시작할 때의 모습을 묘사한 대목을 보면‘7월 보름 때 비로소 몸을 엎드려 기려는 형세를 짓더니, 8월 보름 후 기어다닌다.’라고 하였고, 일어서던 날에는 그 감격을 이렇게 시로 적었다.‘잘못 디뎌 넘어지거나 미끄러지지 마라. 차분히 예의를 갖추어 오래도록 대길하길 바라노라.’걸음마 연습 장면도 인상적이다.
‘12월 보름 후 능히 발짝을 뗄 수 있었다. 손으로 창문살을 붙들고 옆걸음질로 걸음마 연습하네. 점점 한 발짝씩 떼기는 하지만 자주 넘어지고 일어서고 하는구나. 쉴 사이 없이 움직이며 뒹굴더니, 전날과 달리 여러 발짝을 떼네. 나를 향해 두 손 들고, 웃으며 다가오는데 미끄러질까 겁내는 듯하구나. 등을 어루만지고 다시 뺨을 비벼주며,‘우리 숙길이’하며 끌어안고 환호했네.’무럭무럭 자라던 아이에게 닥치는 발병과 사고도 기록했다. 이질, 학질, 안질, 더위 먹기에 이어 천연두, 귓병, 종기, 홍역 등 여러 가지 병을 앓는 어린 손자를 밤잠을 설치며 간호하면서 자신의 무력함에 안타까워하는 할아버지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손자가 천연두를 앓는 동안‘부부가 번갈아 돌보며, 털끝 하나라도 잃을까 걱정했다.’는 대목에서 우리는 이들 부부가 손자의 병고에 대해 얼마나 노심초사했는가를 잘 알 수 있다. 급기야 하늘에 빌기까지 한다. 손자가 당하는 사고는 손톱 다치기, 이마 다치기, 벌레 물리기 등이다. 차라리 벌레가 자기를 물었으면 좋겠다며 속상해 하기도 한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돌을 맞이하게 되어 돌잡이하는 기록이 이어진다. 첫째로 붓과 먹을 잡으면 장차 문장으로 대성할 것이라며 흐뭇해한다. 그러고 보면 돌잡이는 오래된 풍속인 셈이다.
조선 시대의 자녀 교육
손자가 6세가 되던 해부터는 자기 방에서 데리고 자면서 돌보고 있다. 귀하게 얻은 손자지만 야단치기도 하고 매질도 하였다. 사대부 가문을 계승할 수 있는 후계자로 기르기 위해 목표를 설정하고 교육했다. 급하게 화내는 버릇을 고치기 위해 야단을 치기도 했으며, 단옷날 공부는 안 하고 그네타기에만 빠져 있자 붙들어다 놓고 꾸짖다가 화가 나서 그네를 끊어 버리고 회초리로 때리며, 포기해 버릴까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아이는 자랄수록 공부 시간에 딴청을 부렸다. 아버지가 죽은 뒤에는 술에 만취하는 등 엇나가기 일쑤였다.
매질이 시작됐다. 피울음 같은 매질이었다. 손자를 때린 날 밤, 그 여린 마음은 이런 일기를 쓰게 만든다.‘성급하게 가르친다고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야 이문건은 자신의 난폭함을 경계하고 절대 매를 들지 않는다. 채벌을 한 기록한 대목을 보자.‘아이가 학업을 하지 않아 앞에 앉게 하고 나무랐는데 또 주의 깊게 듣지 않았다. 잠시 후 일어나 나가서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동문 밖에 나갔다. 곧바로 종을 보내 불러오게 했는데 돌아온 후 사립문 밖에서 머뭇거리고 들어오지 않았다. 성난 목소리로 불렀으나 오랫동안 그렇게 하고 있었다. 꾸중을 들을까 봐 그런 것이다. 묵재가 아랫집에 있다가 내려가서 그 불손함을 꾸짖으며 친히 데리고 들어왔다. 들어오면서 그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다섯 번 때렸다. 들어오게 하여 창 쪽으로 서있게 하고 그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때렸다. 이에 손자가 엎드려 울었다.’아이가 한문 공부 시간에 딴청을 부리거나 문장 해석을 원칙대로 하지 않으며, 술에 취해 엇나가기를 일쑤로 하자 말로 하다 종아리를 때린다.
매 맞고 우는 손자를 보며 이렇게 탄식한다.‘때리는 걸 멈추자 한참을 엎드려서 우는데 늙은이의 마음도 울고 싶을 뿐이라.’예나 이제나 자식 교육은 어려운 일인가 보다. 기록에 의하면 이렇게 교육받은 손자 이수봉은 임진왜란 때의 병으로 출전해 공을 세우고도 상을 사양해 추앙받았다. 할아버지의 지극한 보살핌과 정성, 그리고 때로는 매질하기까지 하는 교육이 있었기에 국가의 위기 앞에서 의연히 충성을 바치고도 그 공을 자랑하지 않는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있었다 하겠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모두 자녀가 존경받는 인물이 되기를 원한다. 묵재 이문건의『양아록』에서 그 지혜를 재발견할 일이다.
글. 이복규 (서경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사진. 문화재청,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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