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로가 500년 조선을 지탱하다
군주와 신하 사이를 연결해 주는 언로야말로 활짝 열려 있어야 할 최고의 소통 수단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아첨하는 말이야 식은 죽 먹기처럼 쉬운 일이지만 지존의 임금 면전에서 쓴 소리로 직언을 올리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성인군자라면 몰라도 쓴 소리 듣기를 좋아할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러하니 언로의 기능 정도가 그 사회의 건강지수를 나타낸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오늘날 청와대 춘추관에는 신문고를 상징하는 큰 북이 매달려 있다. 소통을 위한 상징물인 셈인데 진실로 제 기능을 하고 있는지가 궁금하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신문고는 억울한 일을 당한 자가 북을 쳐서 관에다 호소하는 일종의 소원訴願제도였다. 그런데 북을 치는 조건들이 까다로워 점차 유야무야되어 버렸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백성들의 사회의식 표출 방법이 다양하게 나타났고, 이를 대표하던 것이 격쟁이었다. 임금 행차길 앞에서 꽹과리로 억울함을 호소하던 격쟁이 소원의 대체수단으로 떠오른 것이다. 영·정조 75년의 치세동안‘격쟁’이란 단어를《승정원일기》에서 검색해 보면 무려 2,969건이 나타난다. 크게 늘어난 민생 문제에 대한 국가적 부담을 짐작케 하는 대목 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시기를 조선후기 르네상스라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아무튼 전통사회에서도 민의를 상달하던 기능은 다양했고, 특히 한글이 원활한 소통도구가 되다시피 했다. 한글로 작성된 투서들이 성행했던 것에서 엿볼 수 있듯이 세종은 백성들에게‘소통의 창’을 열어 주었던 임금이었다. 우리의 민의상달 제도 중에서도 돋보이는 하나가 상소제도였다. 상소가 올라오면 국왕이 직접 비답을 내려야 했기에 왕의 저녁 일과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상소문 읽기였다. 을사사화에 화를 입었던 사림의 신원을 위해 41번이나 올린 율곡의 상소나 유생 1만여 명이 동원된 만인소 등이 인구에 회자되는 것들이다. 상소 중에서도 도끼를 지참하는 지부상소持斧上疏는 우리 선비정신의 백미다. ‘내 주장이 그릇되어 받아들이지 않을 바엔 차라리 이 도끼로 나를 치시오’라는 결연한 의지를 담은 것인데, 강화도조약을 눈앞에 둔 최익현의 지부상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명가도를 요구하자 일본 사신의 목을 베라며 대궐 밖에서 사흘 동안 꼼짝 않던 조헌의 지부상소가 대표적이다.
이처럼 우리 선조가 살았던 시절을 회고해 보면 고개가 저절로 숙여지는 것이 한 둘이 아닌데, 임금이 잘못된 방향으로 갈 때 이를 간하여 바로 잡는 일을 전담하던 관청과 공무원을 두었던 것도 그중의 하나다. 사간원 간관들이 바로 그들인데, 이들은 국가로부터 간쟁권을 보장받았으니 간쟁이 잘못되었다는 이유로 좌천시킬 수 없었던 것이 당시 법도였다. 옆에서 듣는 이의 등골이 오싹해지고 식은땀이 줄줄 흐른 일 또한 부지기수였으니, 이렇듯‘열린 언로’가 조선이란 나라를 장장 5백년이나 갈 수 있도록 지켰음이 분명하다.
신하를 충신으로 만드는 것도 군주요,
아첨배로 만드는 것도 군주다
《효경》에 천자는‘쟁신諍臣7인만 있으면 비록 도가 없더라도 그 천하를 잃지 않고, 제후가 쟁신 5인만 있으면 비록 도가 없더라도 그 나라를 잃지 않으며, 대부가 쟁신 3인만 있으면 비록 도가 없더라도 그 집을 잃지 않는다’고 했다. 면전에다 직언하고 목숨 걸어 극간하는 신하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직언과 극간은 오로지 주군을 바로 보필하려는 마음자세에서 출발한다. 그러하니 명예를 탐하거나 영달을 구하는 마음으로 임금 허물을 드러내려 해서는 안 된다. 조선후기 실학자 이익은《성호사설》에서 ‘임금 허물을 드러내려는 것은 오직 나라를 찬탈하려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요, 군신 관계를 생각한 것이 아니라’하였다. 이런 까닭에 ‘임금이 되어 이 세가지(명예, 영달, 허물)를 의심하는 것은 스스로 그 눈을 가리는 것이요, 신하가 되어 이 세가지를 가지고 막는 것은 재앙을 사려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그러니 올곧은 간신諫臣이 되는 것도, 나무라지 않는 군주가 되는 것도 어려운 것이다.
중국 고대 우임금과 탕임금은 좋은 말을 들으면 절을 하고 허물을 고치는 데 인색하지 않았으니 요·순 다음으로 추앙 받는 임금이 된 것이다. 당 태종 또한 간하는 말 좇기를 물 흐르듯 하였고, 직언하는 자가 있으면 문득 금과 비단으로 상을 주었으니,‘정관의 치’라는 태평성대가 그냥 온 것이 아니었다. 직언하는 신하를 두었다는 것은 행복한 군주지만 충신을 만드는 것도 군주요, 아첨배를 만드는 것도 군주의 몫이니 군주의 품성 또한 중요하다.
세종대왕은 재위 30여 년 동안 직언 구하기를 마치 목마른 것같이 하여 선비의 풍을 격려하니 이는 만대에까지 미쳤다. 문종 때 불우佛宇(불당) 건조建造를 간하면서 그 글까지 불태우기를 청했던 심효원의 직언이나, 왕실불교와 연결된 간승 신미를 논죄하면서 시부弑父의 적으로 지칭하던 박팽년의 극간도 세종 치세의 결과였고, 세조정권에 맞선 사육신과 생육신등한무리의 선비들 역시 세종 치세 언론정책의 결과였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성종이 매양 구언求言하는 교서를 내렸지만 직언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한탄했듯이 그는 조선조 임금 중에서 가장 간諫에 너그러웠던 왕이었다. 술 마시기를 즐겼던 성종이 아끼던 옥 술잔 하나가 있었는데, 흥건하게 취하면 이 잔으로 신하에게 술을 내렸다. 술을 받아 마신 종친한사람이 소매에다 잔을 넣고 춤추다가 일부러 넘어져 산산조각 내버렸다. 임금의 과한 술 마심을 간접적으로 간했던 것을 알아차린 성종 또한 이를 허물하지 아니했으니, 고금에 다시없는 일이었다.
목숨을 걸고 직간했던 참된 선비들
임금 면전에서 직간을 주저하지 않았던 신하로 꼽자면 으뜸은 단연 이칙과 홍귀달이었다. 조선조 성종이 어느 날 성균관에 행차하여 옛글을 강론하고 직언을 구하려 하였다. 당시 노사신과 이승소가 요청한 일에 임금이 들어주지 않은 일이 있었다. 이에 성균관 대제학이던 이칙이“노사신과 이승소 같은 원로대신이 아뢴 바도 들어주지 않으셨거늘, 하물며 성균관에 행차하시어 무슨 말을 구하시렵니까?”라고 직언했다. 척신이던 소인 임사홍이 중앙 정치무대에 재등장할 기미가 보이자 공론이 크게 일었다. 이 때 이칙은“전하께서 방계로 왕통을 이었는데, 어찌 종묘사직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라는 직간을 했다.
아픈 곳을 찔린 성종이 화를 냈지만“아들이 아버지를 잇는 것은 당연하지만, 백성을 위하여 임금을 선택한다면 성인이 아니면 아니 될 것입니다. 신은 전하께서 요순이 되길 바랐는데, 이제 간하는 말을 듣지 않으시니 신의 마음이 실로 아픕니다”라는 이칙의 직간이 이어졌다. 방계로 왕위를 지명 받은 성종의 아킬레스건까지 건드렸으니, 옆에서 듣고 있던 대신들의 등줄기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세조 때 문과에 올라 4대 임금을 섬긴 홍귀달은 직언을 잘하여 연산군도 기피하는 인물이었다. 무오사화 이후 혼미한 정국에 장문의 소를 올리니, 연산이 자못 싫어하였다. 공이 간할 때 조금도 숨김없이 궁중 비밀까지 캐내고 풍자하되 말이 간절하고 곧았으니 결국 연산군은 그를 경기감사로 내쫓았다. 모함 받아 경원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을 때“내가 본래 함창 농사꾼에서 재상 지위에 올랐는데, 본래 내가 가졌던 것도 아니니 출세한 것도 아니요 실패한 것도 아니다. 다만 옛날로 되돌아 갈 뿐이니 무슨 원망이 있겠는가”하고는 태연히 떠났다가 단천에 이르러 죽임을 당했다.
연산군이 왕자빈을 고를 때 공의 손녀딸이 용모가 출중하다는 소문을 듣고 위협하여 빈을 삼으려 했으나 끝내 듣질 않았다. 이것이 명을 재촉했는지도 모른다. 주위 사람들에게 눈 한번 흘긴 적이 없지만, 국사를 논할 때나 임금에게 직간할 일이 있을 때는 뒤를 생각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진실로 충간忠諫의 풍모를 지닌 위인이 아닐 수 없다.
글. 박홍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부장) 사진. 문화재청,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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