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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명재 윤증(尹拯)의 생애와 사상

깜보입니다 2013. 9. 1. 12:13

윤증(尹拯)의 생애와 사상

 

윤증(尹拯, 1629년 ~ 1714년 1월 30일)은

조선 후기의 학자, 정치인, 사상가이며 당색은 서인, 소론의 영수이다. 윤선거(尹宣擧)의 아들이다. 서인 윤선거, 김집, 유계, 권시, 송시열의 문하생이다. 서인이 노론, 소론으로 분당할 때 소론의 영수가 된다.

 

유계, 김집(金集)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권시의 문하에서도 수학했으며, 김집의 추천으로 김집 사후 우암 송시열의 문인이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 윤선거의 묘비문 문제로 발생한 회니논쟁과 김익훈, 김석주의 역모 날조에 염증을 느껴 후일 노론이 된 주류파와 갈등하였으며, 아버지 윤선거의 비문 문제를 계기로 송시열과 절교한 후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효종 때 내시교관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현종때 여러 차례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다가 1682년 관계에 나가 판돈령부사(判敦寧府使)에 이르렀으나 사퇴하였다. 예론에 정통한 학자로 이름이 높았으나 1673년부터 아버지의 묘갈명(墓碣銘) 문제, 송시열 비난 서신의 전달 등으로 송시열과 절교하여 소론(少論)의 영수가 되었다. 1715년에는 아버지와 스승 유계의 공동 저서 <가례원류> 발문속에서 정호(鄭澔)로부터 비난을 받아 당쟁이 격화되어 소론이 거세당하고, 우의정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판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가 사망한다. 사후 좌의정에 증직되었으나 <가례원류> 문제로 후에 그의 관직도 추탈 당하였다가 1722년에 복구되었다.

 

학문 연구로 일생을 보냈으며, 그는 성리학 외에도 양명학과 실학사상을 접하고 연구하기도 했다. 자(字)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유봉(酉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편집] 생애[편집] 출생과 가계 배경

윤증은 1629년 한성부 정선방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윤황(尹煌)이고, 아버지는 윤선거(尹宣擧)이며, 어머니는 공주이씨(公州李氏)로 이장백(李長白)의 딸이다. 할머니는 창녕 성씨로 서인(西人)이자 성리학의 대학자 우계 성혼(成渾)의 딸로, 그는 성혼의 진외증손이었다. 그가 태어날 무렵 그의 본가는 충청남도 노성에 있었으므로, 노성 출신으로도 본다.

그의 집안은 일명 노성 윤씨라고도 부른다. 윤증의 고조인 윤돈이 처가가 있는 충청남도 노성에 처음 정착해 '노성 윤씨'라는 별명을 얻었다.

 

아버지 미촌 윤선거는 김장생의 아들인 김집의 제자로 송시열, 송준길과 동문수학한 친구였다. 이런 관계로 그는 송시열(宋時烈)·윤휴(尹)·박세채(朴世采) 등 당대의 명유들을 만날 수 있었다. 윤증은 어려서부터 서인 윤선거, 김집, 유계, 송준길(宋浚吉), 남인 권시, 서인 송시열의 문하에서 두루 수학했다.

 

[편집] 수학과 청소년기

호는 명재인데, 후일 논산군 이성 유봉(酉峰) 아래에 살았으므로 호를 '유봉'이라고도 했다.[2] 처음 아버지 윤선거와 유계(兪棨)에게서 수학하였다. 할아버지 윤황은 우계 성혼의 사위이자 문하생이었으며, 아버지 윤선거를 통해 성혼의 학맥을 계승하였으나 그 뒤 송준길의 문하에도 출입했고, 장인인 남인(南人) 탄옹 권시(權諰)와 신독재 김집(金集)에게 배웠다. 뒤에 스승 김집이 병으로 죽자 29세 때에는 김집의 권유로 김집의 수제자이자 당시 회천에 살고 있던 송시열(宋時烈)을 찾아가 사사했다. 〈주자대전 朱子大全〉을 배웠다.

스승의 한사람인 송시열

(그러나 정견 차이와 아버지 윤선거 비문 등으로 관계가 악화, 절교하게 된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에게 항복하는 장면

(삼전도비 부조상)후에 송시열에게도 사사했으며 송시열의 문하에서 특히 예론(禮論)에 정통한 학자로 이름났다. 후일 부친 윤선거(尹宣擧)의 비문 문제와 김익훈, 김석주의 역모 처리 문제, 정견의 차이 등으로 송시열과 크게 싸운 뒤 절교했다. 송시열 역시 그의 스승이었으므로 이를 놓고 노론이나 남인에서 그를 공격의 빌미가 되었다. 당색으로는 서인 가문 출신이면서도 한때 장인이며 남인인 권시의 문하에도 출입하며 수학했다.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 피난해있던 서인의 사대부와 부녀자들은 모두 자결을 택했고, 그의 어머니 공주이씨 역시 자결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윤선거는 혼자 피신해 있다가 살아서 나왔고, 이는 아들인 윤증에게도 멍에가 되어 비방의 대상이 되었다.

 

[편집] 정치 활동[편집] 학문 연구

그는 일찍이 김집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김집이 말하기를 송시열이 주자학에 정통하니 나중에 그에게 배우라고 함에 따라 윤증은 29세 되던 해에 송시열에게 사사하여 주자대전 등을 배웠다.[2] 윤증은 효종 말년에 학업과 행실이 뛰어나다는 명목으로 조정에 천거되어 내시교관(內侍敎官[2])에 제수되었다.

첫 스승 김집이 죽자 이후 송시열의 문하에 출입하며 성리학을 수학하였다. 아버지 윤선거는 송시열의 학문적 재주는 뛰어나지만 병통과 치우침이 강하므로 주의하라 당부하기도 하였다.

이후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심전력하여, 스승인 송시열, 권시 등을 찾아 학문을 담론하는 한편 황산서원(黃山書院)에서 주자서를 강학하는 등 벼슬보다는 주로 학문과 교육에 뜻을 두었다. 1663년(현종 4) 천거되어 내시교관이 되었으나 사퇴했다. 1664년(현종 5년) 다시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제수된 것을 시작으로 세자익위사 익찬(翊贊), 집의(執義) 등을 제수받았으나 모두 거절하고 출사하지 않았다.

 

[편집] 정계 입문과 예송 논쟁

윤휴 -그는 1, 2차 예송논쟁 당시 남인 강경파에 섰던 인물로, 송시열로부터 사문난적으로 몰려 사형 당하였다.

윤증 고택

(그는 이곳에서 독서와 후학 양성에 매진하였다.)

1669년 아버지 윤선거가 죽자 남인계 인사들도 윤선거의 빈소를 찾아와 조문했다. 부친상 때 윤증은 남인 윤휴(尹鑴)의 조문을 받았는데 이 사실을 전해들은 송시열은 이를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윤증은 아버지 윤선거가 남긴 편지 중 송시열에게 허목, 윤휴에게 화해의 손길을 먼저 내밀라는 권고를 적은 편지를 스승 송시열에게 전달하였다. 군사부일체의 의리를 확신한 그는 아버지와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스승 간에 비밀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신념하에 송시열에게 아버지 윤선거가 남긴 편지를 전달했다. 윤증의 뜻을 높이 평가한 송시열은 처음에 윤선거의 편지를 읽고도 불쾌감을 숨겼다. 그러나 뒤늦게 그가 윤휴의 조문을 받은 것을 알게 되자 심히 불쾌해 하였다.

이후 공조랑·지평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674년(현종 15) 효종비 인선왕후가 죽자 발생한 2차 예송 논쟁에서 남인이 승리하면서 송시열, 김수항 등은 삭탈관작당하고 유배되었다. 그러나 이때 윤증은 남인들과의 친분관계로 불이익을 받지 않았다.

숙종 초에 송시열 일파가 남인에게 화를 입었을 때 윤증은 그의 장인 권시가 남인인 것과 아버지 윤선거를 비호, 두둔한 윤휴 등과의 관계 등 남인과의 인연관계로 처벌을 면한 일로 해서 더욱 송시열의 의심을 받게 되었다. 숙종 즉위 이후에도 호조참의·대사헌·우참찬·좌찬성·우의정·판돈녕부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했다.

 

[편집] 회니 논쟁. 회니시비

그 뒤 아버지 윤선거의 묘갈명(墓碣名)을 송시열에게 부탁했는데 송시열은 병자호란 당시 친구와 친척, 부인이 모두 순절했는데 윤선거만 홀로 살아서 나온 일을 두고 윤선거를 경멸하고 멀리했다. 송시열이 지은 윤선거의 묘비명 내용 중에 자신은 덕이 부족하여 그 뜻(윤선거가 피신한 뜻)을 알지 못하겠다며 야유하는 뜻을 적자 윤증은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시정이나 삭제를 요구했으나 송시열은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이 일로 감정이 상한 윤증이 송시열을 비판함으로써 사제 간의 의리가 끊어졌으며,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갈등은 송시열의 집이 회덕(懷德)에, 윤증의 집은 이산(泥山)에 있었던 연유로 '회니(懷泥)의 반목' '회니논쟁' 또는 '회니의 사건'이라 부른다. 이러한 개인적 감정과 함께, 남인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역모를 날조한 김익훈, 김석주에 대한 처벌문제와, 남인에 대한 처벌문제로 서인이 강경파와 온건파로 분리될 때 그는 소론에 가담하였으며, 이후 그를 지지하는 사류(士類)들에 의해 소론의 영수로 추대되었다.

 

1674년 숙종 즉위 직후 사헌부집의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퇴했다. 숙종 초에 송시열 일파가 남인에게 화를 입었을 때 윤증이 남인과의 인연관계로 화를 면하자 송시열은 더욱 그를 의심했다. 이후 송시열은 그를 의심했고, 서인 역시 그를 의심하였다. 그는 이를 해명하였으나 서인들은 그의 해명을 믿어주지 않았다.

 

그는 송시열을 "대인의 의와 소인의 이익을 함께 행하고, 왕도와 패도를 같이 쓴다"(義利雙行王覇竝用)고 비난했으며, 왕조실록을 기록하는 사국(史局)의 사관들에게도 친히 편지를 보내어 아버지의 일을 변호하고, 다시 이이(李珥)가 젊어서 불문에 들었던 일을 끌어서 이이는 입산의 잘못이 있으나 자기 아버지는 처음부터 죽어야 될 의리가 없다고 했다. 이이가 입산한 일을 지적하자 서인계 성균관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 그가 선현을 모독했다고 그를 성토함으로써 조정에서 시비가 크게 일어났다.[3] 송시열이 변명의 상소를 올려 죄가 전부 자신에게 있다며 자신의 부덕이라 했으나, 숙종은 듣지 않고 윤증을 전과 같이 대우하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이후 서인, 남인계 사림 학자들과 간관(諫官)들 사이에 비난과 변명의 상소가 계속되었다.

 

[편집] 송시열, 윤휴와의 갈등

윤선거가 죽자 그의 아들이자 우암 송시열의 제자인 윤증은 묘지명을 친히 그에게 부탁하였다. 그러나 송시열은 윤선거의 피난을 못마땅히 여기며 비꼬았고 이는 회니시비의 원인이 된다. 한편 그는 생전의 윤선거에게 윤휴와 절교할 것을 여러번 권고하였다. 그러나 윤선거는 윤휴와 계속 만났고, 윤휴는 나중에 아버지를 추도하는 제문이라며 윤증에게 추도사를 보낸다.

송시열과의 관계상 받지 않으려다 받았지만 내용은 윤선거가 우유부단하다고 조롱하는 내용이었으므로 윤증은 윤휴의 추도사를 받고 탄식했다 한다. 이후 윤휴에게 절교를 선언하고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윤휴가 허목 등과 함께 장희빈의 편을 들게 되자 그를 사악한 인물이라며 비난하였다.

 

[편집] 송시열 등과의 갈등

외척 김석주와 김익훈[4] 등이 역모를 날조하여, 남인을 일망타진할 목적으로 허새의 옥사를 조작하자 그는 김익훈의 처벌을 주장하고, 이어 남인에 대한 사과를 주장하였다.

남계 박세채‎

 

1680년(숙종 6) 학덕으로 천거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어 김수항(金壽恒)·민정중(閔鼎重) 등이 윤증에게 경연에 나오도록 청하고, 박세채(朴世采)·조지겸(趙持謙) 등이 거듭 출사를 권했으나 역시 사양하였다. 이때 그는 송시열, 김석주(金錫胄), 김익훈, 김만기(金萬基), 민정중, 민유중 등의 세도가 바뀌어야 하고, 외척이 정치에 간섭하지 않아야 되며, 남인의 역모를 날조한 김익훈, 김석주 등을 처벌해야 되며, 역모를 날조한 것에 대한 서인측의 사과와 서인과 남인의 원한이 풀어져야만 출사할 수 있다고 했다. 이 일로 한때 송시열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동문 최신(崔愼)에게 편지를 주고 받았으나, 최신이 자신의 스승 송시열의 죄없음을 변명한다는 핑계로 윤증이 보낸 사서(私書)를 공개하면서 그가 스승을 배반했다고 했으며,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한편 그를 천거한 김수항, 민정중 등도 윤증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스승을 배신하고 송시열을 헐뜯었다고 비난했다. 1680년 다시 사헌부집의에 임명되었다가, 그해 성균관사업(司業)이 되었다. 그해 말 다시 사헌부집의가 되었다.

1682년 호조참의를 거쳐 1683년 행 호군으로 전임되었다가 사직하였으나 다시 한성부우윤이 되었다.

 

[편집] 생애 후반[편집] 사직과 은둔

경신환국(庚申換局) 후 남인을 처벌하는 데 있어서 온건론을 주장하는 소론의 영수가 되어 강경 처벌을 주장하는 송시열의 노론과 싸웠다. 1683년(숙종 9년) 임금의 부름으로 과천까지 왔으나 나량좌의 집에서 박세채에게 3대 명분론을 제시하고 귀향하였다. 이후에도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등에 제수되었지만 역시 나아가지 않았으며 후학 양성과 교육에 힘을 쏟았다.

1684년 다시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나 고사하고 나가지 않았다.

1694년의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각했을 때는 이와 같은 점이 참작되어 처벌을 면할수 있었다. 그러나 인현왕후 폐출에 심히 분개하였으며, 갑술옥사 때는 남인에 대한 온건론이나 화합론을 거둔다. 그는 출사하지는 않았으나 소론의 영수로서 막후에서 소론계열을 지원하였다. 1695년 의정부우참찬을 거쳐 1701년 의정부좌찬성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였다.

 

[편집] 권상하, 노론과의 갈등

동문이자 그의 정적인 수암 권상하

권상하는 특히 송시열을 공격한 회니시비의 주인공인 동문 윤증에게 적대적이었다. 1715년 《가례원류》의 저작권을 둘러싸고 윤선거(尹宣擧)와 유계(兪棨)의 공저였으나 윤선거의 아들 윤증과 유계의 손자 유상기 사이에 각자 자신의 조상이 단독으로 쓴 책이라며 저작자 논쟁을 일으키자, 권상하는 서문을 써주면서 유계의 저술이라고 기술하여 소론의 영수 윤증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그러자 권상하는 윤증이 스승을 배신(배사)하였다며 그를 공격하였다.

회니시비 이후 윤증을 공격했고 부정적으로 평가하던 권상하는 가례원류 사건 이후로 윤증과 원수가 된다.

 

그뒤 송시열의 비문을 찬하면서 송시열이 화를 당한 것은 "윤증이 (사사로운 마음으로) 윤휴(尹鑴), 허목의 무리와 함께 조작한 것”이라는 내용을 비문에 기록하여 소론계 유생 유규(柳奎) 등 8백 여명의 성균관 소론계 유생들에게 비판을 받고 사간원대사간 이관명(李觀命), 홍문관수찬 어유구(魚有龜[5]) 등 소론 측으로부터 비문을 수정하라는 항의를 당하였으나 권상하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노론에서는 그를 스승을 배신한 자로 몰아 계속 공격을 가하였다.

 

[편집] 최후

윤증그의 문하에서는 최석문(崔錫文), 어유구, 어유봉, 이정걸(李廷傑), 양득중 등이 배출되었고, 훗날의 실학자 유수원 역시 그의 문하생에게서 글을 배웠다. 만년에는 성리학에 이의를 품고 양명학을 연구하던 정제두(鄭齊斗)와 각별한 관계를 가졌다. 동료 박세채의 제자인 정제두는 한때 윤증의 문하에도 출입했는데, 이후 그는 윤증의 문하를 떠난 뒤에도 여러 차례 서한을 주고받으며 토론, 교류하였다.

 

그 뒤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右議政)에 제수되었다. 1710년 판중추부사에 제수되어 한성부에 입경하여 사은숙배한뒤 다시 고향 노성으로 내려갔고 1714년 1월 30일 충청남도 논산군 노성에서 병으로 사망한다. 사망당시 그의 나이 86세였다. 그가 죽자 숙종 임금은 직접 하교를 내려 애도했다.

윤 판부사는 산림에서 덕을 길러 일직이 중망(重望)이 있었으니, 과인이 존숭하여 신임함과 사림이 존경하고 따름이 어떠했겠는가? 정승에 오름에 미쳐 돈소함이 더욱 간절했지만 다만 과인의 정성이 부족하여 멀리 떠나려는 마음을 돌리지 못했으니, 결연한 생각이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그런데 한 질병이 고질이 되어 갑자기 흉음이 이를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숙종은 그의 부고 후 조회를 파하여 애도하였으며 친히 조시(弔詩)를 지어 보냈고, 2300여 명의 문상객이 방문했다 한다. 저서로 《명재유고》, 《명재의례문답 (明齋疑禮問答)》, 《명재유서》 등이 있다.

 

[편집] 사후

1723년(경종 3년) 좌의정에 증직되고 그해 문성(文成)의 시호가 내려졌다. 그의 사후 노론과 소론은 희빈 장씨 소생 세자의 인정 문제 등으로 인해 계속 갈등하였고, 1715년 유계가 지은 〈가례원류 家禮源流〉의 발문에 정호(鄭澔)가 그를 비난한 것을 계기로 당쟁이 격화, 소론 일파가 실각, 거세되면서 그는 1717년 아버지 윤선거의 증직과 함께 관작을 모두 추탈 당했으나, 경종 즉위 후 소론이 집권하면서 1722년(경종 2) 소론계 유생 김수구(金壽龜, 황욱(黃昱) 등의 상소에 의해 복관되었다. 충청남도 홍주의 용계서원(龍溪書院), 노성의 노강서원(魯岡書院), 전남 영광 용암서원(龍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1776년 5월 정조 때 왕명으로 삭탈관직 되었다가 1782년 회복된다. 이후 계속 그와 그의 아버지 윤선거의 관작을 추탈하라는 상소가 고종 때까지 계속되었다.

 

[편집] 저서《명재유고》

《명재의례문답 (明齋疑禮問答)》

《명재유서》

 

[편집] 평가와 비판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측은 현실과의 일정한 타협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는 데 최우선의 의미를 두었던 것이고, 윤증을 내세운 소론측은 현실과의 타협을 거부하며 명분을 고수하려 했던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아버지 윤선거의 비문 문제로 스승인 송시열과 감정 대립을 벌인 것에 대한 비판도 있다.

 

[편집] 기타

김익훈에 의해 날조된 허새의 옥사에 관련, 그는 노론, 소론으로 분당하기 이전에 이미 같은 서인당원이었던 김익훈, 김석주 등을 강경하게 처벌하고 남인들의 원한을 풀어주어야 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당론에 의해 묵살당하고 말았다.

 

[편집] 노론, 소론 분당의 원인

윤증의 송시열과의 절교 선언은 배사(背師)문제로 확산되어 의리·명분의 껍데기를 쓰고 노론·소론 간의 격렬한 논란 거리가 되었다. 주자도통주의(朱子道統主義)에 입각한 철저한 유교적 도덕정치를 내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송시열은 훈척인 김익훈(金益勳), 김석주 등을 옹호함으로 됨으로써 명분을 잃게 되었고, 같은 서인이면서도 김석주, 김익훈을 처벌할 것을 주장하여 논란이 되었다.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측은 현실과의 일정한 타협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는 데 최우선의 의미를 두었던 것이고, 윤증을 내세운 소론측은 현실과의 타협을 거부하며 명분을 고수하려 하였다.

또한 송시열이 강화도에서 혼자 피신한 윤선거를 평소 경멸하다가 비문에서 그를 비방하는 내용에 윤증의 감정이 상함으로써 송시열-윤증간의 관계도 함께 악화되었다.

 

[편집] 송시열과의 관계

송시열(宋時烈[7])과는 사적으로도 인척관계였다. 송시열은 윤증의 아버지인 윤선거와 개인적으로 친구였다. 그러나 병자호란 당시 윤선거 혼자 빠져나온 강화도 사건을 계기로 윤선거를 경멸하면서 윤선거와의 관계가 멀어진다. 이는 윤증과의 관계 악화로까지 이어져 회니논쟁과 노론, 소론 분당의 원인이 된다.

 

윤증은 송시열의 제자였고, 윤선거는 송시열의 어릴 적부터 친구였다. 그런데 윤선거의 할아버지 윤창세(尹昌世)는 윤황(尹煌)과 윤전(尹烇) 형제와 딸 1명을 두었는데, 윤창세의 사위인 은진송씨 송희조(宋熙祚)는 송시열의 5촌 당숙이 된다. 또, 윤창세의 아들 윤전의 딸이 사촌 형 송시형(宋時瑩)과 결혼한다. 송시열의 사촌 형수는 윤선거의 사촌 누이가 되고, 송시열의 당숙모는 윤선거의 고모였다.

윤황(尹煌)은 윤문거(尹文擧)와 윤선거 형제를 두는데, 윤문거의 아들 윤박(尹搏[8])이 송시열의 딸과 결혼하였다. 윤선거의 손자이자 윤증의 아들 윤행교(尹行敎)는 다시 은진송씨 송기후(宋基厚)의 딸과 결혼하는데, 송기후는 송시열의 5촌 조카이자, 사촌동생 송시염(宋時琰)의 아들이다.

 

[편집] 사상과 신념

밖으로는 병자호란 이후 야기된 국제관계의 변화에 따른 숭명의리(송시열)와 대청실리외교문제(윤증)의 대립이었고, 양난 이후의 사회변동과 경제적 곤란은 주자학적 의리론과 명분론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역사적 명제를 제기시켰다.

 

[편집] 실학에 대한 평가

그는 성리학자를 자처했고 양명학을 이단이라 규정했으나, 실학 사상에는 후한 평가를 주었다. 그는 실학의 첫 세대 학자인 유형원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유형원은 실학자이면서도 남인이었다.

반계 유형원과 동시대의 인물로 ‘반계수록’을 읽고 감탄해마지 않았던 학자로는 소론계의 대학자 명재(明齋) 윤증(尹拯:1629~1714)과 그의 뛰어난 제자 덕촌(德村) 양득중(梁得中:1665~1742)이었다.[9] 재야 학자로서 학덕으로 추앙받아 정승의 지위에까지 오른 분이 윤증이고, 학문적 역량으로 천거받아 은일 승지에까지 오른 분이 양득중이다. 이들 스승과 제자가 최초로 ‘반계수록’의 진가를 알아주어 끝내는 세상에 공간(公刊)되는 기회를 맞게 되었다. 윤증은 반계보다 7세 연하로, 83세이던 1711년에 ‘반계수록’을 읽고 크게 감동받고 책의 발문을 썼으니 반계가 타계한 38년 뒤의 일이었다.

“‘수록’이라는 책은 고 처사(處士) 유형원군이 지은 책이다. 그 글을 읽어보면 그 규모의 큼과 재식(才識)의 높음을 상상할 수 있다.… 세상을 경륜할 업무에 뜻이 있는 사람이 채택하여 실행할 수만 있다면 그대가 저술했던 공로는 그때에야 제대로 나타날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사라져버릴 이치가 있겠는가”라고 하여 불멸의 저서가 될 것을 이미 윤증은 예언하고 있었다. 활용할 임자만 만나면 그 책은 천하국가를 다스릴 훌륭한 저서라고 평가를 내린 것이다.[9] 그는 유형원의 책을 애독하여 그의 저서를 구하여 집에 두고 읽어보았다.

 

윤증에게서 책을 빌려 읽어본 제자 양득중은 더 감탄한 나머지 임금에게 상소하여 책의 간행을 권하였다. 1741년 영조17년의 일인데, “근세의 선비 유형원이 법제를 강구하여 찬연스럽게 갖추어놓았습니다. 전제(田制)로부터 시작하여 교육문제, 관리등용문제, 관직·봉급·군사제도에 이르기까지의 세세한 것을 모두 거론하여 털끝 하나인들 빠뜨리지 않았습니다”라고 책의 가치를 나열하여 나라를 건질 계책으로 활용하기를 주장하였다. 이래서 반계가 타계한 97년 뒤인 1770년에 책은 간행될 수 있었다.

 

[편집] 학문에 대한 관점

그는 성리학자였고, 양명학에 대해서는 이단으로 규정하였다. 송시열과는 사이가 갈라졌지만 윤휴나 허목은 끔찍하게 여기고 기피하고 멀리하였다. 윤휴가 아버지 윤선거의 제문으로 보낸 조롱 역시 윤휴나 허목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갖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출처 : 광주민학회
글쓴이 : 이민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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