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미륵대원지(忠州 彌勒大院址/사적 제317호)
충주미륵대원전경(자료출처 : 문화재청사이트)
충주 미륵대원은 과거에는 중원미륵사지로 불렸던 곳이다. 그 이전에는 괴산 미륵리사지로 불렸다. 이처럼 미륵에 관련된 이름이 계속 이어져왔던 곳이다. 이곳의 발굴은 1976년도 절터 내에 있는 집을 이전하는 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석물이 발견되면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1977년 1차 발굴조사에 이어 1978년 2차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이후 1982년에 3차 발굴조사, 1990년에 4차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이것을 바탕으로 1987년 7월 18일 사적 317호로 지정되었다.
신영훈선생은 <미륵대원의 연구/1984>라는 글에서 “이런 절차로 미륵사원을 탐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는 영원히 사라지고 말게 되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언급을 할 정도니 1, 2차 발굴조사는 매우 문제가 많았던 것 같다. 어쨌든 그간 발굴조사 결과 여러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미륵대원’이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신영훈 선생의 연구가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다.
신영훈 선생은 발굴된 와편에서 발견된 ‘大院’, ‘大院寺’, ‘彌勒’, ‘彌勒堂’이란 이름을 기본으로 하여 여러 문헌자료를 검토한 결과 이 절의 이름이 ‘미륵대원彌勒大院’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4차 발굴조사보고서에서는 1차 발굴에서 발굴된 기와에서 ‘大院寺’라는 글이 발견된 것을 근거로 절 이름은 ‘대원사’이고 4차 때 발굴을 하였던 경내 동쪽 언덕의 유구가 ‘원院’이나 ‘역지驛址’ 또는 ‘군사시설’로 보아 동쪽 언덕 지역을 ‘미륵대원’으로 보고 있다.
4차 발굴조사보고서에서 주장하는 바대로 절 이름과 ‘원’ 이름을 구분하는 것도 타당성이 있다고 본다. 東文選에 있는 봉선홍경사비기奉先弘慶寺記(최충/태평 6년/1026년)에 의하면 원을 같이 운영하고 있었던 봉선홍경사의 경우 “절의 서편에 여관[客館]을 마주하여 세웠는데, 한 구역이 80간쯤 되었다. 이름을 광연통화원(廣緣通化院)이라 하였다.”고 되어있다.
또한 일반적으로 혜음사를 원의 성격을 강조하여 혜음원으로 알고 있는데 동문선에 있는 김부식이 쓴 혜음사신창기惠陰寺新創記에서도 절 이름은 ‘혜음사’로 하고 “절이 불당과 유숙하는 건물부터 주방, 창고에 이르기까지 모두 장소가 마련되었고, 또 생각하기를, ‘임금께서 남쪽으로 행차하신다면 행여 한번이라도 이곳에 머무르실 일이 없지 않을 것이니, 이에 대한 준비가 있어야 된다.’ 하여 드디어 따로 별원(別院) 한 개소를 지었는데, 이곳도 아름답고 화려하여 볼만하게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院이라고 해도 운영주체는 분명 절이지만 절과 원은 엄연하게 구분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봉선홍경사비기奉先弘慶寺記에서 보듯이 절 이름과 원의 이름은 다를 수가 있다.
봉선홍경사비기나 혜음사기에서 보듯이 불당과 원에 해당하는 건물은 분리되어 있었다. 이런 것을 근거로 김종헌은 이런 원의 구성은 절과 숙소가 따로 분리되어 있다고 주장하면서 ‘사찰은 독립된 진입과정을 갖게 되고 길가에서 원으로 직접 들어가서 쉴 수 있는 구조를 갖추었다’(우리나라 사찰건축의 입지와 교통의 연관성에 대한 연구)고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원이라고 하는 곳은 절과 숙소가 있으되 종교행사에 영향이 없도록 별도로 운영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4차 보고서에서 주장하듯이 절 이름은 ‘대원사’, 院 이름은 ‘미륵대원’으로 불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미륵대원지에서 우리가 주목해보아야 할 것은 무엇보다 절의 배치이다. 절은 남북으로 길게 배치되었다. 특이한 것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물게 북향으로 절이 배치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절의 입지상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절이 이곳에 세워진 것 이유를 신영훈 선생은 앞의 연구에서 왕건의 전략적 선택이라고 하고 있다. 중원을 지배하고자 했기 때문에 남쪽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고개인 지릅재와 하늘재를 지킬 수 있는 이곳에 절을 경영했다는 것이다. 지금 미륵대원 옆 동쪽으로 해서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하늘재로 가는 길이다.
하늘재는 한자로 계립령鷄立嶺이라고 부른다. 정확히 수안보 쪽에 있는 지릅재가 계립령인지 문경을 넘어가는 하늘재가 계립령을 의미하는지는 분명치 않다고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하늘재가 계립령(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계립령이라고 함)이라고 하고 있다. 후대 개척된 조령이나 이화령 때문에 거의 잊혀진 계립령은 신라 8대왕인 아달라이사금阿達羅尼師今(3년/156년)때 개척한 것으로 당시에는 매우 중요한 교통로였다.
또한 이곳은 신라와 고구려가 첨예하게 맞서던 곳이다. 온달장군이 출사표를 내면서 언급한 곳이 바로 ‘계립령’과 ‘죽령’이고 김춘추가 백제의 침공을 받고 고구려에 가서 원병을 요청하자 고구려 보장왕이 돌려달라고 언급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그만큼 삼국이 첨예하게 대립한 곳이다.
후삼국에 와서도 이곳 중원은 각축장이었다. 그렇다보니 이곳 주변에는 군사시설이 많이 있다. 주변에는 군창지와 성의 흔적이 있고 또 유명한 덕주산성이 있다. 몽고침입 때에도 이곳에서 많은 전투가 있었다. 미륵대원이 소실된 것도 바로 몽고전란이라고 신영훈 선생은 주장하고 있다.
신영훈 선생은 이 절의 창건을 901년에서 937년 사이로 보고 있다. 왕건(877-943/재위918-943)의 통일전쟁을 하는 과정에서 교통요지인 계립령을 장악하기 위해 미륵대원을 창건하였다는 것이다. 이 당시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가 상주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견훤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이 지역의 확보는 매우 중요했을 것이다.
아직 조령을 넘어가지 못한 상황에서 계립령 북쪽에 위치한 미륵대원의 배치는 계립령을 등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북향을 한 절 배치가 나온 것이다. 이런 배치로 인해 덕주사 마애불를 바라보는 상황이 되었고 이런 특별한 상황이 당시 망해 금강산으로 들어간 마의태자의 한과 맞물려 마의태자와 덕주공주의 슬픈 전설이 생긴 것이 아닌가 한다.
중원 미륵대원지는 우리나라 최후의 석굴사원으로 불리는 곳이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석굴사원이라고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의문이 있다. 경사면을 이용하여 삼면을 돌로 쌓아 감실 형식으로 만들고 전면과 위를 가려 집으로 만든 형식이다. 즉 삼면이 돌벽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석굴사원으로 칭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는 건축적으로 의문이 간다.
3차 발굴조사보고서에 의하면 현재 구조와 기둥배열을 분석한 결과 현재 보물 제96호로 지정된 석불입상이 건물 내에 위치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미륵대원/김봉렬) 신영훈 선생은 보개와 머리의 접합부를 살펴보면 보개를 의식하고 머리를 만들었다고 하면서, 건물 내에 설치된 불상에서 보개가 설치된 예가 없다는 점과 얼굴부분이 너무 깨끗해 몸체와는 별개로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따라서 이 불상은 나중에 손을 본 것이라 추측할 수도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어쨌든 현재로서 나중에 손은 본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우선 얼굴이 깨끗한 것은 보개 때문이다. 보개가 빗물이 들어치는 것을 막아주었기 때문에 머리 부분이 오염되지 않은 것이다. 나 역시 보개가 후대에 올려졌을 것으로 생각한다. 신영훈 선생에 의하면 석불입상 어깨 부분에 불로 인해 손상된 흔적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지금 모습이 원래 모습은 아닐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이런 주장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얼굴에 비해 어깨가 너무 좁다. 손도 매우 섬약해서 치졸해 보인다. 이런 불상의 모습은 석단을 쌓고 주변에 감실까지 만들어 보살상까지 안치해놓은 공력에 비한다면 너무 허술하게 처리한 듯 한 느낌이다. 또한 삼국통일을 한 후 만든 개태사의 불상이나 그보다 조금 늦었지만 광종 때 만든 은진미륵을 보면 당당함이 보이고 있다. 이보다 조금 먼저 만들어졌다고 해도 이곳의 군사적 정치적 중요성을 생각한다면 꽤 당당한 불상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불에 타서 불상과 감실이 손상을 입은 후 다시 손을 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다시 손볼 당시 이것을 다시 완벽하게 할 여력이 없다보니 머리 부분만 상대적으로 정교하게 다듬은 후 보개를 씌운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몸통부분이 섬약한 것은 화재 당시 상황을 상상해보면 이해할 수 있다.
불이 나면 목조 건물은 주저앉아 아래 부분에서 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주로 손상되는 곳은 아래 부분이다. 이 불상도 머리 부분보다는 목 아래 부분이 손상이 많이 되었을 것이고 그런 상태에서 몸통부분의 손상부위를 제거하고 다시 조각하다보니 머리에 비해서 몸이 빈약하게 된 것이다. 또한 머리 부분도 있는 상대적으로 손상이 많이 가진 않았지만 어쨌든 보완을 했을 것이나 석공의 솜씨가 미치지 못해 그리 좋은 상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 미륵대원은 언제 폐사되었을까. 신영훈 선생은 충주주변에서 몽고와 많은 전투가 있었다는 것을 근거로 몽고전란 때 소실 된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특히 대원령(계립재의 다른 이름)을 넘어와 급히 군대를 보내 격파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충주에서 몽고의 살례탑과의 전투가 있었다고 하는 예를 들어 이때 소실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한국불교사찰사전에서는 몽고전란 때 불탄 것을 고려 말 또는 조선 초에 중건하고, 임진란 때 불탔던 것을 18세기 무렵 중건하였으나 1936년 홍수로 폐사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 조그만 암자를 지어 세계사로 이름을 바꾸고 존속하였다고 한다.
일단 몽고전란 때 불탄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리고 신영훈 선생이 주장했듯이 후대에 언제 손을 본 것은 분명하다. 그때가 언제냐 하는 점이다. 일단 근거가 되는 것은 4차 발굴조사보고서이다. 4차 발굴조사는 주로 절 옆 동쪽 옛 마을 터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여기에서 발견된 유물을 보면 고려시대, 조선시대 와편뿐만 아니라 질좋은 분청자기편도 많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곳에 백자도 발견되었지만 질이 좋지 않아 후대 마을 사람들이 사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분청사기는 15-6세기에 걸쳐 생산되었던 것이고 또한 질이 좋은 분청사기이므로 조선 초까지는 원이나 이와 비슷한 것이 있었다는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살펴보면 연풍조에 역원 설명에 ‘미륵대원’으로 생각할 만한 원이 소개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문경조에 “관음원(觀音院), 겨릅재 밑에 있다.”고 나온다. 즉 1530년(성종)에 까지 관음원이 있었다는 것을 보면 이때까지도 하늘재가 어느 정도 교통로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이라면 연풍 쪽에 있었던 미륵대원도 아직은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원이 있었다면 옆에 절도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임진란 전까지는 원으로서의 가치가 있어 소규모라도 남아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임진란 이후는 새재가 주된 통로였을 것이므로 다시 지어지지 않았고 후대 절만이 소규모로 지어져 이어져 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는 불교사찰사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일제강점기에 홍수로 거의 폐사상태로 되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곳에는 현재 보물 제95호인 오층석탑, 유형문화재 제19호인 신라계 석등과 고려시대 석등의 전형을 보여주는 유형문화재 제315호 사각석등, 그리고 유형문화재 제269호인 귀부, 당간지주 등이 있다. 유형문화재 제33호인 3층 석탑은 본 사지에서 조금 떨어져 하늘재로 올라가는 길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데 4차 발굴조사 결과 주변에 건물이 있었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따라서 절의 경내에 만든 탑이라기보다는 이정표 또는 여행객들이 기도처로 만든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석등 중 탑 옆에 있는 사각석등은 고려시대에만 볼 수 있는 석등으로 현화사, 관촉사 석등과 양식상 유사성을 보인다. 김봉렬의 책에 의하면 석탑 앞쪽 중심축 상에 부서져 넘어져 있던 것을 모아 현 위치에 세운 것이라고 한다. 시대로 보면 사각석등이 나중에 만들어졌을 터 어떤 이유로 석탑 앞에 다시 석등을 만들었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다.
두 석등 중 절이 만들어졌을 때 만든 석등은 탑과 불상과의 중간에 위치한 유형문화재 제19호 석등이다. 이 석등을 보면 신라석등 형식을 쫓은 것으로 금산사 석등과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신라시대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경내에 있는 석물 중에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오층석탑과 귀부이다. 김봉렬은 석탑기단과 귀부가 원래 있었던 자연석을 가공해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귀부에 대해서는 4차 발굴조사보고서에서도 같은 의견을 내고 있다. 귀부는 그렇다고 해도 김봉렬의 말대로 석탑의 기단이 자연석이라고 하면 이 절 계획의 출발점은 바로 이 석탑에서 부터라고 할 수 있다. 석탑에서 석불과는 일직선이다. 그리고 김봉렬에 의하면 본존불에서 석등까지 90척 석탑까지 150척이라고 한다.
석탑기단이 자연석이고 석불이 있는 곳의 석축이 인공물이라고 한다면 결국 석탑의 위치에서 모든 것이 출발하였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이런 계획을 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진 사람의 능력이 놀랍기만 한다.
귀부는 자연석을 가공하다 보니 정교한 가공이 되지 않았다. 자연상태을 따르고 최대한 크게 가공하려 하다 보니 세세한 가공은 생략할 수밖에 없었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거북의 머리를 보면 나름 석공의 솜씨를 엿볼 수 있다. 매우 세련된 솜씨를 가진 석공이 가공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는다.
석탑은 세련된 맛은 없지만 강한 개성을 보여주고 있다. 마치 갑옷을 갖추고 있는 늠름한 장수를 보는 듯하다. 신영훈 선생은 기와에서 발견된 ‘대관大官’이란 명문을 삼국사기에 나오는 신라시대 ‘대관’이라는 무신武臣으로 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이 절을 지을 때 ‘대관’이라는 직책을 가진 사람이 시주하였거나 직접 절을 짓는데 참여했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이렇게 무장들이 시주에 참여했거나 아니면 직접 절은 짓는데 참여하였기 때문에 석탑이나 귀부에서 강인함이 나오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김봉렬은 옆에 하천에 대해 특별한 해석을 하고 있다. 김봉렬은 옆에 석축을 쌓아 만든 개천을 돌을 나르던 운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처음 이곳에서 절을 경영하려 했던 사람도 절의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꼬불꼬불했던 물길을 다시 정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김봉렬은 절의 돌이 위쪽 산에서 가져온 것이므로 이 물길을 이용했을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우선 하천의 폭이 넓은 곳이라도 10m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 배나 뗏목을 태운다는 것이 쉽지 않다. 또한 계곡에 있는 하천은 물살이 급하여 무거운 돌을 실은 뗏목을 조정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또한 뗏목을 띄울만한 수량이 확보할 수 있었는지도 의문이 된다. 수량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운하처럼 물길을 막아야하는데 경사가 급한 곳에서 이런 물막이 시설을 많이 만들어야 하는데 이 물막이를 넘어 돌을 나르는 것은 더욱 쉽지 않은 일이다. 한마디로 현실이 뒷받침되지 않은 상상력 일 뿐이다.
추신:
이번 미륵대원에 대한 자료를 찾으면서 근처에 사자빈신사지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았다. 사자빈신사獅子頻迅寺에 대한 유래는 화엄경 입법계품에 있었다. 입법계품에서는 선재동자가 사자빈신성獅子頻迅城에 살고 있는 사자당왕獅子幢王의 공주인 자행동녀를 찾아갔다고 하는데 따라서 절 이름이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참고자료
-中原彌勒里寺址(4次發掘調査報告書)/청주대학교 박물관/1992
-앎과 삶의 공간/김봉렬/주)이상건축/1999
-한국불교 사찰사전/이정/불교시대사/1996
-삼국사기/김부식/김종권/명문당/1993
-삼국유사/일연/김원중/2002
-彌勒大院의 硏究/신영훈/한국미술사학회 미술사학연구(구 고고미술) 162,163/1984.09
-우리나라 寺刹建築의 立地와 交通의 聯關性에 관한 硏究/김종헌/건축역사연구 제9권 2호/2000.09
-동문선 제64권(봉선 홍경사기,혜음사 신창기)
-세종실록 지리지(문경현, 연풍현)
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신증동국여지승람(문경현, 연풍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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