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시는 26일(월) 오랜 세월 동안 풍화 등으로 마모되어 잊혀져 가는 한양도성의 ‘각자성돌’ (글자새긴 성돌, 성곽 돌에 도성 축성관련 글을 새겨 넣은 것) 80개를 새롭게 발굴하였고, 현장의 각자 성돌과 실록, 승정원일기 등 기록을 추적함으로써, 붕괴(규모)‧착공‧완공 연월일 및 공사 규모를 정확히 확인하는 성과를 거뒀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 특히, 이러한 추적 조사를 통해 크기 60×60cm 성돌이 「숙종 연간」에 사용되었다는 일제 때부터의 통설을 「순조 연간」으로 변경하여야 한다는 결정적 증거도 제시하였다.
□ 서울시는 약 1년동안 서울시 직원이 자체 학술연구를 통해 밝혀낸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한양도성의 진정성 탐구’를 주제로 오는 12월 개최되는 ‘2013년도 한양도성 학술회의’에서 최종결과를 발표한다고 밝혔다.
< 600년 한양도성의 축성과정을 담은‘각자 성돌’>
□ 서울 한양도성은 태조5년(1396년) 초축된 이후 세종4년(1422년)과 숙종30년(1704년)에 대규모로 개축되었고, 영조‧정조‧순조‧고종 연간에 걸쳐 보수하는 등 600년간 보존‧관리되어 왔다. 도성을 견고하게 축성하고 제대로 보수하기 위해 공사구간의 성돌에 책임자 이름, 축성구간 등을 새겨 놓도록 하였다. 이것이 ‘각자 성돌’ 로 불려지고 있다.
○ 한양도성을 97개 구간으로 나누어 각 지역별로 일정구간을 담당하게 하고, 각 구간마다 천자문 순서대로 순번을 정했다. 백악산 동쪽의 제1구간부터 ‘天’ 자로 시작해서 97구간은 ‘弔’자로 끝났다.
○ 구간별 책임제하에 공사는 실시되었고, 성곽에 있는 성돌에 구간 책임자‧감독자의 성명, 축성구간을 새겨 넣은 ‘각자 성돌’을 남겨 성벽이 무너질 경우 이를 책임지게 하였다.
< 1년간 12.8km 한양도성 전수조사, 80개 각자성돌 추가 발견>
□ 서울시에서는 지난 1년간 한양도성 12.8km구간의 성돌 하나하나를 직접 육안으로 확인한 결과, 80개의 각자 성돌을 새롭게 찾아 냈다. 각자 성돌은 오랜 기간 풍화되어 찾아 내기가 참으로 어려운 과정이었다.
○ 예를들어, 2013. 5월경 서울 과학고 뒤쪽에 한양도성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발견한 각자 성돌은 ‘○谷’자로 처음 글자는 판독이 불가능하였으나, 조선왕조실록상의 ‘谷’자를 전수 검색해서 강원도 ‘歙谷(흡곡)’임을 알아 냈고, 성돌이 발견된 도성구간은 세종 때 축성시 강원도 도민이 동원된 지역이다.(흡곡은 1910.1.29 강원도 통천과 합병됨)
○ 또, 백악산 말바위 전망대 근처 운동시설이 있는 곳에서 발견한 각자 성돌은 처음 ‘金 ◯’ 자로 두 번째 자 판독이 어려웠으나, 며칠 후 다시 현장 방문하여 해질 무렵 석양을 통해 재차 판독한 결과 ‘金浦’ (김포)자임을 알게 되어, 이 구간이 세종 때 경기도 지역 주민이 축조한 것임을 밝혀냈다.
○ 낙산 정상에서 혜화문 쪽으로 내려가는 지점에서 발견한 각자 성돌은 ‘◯仁’자로 첫자가 마모가 심해 ‘七’ 형태로 보였으나, 추적 조사결과 충남 서천군 비인면(庇仁)의 ‘庇’ 자의 일부임을 밝혀, 해당 구간이 세종 연간 충청도 지역 주민이 축조한 것임을 알게 되어, 600년 만에 각자 성돌의 실체가 빛을 발하게 되었다.
○ 인왕산 곡장 및 서남쪽 군초소 옆에서 발견한 각자 성돌은 ‘監役 沈之◯’ (감역 심지◯)로 마지막 자 판독이 불가하였으나, 승정원 일기 에서 ‘監役’ 과 ‘沈之’를 전수 조사한 결과와 비 오는 날 재차 현지 조사를 통해서 ‘監役 沈之憲’ (감역 심지헌) 임을 밝혔다. 沈之憲은 효종6년(1655년) 7월 15일자 승정원일기에서 ‘沈之憲 爲 繕工 假 監役’ (심지헌 위 선공 가 감역)을 검색하여 감역을 제수 받았음을 확인하였다.
○ 이렇게 발견한 각자 성돌은 앞으로 체계적 관리를 하기 위해 많은 사진과 위치 자료를 축적하였고, 향후에도 찾기 쉽도록 정확한 좌표를 측량하고, 도면화 작업을 마칠 예정이다.
< 한양도성 축성의 전 과정을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 계기 마련 >
□ 각자 성돌에는 완공년도, 책임자‧감독자의 성명, 축성구간만이 새겨져 있어, 축성시기와 규모, 그리고 보수한 원인 등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성돌의 내용으로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 조선시대 문헌에서 유사한 기록을 모두 발췌한 결과, 붕괴~착공~완공까지의 정확한 시기(연월일), 축성 규모, 보수한 원인 등까지 자세히 알 수 있게 되었다.
○ 그간 각자 성돌에 나오는 내용은 책임자‧감독자 성명, 축성구간 등 연구 및 정보가 적어, 정확한 축성 과정, 규모 및 위치를 짐작할 수 없었다. 이번 연구에서는 이러한 각자 성돌의 내용으로 조선시대 문헌과 부합되는 내용을 전부 수합하여 각자 성돌별로 정리하여 약 500페이지 규모의 자료를 만들게 되었다.
○ 조선시대 문헌에서 나오는 한양도성 축성에 관한 기록은 붕괴‧착공‧ 완성 단계별로 붕괴된 장소와 규모를 임금에게 보고한 내용이 있는 데, 이러한 내용을 근거로 전수 현장조사를 통해 문헌 기록과 현장이 일치하는 숙종 연간 12개, 순조 연간 35개 등 총 52개소를 발견하게 되었다.
○ 그동안 각자 성돌에 새겨진 내용만을 판독하는 단순한 연구에서 벗어나 축성의 전 과정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를 축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 크기 60cm 내‧외 성돌은‘숙종 연간’이 아닌‘순조 연간’임을 밝힘 >
□ 1931년 조선 총독부 조선사 편수위원이던 오다쇼고(小田省吾)가 가로, 세로 약 60cm의 성돌은 「숙종 연간」에 사용된 것으로 통설화 했다. 그러나, 이번 추적 조사결과 「숙종 연간」이 아닌 「순조 연간」으로 통설을 변경할 결정적 증거가 확보되었다.
○ 금번 연구에서는 각자 성돌을 토대로 우선 기록을 근거로 순조 때 축조된 구간 35개 전체와 숙종 때 축조된 구간 12개의 성돌 크기를 전수 비교‧조사한 결과, 60cm 내외 구간은 전부 「순조」 때 구간이고, 「숙종」 때 구간은 40~45cm 내외의 불규칙한 크기의 것으로 밝혀 졌다.
○ 기록에 따라 순조 4년(1804년)에 축조된 백악산 청운대 구간의 성돌을 조사한 결과 대부분 60×60cm 내외로 조사되었고,
○ 숙종 32년(1706년)에 축조된 중구 남대문로5가 SK빌딩 뒤편 성돌을 조사한 결과 48×48cm, 49×36cm, 43×45cm, 49×43cm, 39×47cm, 37×47cm 등으로 측정되어 숙종연간 성돌 크기인 가로×세로 60cm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이는 가공 및 운반기술이 후대로 갈수록 발달하여 성돌 크기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 이번 연구는 한양도성 각자성돌 연구의 첫걸음으로써 향후 보완 연구를 통해 오는 12월 ‘한양도성의 진정성 탐구’를 주제로 개최되는 ‘한양도성 학술회의’ 때 최종 발표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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