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룡포와 오조룡五爪龍에 대하여
칠조룡은 근정전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자료는 아직은 부족하여 더 보완하여 올리겠습니다.
조선왕의 복식은 크게 세 가지가 있었다. 가장 위엄을 보여야 할 때 입는 대례복으로서 면류관冕旒冠과 구장복九章服, 조회를 받거나 일본, 유구의 사신을 접견할 때 입는 원유관遠遊冠과 강사포絳紗袍, 평소 신료들과 국정을 논의할 때 입는 익선관翼善冠과 곤룡포袞龍袍로 나뉜다.
* 구장복과 강사포에 대한 자료는 참고자료의 링크를 참조하십시요.
곤룡포를 입은 영조 어진(자료출처:문화재청사이트)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곤룡포에는 어깨와 흉배에 금사로 오조룡이 수놓아 있으며 붉은 색이다. 그러나 전주 경기전慶基殿에 있는 태조의 어진의 곤룡포 색깔은 청색이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우리 왕이 붉은색의 곤룡포를 입었을까.
이것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두 가지 참고할 만한 기사가 있다. 첫 번째 기사는 세종 32년(1450년) 윤1월 7일의 것으로 다음과 같다.
....고려 때에 있어서는 왕과 세자(世子)가 모두 면복(冕服)을 입고서 신민(臣民)에게 군림하였고, 홍무 2년에는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께서 공민왕(恭愍王) 전(顓)에게 구장 면복(九章冕服)을 하사하셨고, 신의 선부(先父) 공정왕(恭定王) 때에 와서는 특별히 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께옵서 돌보아 대우하심이 융숭하심을 입어 구장 면복(九章冕服)을 받았으며, 신의 몸에 이르러서는 또 태상 황제(太上皇帝)께서 곤룡포와 면류관을 주심을 입었사오나, 세자(世子)의 면복(冕服)은 아니 주셨으므로 나라 사람이 민망하게 생각하여서, 이르기를, ‘신의 선부(先父)와 신이 모두 구장 곤면(九章袞冕)의 의복을 받았으니 세자(世子)도 마땅히 칠장 면복(七章冕服)을 받아야 한다.’ 하여,
두 번째 것으로는 숙종 14년(1688년) 4월 8일기사로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정이 첨배(瞻拜)한즉 태조 대왕께서 입은 곤의(袞衣) 빛깔이 푸르니, 예복(禮服)이 아닌듯하다. 혹시 국초(國初)에 복색(服色)을, 푸른빛을 숭상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하니, 영부사(領府事) 김수흥(金壽興)이 아뢰기를, “사람들이 이르기를, ‘고려(高麗)에서는 푸른 빛을 숭상하였다.’고 하니, 태조조(太祖朝)는 고려와 시대가 멀지 않기 때문에 더러는 푸른 빛으로 곤의(袞衣)를 만들었을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그렇게 여겼다.
우선 숙종 때의 기사를 보면 고려가 푸른 빛을 숭상하였기 때문에 곤룡포가 푸른색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타당한 추정이라고 생각한다. 조선 초는 거의 고려의 편제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모든 것을 준비하고 정권을 탈취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라 생각한다. 제도를 조선왕조에 맞도록 어느 정도 정비한 결과가 세종 때 만들어진 오례의五禮儀이다.
경기전의 태조어진(자료출처:문화재청 사이트)
그러면 옷의 색깔은 언제 바뀌었을까. 이것은 세종 32년 기사에서 어느 정도 추정이 가능하다. 기사를 보면 중국에서 세종 때까지 우리나라에 왕의 옷을 하사한 경우가 세 번 있었는데 첫 번째는 명 태조 때 고려 공민왕에게 구장면복을 준 것이고 두 번째가 조선 태종 때 명 태종이 구장면복을 하사한 경우, 세 번째가 세종 때 6대 영종에게서 곤룡포와 면류관을 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세종 26년 3월 26일 기사에 의하면 면복도 같이 준 것으로 되어있다.
우선 고려 공민왕에게 내린 구장복은 당시 명의 입장에서는 고려를 회유하려는 뜻이 더 있다고 생각한다. 당시 원나라를 완전하게 제압하지 못한 상황에서 고려와의 관계를 돈독히 할 필요가 있어 고려를 사대관계로 묶어 두려했던 의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때 구장복과 곤룡포를 같이 하사했다면 구장복은 중국의 구장복형식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곤룡포는 고려의 복색을 어느 정도 따라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고려사 쪽 자료를 확인한 후 보완할 예정임)
태종에게 구장복을 내릴 때 곤룡포까지 내렸다는 이야기는 없으므로 곤룡포까지 같이 내렸는지 또는 내렸다면 색상이 어떠했을지는 알 수 없다. 앞서 태조 어진이 청색인 것으로 보면 이때도 청색 곤룡포를 입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세종 26년 기사를 보면 구장복뿐만 아니라 일상으로 입는 옷(상복常服/일상으로 입는 곤룡포) 및 그에 갖추어야 할 모든 부속 장식품까지 일습을 내린다.
또한 세종 32년 기사를 보면 대홍직금곤룡암골타운포(紗大紅織金袞龍暗骨朶雲袍), 나대홍직금곤룡포(羅大紅織金袞龍袍)라는 이름이 나온다. 여기서 홍직紅織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즉 붉은 색으로 짰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때부터 붉은색 곤룡포를 입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또한 선조 27년(1594년) 12월 25일 기사를 보면 “《대명회전(大明會典)》에는, 황제·황태자와 친군황세자(親郡王世子)는 모두 익선관에 곤룡포를 입는데 황제의 곤룡포는 황색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적색인 것으로 되어 있고....... 면복(冕服)은....위로부터 세자에 이르기까지 그 제도가 대개는 같고 단지 장수(章數)및 물색(物色)의 사소한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라고 되어 있어 기본적으로 명나라에서 왕의 곤룡포는 적색이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곤룡포의 색깔은 고려시대 청색이었던 것이 명나라의 복제로 바뀌며 적색으로 정해진 것이라 보인다. 이후에도 문종 즉위년에는 곤룡포를, 성종14년에는 용이 수놓인 옷감을, 중종 34년에도 옷감을 받은 적이 있다. 특히 중종 34년의 기사를 보면 중국복제와 달라 옷감으로 내린 것 같다는 내용이 있은 것으로 보아 이미 내린 초기 옷으로 외교적 치레는 하였고 이제는 우리나라에서 우리 규례대로 옷을 지으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종 14년 6월 19일의 기사를 보면 “또한 전하에게는 망룡(蟒龍) 1필을 주셨는데, 그 값이 은(銀) 3, 40냥에 이릅니다. 그대 나라에 서는 오직 색의 아름다움만 알고 그 값은 알지 못합니다.” 라고 했고 “세자의 관복(冠服)을 주청(奏請)하여 윤허를 받아서 특별히 12표리(表裏)를 받았고, 우리가 떠날 때를 당하여 또 머리를 조아리면서 주청하기를, ‘조선은 예의(禮義)의 나라로서 공경히 조정에 순종하니, 원컨대 다시 가엾게 여겨 주소서.’ 하니, 황제께서 말하기를, ‘해사(該司)에서 예(禮)에 의거하여 저지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기에, 우리가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만일 본국으로 하여금 스스로 짜게 한다면 흠사(欽賜)한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하여 즉시 또한 윤허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후로는 12표리(表裏)와 본국에 서 스스로 짜는 일 등에 대해서는 만세(萬世)에 정하여질 것입니다.
이 기사를 보면 세자의 옷감도 내린 것으로 보인다. 당시 그런 것에 대해 중국내에서 문제 삼을 수 있다고 황제가 하였으나 우리나라에서 만들어 입게 하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 했다. 이렇게 한 것은 옷감 값 만해도 엄청난 고가인데 옷으로 내리려면 거기에 따른 장식품 일습을 포함하여야 하기 때문에 무척 비싸져 그냥 옷감으로 대체하고 우리나라에서 알아서 하라고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을 할 수 있다.
어쨌든 세자의 옷에 대해서는 세종 때 중국으로 정식으로 하사받지 못했다. 이에 세종 31년 세자의 옷에 대해 논의하면서 일단 사조룡四爪龍 옷을 입는 것을 결정하고 동왕 32년 중국에 옷을 하사해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이때도 옷을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세조 2년(1456년) 3월 21일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김하(金何)가 아뢰기를, “신이 세종조(世宗朝)에 있을 때 여러 번 북경(北京)에 나아가 《대명집례(大明集禮)》를 상고(詳考)하였습니다. 황제는 곤룡포 위에 왼쪽 어깨에는 해가 있고 오른쪽 어깨에는 달이 있으며, 황태자(皇太子)로부터 친왕(親王)·군왕(郡王)은 곤룡포 위에 모두 오조룡(五爪龍)을 썼습니다. 이제 세자는 명을 받지 못했으니 우선 사조룡(四爪龍)을 써서 겸양(謙讓)의 뜻을 두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 내용을 보면 세조 초까지 중국으로부터 특별히 세자의 옷을 하사받지 못해 세자의 곤룡포에 사조룡을 쓴 것은 국내의견에 의해 정해진 것이 아닌가 한다.
이 당시 세자의 옷을 하사받지 못한 것은 중국의 내부사정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세종 32년(1450년/명 경태景泰 1년)에 세자 옷을 하사해달라고 중국에 사신을 보냈는데 이때는 명나라 6대 황제인 영종이 1449년 환관 왕진의 부추김으로 세력이 커진 몽골의 오이라트 원정에 나섰다가 대패하고 자신은 포로가 되는 토목의 변(土木之變)을 당한다. 이에 명나라는 이복동생을 옹립하여 새로 황제(대종代宗)를 추대하였다.
그리고 일 년 뒤 영종이 몽골에서 풀려나 돌아오니 영종은 태상황제가 되어 유폐되었다. 이후 1457년 대종이 죽자 다시 영종이 복위하여 1457년까지 재위한다. 이 당시 명나라는 구황제와 신황제 세력간에 다툼이 있었고 대종도 정변으로 쫓겨나고 다시 영종이 복위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나라와 외교문제에 신경 쓸 틈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세자의 곤룡포는 색이 검푸른 색이다. 그렇다면 이 색은 언제 결정되었을까. 아래 링크에 의하면 세자 곤룡포의 색깔은 흑색 또는 아청색으로 중종 때 결정되었다고 한다. 아래 링크 글은 중종 17년 7월 17일의 기사에서 우리나라 초기부터 아청색을 입었다고 하는 내용을 참조한 것 같다. 그러나 이후 선조실록의 내용을 보면 세자의 복식색깔이 모두 붉은 색이라고 하는 내용으로 일관되어 있다.
<궁궐의 전통복식> 관례를 통해본 왕세자의 복식
http://blog.naver.com/fpcp2010/110151390519
선조 27년(1594년) 12월 25일의 기사를 보면 동궁이 칙서를 받는 복장이 임금과 같아서 되겠는가 하는 질문을 하였는데 그 답이 대명회전에 황제만은 황색이고 그 이하는 모두 적색이라고 답하였다. 또한 동궁이 서연회강書筵會講때 입은 곤룡포도 붉은색이었다고 답하면서 왕의 옷과 차이가 없어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고 하였다. 이 기사를 보면 이때까지는 동궁의 곤룡포가 붉은 색이었던 것 같다.
이때 주목할 만한 기사는 선조 28년 3월 7일 기사로서 우리 사신이 황제의 칙서를 받아오는데 이것이 세자로 책봉하는 칙서가 아니므로 아직 동궁이 정식으로 중국에게서 인정받은 것이 아니므로 익선관翼善冠과 곤룡포袞龍袍를 착용하지 말고 오사모(烏紗帽)에 흑포(黑袍)를 입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선조가 따랐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후 선조는 세자의 복장에 대해 여러 차례 지적을 하지만 모두 붉은 색이었다고 답하는 내용이었다. 따라서 선조 때까지는 세자의 곤룡포도 붉은 색이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러면 왜 아청색이 붉은 색으로 바뀐 것일까. 이것은 중국이 세자의 옷을 위한 옷감을 보냈다는 성종 14년 6월 19일의 기사를 보면 힌트가 있는 것 같다. 아마도 이때 보낸 색깔이 붉은 색이 아니었을까 한다. 앞서 선조 때 기사에서도 나오듯이 중국의 복제가 황제만이 황색이고 나머지는 모두 붉은 색이었다. 따라서 중국에서 우리에게 내린 옷감의 색도 붉은 색이었을 것이다.
성종 전까지 수차례 세자의 복식을 내려달라는 주청이 있었음에도 답이 없었기 때문에 고려의 풍습대로 세자가 아청색을 입혔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던 것이 성종 때 옷감을 하사받으면서 그 옷감 색이 세자의 곤룡포 색으로 확정되고 사조룡은 이미 우리가 결정한 대로 수를 놓았을 것이다.
이런 옷의 색깔이 선조의 하명으로 변화된 것이 아닌가 한다. 선조는 광해군과 사이가 그렇게 좋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세자가 자기와 같은 옷을 입는 것을 매우 못마땅했을 것이다. 그래서 여러 차례 끈질기게 세자의 복식에 대해 물고 늘어졌던 것은 아닌가 한다. 어쨌든 이런 하명으로 우선 세자가 중국으로 책봉받기 전까지는 옷을 검은색으로 입으라 명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것이 광해 2년 3월 1일 다시 세자의 복식에 대해 논의하는 과정에서 중종의 하교를 들고 나오면서 색상의 변화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세자의 옷색깔이 아청책으로 확실하게 변화된 것은 현종 즉위년 5월 9일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내용을 보면 “사왕(嗣王)이 평천관(平天冠)을 쓰고 검정 곤룡포를 입고 규(圭)를 받들고 여차에서 나오자....” 라고 되어 있다. 아마도 세자의 신분으로 왕위를 받는 모습이므로 검정곤룡포를 입고 왕위를 물려받는 것이었고 이후 앞서 링크한 자료에서 보듯이 영조때 <국조오례의보서례國朝續五禮儀補序例>에 의해 완전히 구체화한 것이 아닌가 한다.
토목의 변
http://ko.wikipedia.org/wiki/%ED%86%A0%EB%AA%A9%EC%9D%98_%EB%B3%80
추기 :
자료를 찾다가 알게 된 몇 자료를 추기한다.
1. 代宗은 명왕조 7대 황제의 시호이다. 이 뜻은 대신해서 잠시 황제자리에 올랐다는 뜻으로 붙였을 것이다. 만일 代宗이 정변으로 쫓겨나지 않았다면 代宗의 시호는 달라졌을 것이다.
2. 인터넷브리태니커 사전에 의하면 명의 영종황제는 중국황제로서는 처음으로 자신의 비빈妃嬪들을 순장시키지 말라고 유언을 한 최초 명 황제였다. 이전에는 최소한 황제에게는 순장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3. 조선왕조실록에 태종이 태상황제(太上皇帝)에게서 면복을 받은 것이라고 한 것은 영종에게서 면복을 받았지만 이 기사를 쓸 때는 대종代宗때이므로 태상황제라고 한 것이다.
참고자료
인터넷조선왕조실록
조선왕실의 의례와 생활 궁중문화/신명호/돌베개
초상화의 비밀/국립중앙박물관
인터넷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인터넷 위키백과사전
<궁궐의 전통복식> 관례를 통해본 왕세자의 복식 :
http://blog.naver.com/fpcp2010/110151390519
구장복
강사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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