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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학인당과 휴암(休庵) 백인걸(白仁傑)

깜보입니다 2013. 9. 1. 11:38

학인당과 휴암(休庵) 백인걸(白仁傑)의

생애와 사상(백낙중의 선조)

 

학인당(學忍堂)

 

서울 북촌에 윤보선 고택이 있다면 전주한옥마을에는 학인당이 있다. 삼원당 뒤쪽에 위치한 학인당은 한옥마을에 있는 700여 채의 한옥 가운데 격식을 갖춰 지은지 100년된 대형 한옥이다. 조선 말, 한국 전통 건축기술을 전승받아 지은 건물로, 당시의 상류층 주택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학인당은 건축 당시에는 99칸집 2천평 규모의 대저택이었으나 지금은 대지 520평에 건물이 69평 정도다. 이 건물은 휴암 백인걸의 후손으로서 효자로 소문난 인재 백락중의 사후를 기리기 위해 지어졌다고 한다. 당시 일류 도편수나 목공 등 연인원 4,280명이 압록강, 오대산 등지의 목재를 사용해 2년 8개월에 걸쳐 건축했다고 전한다. 학인당의 솟을 대문에는 백낙중지려라는 현판을 걸었고 팔작지붕처리가 흥미롭다. 학인당은 70년대 용인민속촌에 이 집을 통째로 옮기기 위해 삼성그룹 이병철회장이 거액을 제시하며 두 차례나 팔기를 권유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또한 백범 김구선생이 묶은 곳으로도 유명하다. 전통문화체험장으로 개방된 학인당에는 최근 전통찻집 선다원이 문을 열었다. 학인당에서 차 한잔 여유와 휴식을 즐기며 학인당에 얽힌 이야기를 듣는 즐거움도 크다.

 

김구 선생이 머문 곳

 

전주한옥마을 안에 수많은 한옥이 있지만, 이곳을 대표하는 집은 근대 상류가옥인 학인당이다. 이 집은 인재(忍齊) 백낙중이 1908년에 지었다. 건축에 사용된 나무들은 모두 압록강, 오대산 등지에서 가져왔고, 동원된 도편수와 목공 등 인부의 수만도 4000명이 넘었다. 건축기간도 2년 6개월이나 걸렸으니 집을 짓는 동안 많은 사람의 관심이 쏠렸을 터이다. 게다가 이 집의 본채(전라북도민속자료 제8호)는 특이한 구조를 가졌다. 구한말 왕정이 붕괴하면서 궁중 건축양식을 도입했고, 실내공연장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천장을 2층 높이로 만들었다. 건물 안쪽의 모든 문을 옆으로 접어 열거나 들어 올릴 수 있어 용도에 따라 시야를 확보할 수 있도록 한 것도 재밌다. 덕분에 전주 최초의 공연장으로 사용되었으며 실제로 이곳에서 명창들의 공연이 자주 열렸다고 한다. 해방 이후에는 이곳에 백범 김구 선생과 해공 신익희 선생이 머물렀다고 하여 그들이 머물렀던 방에 ‘백범지실’ ‘해공지실’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학인당에는 볼거리도 많다. 솟을대문에 걸린 효자문과 본채 앞 정원에 있는 딴샘이라는 우물이다. 효자문은 고종임금이 3대를 이어 효행을 실천한 백낙중에게 벼슬을 내린 것을 기억하고자 그의 사후에 후손들이 세운 것이다. ‘효자(孝子) 승훈랑(承訓郎) 영릉참봉(英陵參奉) 수원(水原) 백낙중지려(白樂中之閭)’라 쓰인 현판의 내용이 이를 알 수 있게 한다. 현판의 글씨는 당시 명필인 김돈희(金敦熙)가 쓴 것이다.

 

 

본채 앞 정원에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딴샘이 있다. 예전에는 이 물을 길어 식수로 사용했지만, 지금은 물이 많지 않아 식수로 사용하지 않고 정원의 연못수로 사용하거나, 여름철 과일을 담가 시원하게 하는 용도로 사용한다. 우물의 가장자리까지 계단을 놓아 내려갈 수 있게 한 것이 특이하다.

 

교동에 있는 학인당(學忍堂)은 구한말(韓末) 전주의 만석꾼 부자였던 백(白)부자가 지은 집이다. 1905년에 시작해서 1908년에 완공한 99칸 저택 학인당은 보통 한옥이 아니다. 판소리 공연을 염두에 두고 지은 집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100여명가량의 청중이 모여 명창들의 판소리 공연을 관람할 수 있도록 집의 본채 구조를 설계했던 것이다.

그래서 본채 대청마루의 천장이 2층집 높이이다. 천장이 높으니까 소리가 울린다. 또한 공연장인 대청마루를 둘러싸고 있는 동서남북 사방의 문을 모두 철거할 수 있도록 설계하였다. 유사시에 보다 많은 사람이 관람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학인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오페라 극장이기도 하다.

집주인인 백부자는 장사를 해서 돈을 번 중인계층이었다. 어떻게 양반계층이 아닌 중인이 이처럼 큰 저택을 지을 수 있었을까? 그 배경에는 대원군과 고종의 허락이 있었다. 대원군이 돈 없고 배고팠던 낭인으로 전국을 유랑하던 시절 전주에 들렀을 때, 백부자가 극진한 대접을 하면서 깊은 인연을 맺었다. 나중에 대원군이 정권을 잡고 경복궁 중건을 할 때 백부자는 거액을 기부했다.

경복궁 중건 기금을 내놓으면서 백부자는 조선 왕실로부터 3가지 특혜를 받았다. 첫째는 큰 저택을 지을 수 있는 허락이었다. 둘째는 전라도에 근무하던 벼슬아치들이 임기를 끝내고 이임(離任)할 때 그 환송연을 할 수 있는 권한이었다. 그래서 "전라도에 부임하는 관리들의 인사권은 백부자가 가지고 있다"라는 소문이 나왔다. 셋째는 궁궐에서 필요한 물품을 납품하는 독점적 납품권을 갖는 것이었다.

조선 후기부터 전주에서 열렸던 대사습놀이는 당대의 명창(名唱)을 선발하는 판소리 백일장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는데, 1905년 을사늑약이 맺어지면서 관청 주도의 대사습놀이는 중단되었다. 그러자 전주의 부자들은 그 대안으로 민간주택에서 대사습놀이를 열기로 합의를 보았다. 1960년대 후반까지 학인당에는 수많은 명창이 들락거렸다. 학인당은 한국 판소리의 메카이었던 것이다.

 

 

백인걸- 백낙중의 선조

휴암(休庵)백인걸(白仁傑) 생애와 사상

 

봉산서원(蓬山書院)의 사액(賜額)을 청한 소(疏)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엎드려 생각하건데 우리나라는 은사(殷師)이래로 평소에 예의(禮儀)의 나라로 칭(稱)하나 그 도학(道學)을 상고 하건대 단적으로 지칭(指稱)할 만한 사람은 몇 사람이 없습니다.  려조(麗朝) 때 정몽주(鄭夢周)의 뒤로 호걸(豪傑)난 재주로써 곧장 정주(程朱)의 정맥(正脈)을 찾아서 한결같이 사문(斯文)으로서 자기의 임무(任務)로 삼고 탁월하게 백세(百世)의 유종(儒宗)이 된 자는 오직 옛날 유신(儒臣)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 한 사람 일 다름이며 그 때에 친히 그 학문(學問)을 받아서 서여(緖餘)를 떨어뜨리지 아니하고 죽음에 이르도록 추모(追慕)하며 사문(師門)의 일맥(一脈)을 전한 사람은 고(故) 충숙공(忠肅公) 참찬(參贊) 신(臣) 백인걸(白仁傑) 그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인걸(仁傑)은 나면서부터 특의하고 효우(孝友)가 출천(出天)하더니 조금 자라서 학문에 힘써 자립하고 개연(慨然)히 구도(求道)에 뜻을 두었습니다. 처음 대사성(大司成) 신(臣) 김식(金湜)을 좇아서 제생(諸生)들과 성균관(成均館)에서 강학(講學)할 때 성리학(性理學)이 아니면 입으로 말하지 않더니 그 학문(學問)이 더욱 나아가서는 스스로 스승을 얻어다 방을 꾸미고 거처(居處)하며 일언일동(一言一動)에 오직 광조(光祖)를 본받아 왔었고 광조(光祖)가 화(禍)를 입어 죽자 인걸(仁傑)은 지성(至誠)으로 몹시 슬퍼하였으니 군소배들이 광조(光祖)의 무리라 하여 빈척 배제할 뿐 아니라 인걸(仁傑) 역시(亦是)도 그 세상(世上)에 서고 싶지 아니하여서 벗과 사귀어 놀기를 사절하고 문(門)을 닫고 글을 읽었습니다. 그때에 사화(士禍)의 여파는 오히려 크게 변해서 [도학(道學)]의 두 글자는 출세를 위하여서 큰 금물(禁物)이 되었으나 인걸(仁傑)은 오히려 조금도 주저하지 아니하고 더욱 스스로 격앙하여서 행동(行動)거조가 사규(師規)를 잃지 아니했고 당금(黨禁)이 조금 완화해지자 비로소 유사(有司)를 좇아서 과거(科擧)에 합격(合格)하여 조정(朝廷)에 들어 갔었는데 이에 광조(光祖)가 조정(朝廷)에서 행(行)한 바로써 행(行)하고자 하며 비록 소인(小人)들의 여당(餘黨)이라도 웃고 힐책하지 아니했지만 오히려 뜻에도 두지 아니하였습니다. 을사(乙巳)의 화(禍)가 일어나 사류(士類)들의 어육(魚肉)은 장차 광조(光祖) 때보다 심(甚)함이 있게 되므로 비록 큰 선비나 대신(大臣)들도 오히려 숨을 멈추고 목을 움추리며 어찌할 바를 몰랐었으나 인걸(仁傑)은 오히려 분내어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쌍수(雙手)로서 홍류(洪流)를 막으려고 전정지하(電霆之下)에서 구사(九死)도 사양치 아니했으니 참으로 중류(衆流)가 쓰러져가는데 한 기중이 정정(亭亭)히 서 있는 자라고 할 것입니다. 의리(義理)를 취하고 죽음을 벗어나서 유리(流離)하며 곤경(困境)한 처지에 있었으나 오히려 태극도설(太極圖說).사서(四書).주역(周易) 및 정주(程朱)의 글을 외웠으며 이렇게 한 지 20년이 되도록 일찍이 폐하지 아니했으니 이도 또한 광조(光祖)의 가르침을 잊지 아니한 것입니다. 선묘(宣廟)가 즉위(卽位)하시고 장차 지치(至治)의 정치를 일으키시고 현준(賢俊)을 불러 거두시는데 조야(朝野)의 여론이 모두 인걸(仁傑)로써 제일을 꼽았음으로 선묘(宣廟)게서 불러들여 경연(經筵)에 놓아두시었고 몇십일 만에 교리(校理)로부터 뽑혀서 직제학(直提學)에 제수되었으며 또한 몇 달동안 올라가서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는데 위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오래함이 불가(不可)함을 진언(進言)하여 선묘(宣廟)께서 전단(專斷) 청정(聽政)을 하게 되시었습니다. 처음으로 진계(陳戒)의 사(辭)를 올릴 때도 역시 광조(光祖)가 중묘(中廟)에 고(告)]한 소이(所以)에서 벗어나지 아니했으니 그 말에 이르기를 [인주(人主)의 일심(一心)은 조정(朝廷)의 근본(根本)입니다. 군심(君心)이 바르면 한결같이 바르지 아니함이 없을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옛 성왕(聖王)은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하여서 그 근본(根本)을 세웠으니 이른바 정일집중(精一執中)이라 함이 곧 그 학(學)인 것이요 요순(堯舜) 이래(以來)의 서로 전(傳)하는 심법(心法)인 것이옵니다. 진실로 전하(殿下)께서는 정일(精一)의 도리(道理)를 체득(體得)하시고 국본(國本)을 세우시면 의표가 단정(端正)하여 그림자도 바른 것같이 군하(群下)가 법도로 삼어서 일심(一心)이 정백(精白)하여 크게 응하여 뜻을 같이 하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시었습니다. (슬프도다 비록 정주(程朱)가 다시 난다 해도 어찌 가히 이 말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선묘(宣廟)께서는 더욱 그 어짊을 아시고 또 일년이 못 되어서 올리어 대사헌(大司憲)을 시키며 말하시기를 [경(卿)의 충성(忠誠)은 가히 일월(日月)도 꿰뚫을 것이며 절의(節義)는 가히 빙상(氷霜)를 능가할 것이다. 군자(君子)가 세상에 나서 왕정(王廷)에 들추어 임금을 요순(堯舜)으로 만드는 것이 가할 것이다.]라고 하시니 인걸(仁傑)이 또한 세상에 없는 예우(禮遇)에 감격하여 아는 것은 말하지 아니함이 없고 말하면 다하지 아니함이 없었으니 대략(大略)은 [성경(聖敬)이 날로 발전함은 성학(聖學)을 면진(勉進)하는 근본이 된다.] 하시어 누누히 도학부진(道學不振)으로써 근심을 하시고 광조(光祖)를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고 송인수(宋麟壽) 등 모든 현인(賢人)의 원한을 신설해주실 것을 청하였으며 이황(李滉)을 불러서 대우할 것과 이이(李珥)?성혼(成渾) 등을 불러 쓰시어 사림(士林)을 풍동(風動)시기고 사문(斯文)을 진기(振起)시킬 것을 청하고 그외에 언론(言論)과 풍지(風旨)등 이루다 기록할 수 없으나 지성(至誠)으로 권권(眷眷)함이 오직 이에 있었습니다. 그가 한바는 위로는 광조(光祖)의 전통(傳統)을 이어받음이 이미 이와 같아서 그는 순수명백(純粹明白)하였고, 아래로는 후인(後人)을 열어 주는 공(功)이 또한 큼이 있으니 문성공(文成公) 신(臣) 이이(李珥)와 문간공(文簡公) 신(臣) 성혼(成渾) 같은 이가 모두 그 문인(門人)이었습니다. 비록 순수(純粹)한 스승이라고 이르지 못하더라도 그는 광조(光祖)의 미언(微言)과 지론(至論)을 참벌(斬伐)한 후에 공공연히 칭송(稱誦)하여 이신(二臣)으로 하여금 얻어 들어서 마침내 크게 되었으니 비하건대 귀산(龜山)과 예장(豫章)간은 것입니다. 비록 정주(程朱)와는 대소(大小)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으나 그가 위에서 이어받아 아래로 전하여 성도(聖道)를 더욱 밝혔으니 그 공은 가히 크다고 할 것입니다. 공변되이 생각해 보건대 그의 평생(平生)은 처음부터 끝까지 진실로 유학선정(儒學先正)의 종적(宗嫡)이요 후학(後學)들의 기둥과 들보라 할 것입니다. 살아서 공(功)이 사문(斯文)에 있으면 죽어서 반드시 조두(俎豆)의 향사(享祀)를 올림은 고금(古今)을 통하여 옳은 일이옵니다. 인걸(仁傑)은 중묘(中廟) 신축(辛丑)에 예조좌랑(禮曹佐郞)으로서 나가서 남평현감(南平縣監)을 지냈는데 하읍(下邑)이라고 싫어하지 아니하고 제일 먼저 학교(學校)를 일으켜서 선비를 양성함을 자기의 임무로 생각하고 사경(四境) 안에 서당(書堂)을 설치하고 수사(修士)를 가리어 선생(先生)으로 삼아 교도(敎導)를 주관케 하였으며 또한 창고(倉庫)의 쌀을 나누어 주어 배움을 도왔고 매달 그 서당(書堂)을 순회하며 그 학업(學業)을 고과(考課)하고 아동(兒童)들이 배운 구독(句讀)을 바르게 해주었으니 이는 실로 정명도(程明道)가 고을을 다스리던 여법(餘法) 이었습니다.  이러하므로 무지한 먼 시골 선비들도 진유(眞儒)의 풍도(風度)를 얻어들어 모두 향방(向方)을 알았으니 그 깊은 인애(仁愛)와 두터운 은택이 현(縣)에 있어서 가장 컸던 것입니다. 저 인걸(仁傑)의 정학연원(正學淵源)이라면 비록 다른 지방 먼 지경이라도 마땅히 신주(神主)를 모시고 제사(祭祀)드려야 하거늘 하물며 그가 벼슬살던 고을이겠습니까?

 

그러하므로 향중(鄕中)의 부노(父老)들이 의논하여 사우(祠宇)를 짓고 춘추(春秋)로 향사(享祀)를 올린지 여러해가 되었기에 오래되어 무너지게 되었으므로 지금 자시 중건(重建)하여 영구(永久)한 계책을 삼고자 하나 다만 사액(賜額)의 글이 없으면 유속(流俗)에 경(輕)한바 되어서 폐하여 무너짐도 불일(不日)간이 될 것입니다. 신(臣)은 가만히 듣자오니 성상(聖上)께서 임어(臨御)하신 이래로 유현(儒賢)을 붙잡는 법도를 숭상하시어 이르지 아니함이 없다 하온데 홀로 인걸(仁傑)의 사우(祠宇)에는 미침이 없아오니 이는 신(臣)등이 고루하여 임금님께 아뢰지 못한 죄(罪)가 아닌가 저어하오며 이제 감히 발을 싸매고 대궐에 이르러 외람되이 궁문(宮門)에서 부르짓고 엎드려 비노니 성명(聖明)하신 임금께서는 특별히 유사(有司)로 하여금 내리실 액호(額號)를 논의(論議)케 하시어 한 때의 이목(耳目)을 새롭게 하여 주신다면 다만 일현(一縣)의 다행(多幸)일 뿐 아니라 그것은 사문(斯文)의 홍폐에 있어서도 또한 관계(關係)가 없지 아니할 것이므로 신(臣) 등은 격절(激切)함을 이르지 못하고 간청함에 이르렀습니다.

[송자대전(宋子大全)]

출처 : 광주민학회
글쓴이 : 이민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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