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e이야기

광해

깜보입니다 2015. 9. 15. 14:58

칠월 초하룻날이여
칠월 초하룻날이여
대왕 어붕하신날이여
가물동도 비오람서라
제주에서 불리는 이 민요는 제주도에 유배를 갔다가 7월 1일에 사망한 광해군의 원혼이 내리는 비라고하여 광해우라 불리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조선의 임금들에 대한 평가는 대분분의 경우 커다란 차이를 보이는 경우가 드문데, 유독 광해군에 관해서 만은 평가가 극과 극에 가깝습니다.

내가 평가하기보다는 백과사전 두곳의 글을 올려봅니다.

그런데 이글을 올리는 이유는 며칠 전에 금곡에 있는 광해군묘에 다녀왔기 때문입니다. 아니 못갔다고 표현을 해야 맞나요?
경춘선 금곡역에서 내려 버스정류장에서 한참 기다렸다 64번 마을버스를 타고 광해군묘 입구에서 내려 가파른 산길 700미터를 갔더니 입구 철책에 자물통이 걸려있었습니다.


광해군光海君
시대 조선    유형 인물     출생 1575년    사망 1641년

의인왕후 박씨에게서 소생이 없자, 공빈 김씨 소생의 제1왕자 임해군 진(臨海君珒)을 세자로 삼으려 하였다. 그러나 사람됨이 인륜을 저버리고 난포하다고 하여 보류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피난지 평양에서 서둘러 세자에 책봉되었다.

선조와 함께 의주로 가는 길에 영변에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분조(分朝)를 위한 국사권섭(國事權攝)의 권한을 위임받았다. 그 뒤 7개월 동안 강원·함경도 등지에서 의병 모집 등 분조 활동을 하다가 돌아와 행재소(行在所 : 임금이 멀리 거둥하여 임시로 머물어 있는 곳)에 합류하였다.

서울이 수복되고 명나라의 요청에 따라 조선의 방위 체계를 위해 군무사(軍務司)가 설치되자 이에 관한 업무를 주관하였다. 또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전라도에서 모병·군량 조달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594년 윤근수를 파견해 세자 책봉을 명나라에 주청했으나, 장자인 임해군이 있다 하여 거절당하였다.

1608년 선조가 죽자 왕위에 오르고 이듬 해 제15대 왕으로 책봉되었다. 이에 앞서 1606년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 김씨에게서 영창대군이 탄생하였다.

광해군이 서자이며 둘째아들이라는 이유로 영창대군을 후사로 삼을 것을 주장하는 소북(小北)과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大北) 사이에 붕쟁이 확대되었다.

1608년 선조가 병이 위독하자 그에게 선위(禪位)하는 교서를 내렸으나 소북파의 유영경이 이를 감추었다가 대북파의 정인홍 등에 의해 음모가 밝혀져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즉위한 후, 임해군을 교동(喬洞)에 유배하고 유영경을 사사(賜死)하였다.

당쟁의 폐해를 막기 위해 이원익을 등용하고 초당파적으로 정국을 운영하려 했으나 대북파의 계략에 빠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611년(광해군 3) 이언적·이황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한 정인홍이 성균관 유생들에 의해 청금록(靑衿錄 : 儒籍)에서 삭제당하자 유생들을 모조리 퇴관시켰다.

이듬 해에는 김직재의 무옥(誣獄)으로 100여 인의 소북파를 처단했으며, 1613년 조령에서 잡힌 강도 박응서 등이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과 역모를 꾀하려 했다는 허위 진술에 따라 김제남을 사사하였다. 또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삼아 강화에 위리안치했다가 이듬 해 살해하였다.

1615년 대북파의 무고로 능창군 전의 추대 사건에 연루된 신경희 등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1618년 이이첨 등의 폐모론에 따라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켰다. 이와 같은 실정은 대북파의 당론에 의한 책동으로 빚어진 일이었다.

전란으로 인한 전화(戰禍)를 복구하는 데 과단성 있는 정책을 펴기도 하였다. 1608년 선혜청을 두어 경기도에 대동법을 실시하고, 1611년 양전(量田)을 실시해 경작지를 넓혀 재원을 확보하였다.

선조 말에 시역한 창덕궁을 그 원년에 준공하고 1619년에 경덕궁, 1621년에 인경궁을 중건하였다.

이 무렵 만주에서 여진족이 세력을 확장해 1616년 후금을 건국하였다. 후금의 강성에 대한 대비책으로 대포를 주조하고, 평안감사에 박엽, 만포첨사에 정충신을 임명해 국방을 강화하는 한편, 명나라의 원병 요청에 따라 강홍립에게 1만여 명을 주어 명나라와 연합하였다.

그러나 부차(富車)싸움에서 패한 뒤 후금에 투항하게 하여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 능란한 양면 외교 솜씨를 보였다. 또한, 1609년에는 일본과 일본송사약조를 체결하고 임진왜란 후 중단되었던 외교를 재개했으며, 1617년 오윤겸 등을 회답사로 일본에 파견하였다.

병화로 소실된 서적의 간행에도 노력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용비어천가≫·≪동국신속삼강행실≫ 등을 다시 간행하고, ≪국조보감≫·≪선조실록≫을 편찬했으며, 적상산성(赤裳山城)에 사고를 설치하였다.

한편, 허균의 <홍길동전>, 허준의 ≪동의보감≫ 등의 저술도 이 때 나왔다. 외래 문물로는 담배가 1616년에 류큐(琉球)로부터 들어와 크게 보급되었다.

그의 재위 15년간은 대북파가 정권을 독점하였다. 때문에 이에 불만을 품은 서인 김류·이귀·김자점 등이 일으킨 인조 반정으로 폐위되었다. 광해군으로 강등되어 강화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제주도에 이배되었다.

세자로 있을 무렵부터 폐위될 때까지 성실하고 과단성 있게 정사를 처리했지만,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대북파의 장막에 의해 판단이 흐려졌다. 또한 인재 기용에도 파당성이 두드러져 반대파의 질시와 보복심을 자극하게 되었다.

뒷날 인조반정을 정당화하기 위한 책략과 명분에 의해 패륜적인 혼군(昏君)으로 규정되었지만, 실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때문에 같은 반정에 의해 희생된 연산군과는 성격을 달리해야 한다.
이상은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광해군은 양위 및 폐위로 묘호가 추숭되지 않았던 4인의 조선 국왕 중 한 임금이기도 하다. 다른 세 명은 2대 공정왕, 6대 노산군, 10대 연산군이다. 다만 공정왕과 노산군은 숙종 대에 들어서 각각 정종과 단종으로 추숭되었으므로 결국에는 연산군과 같이 둘 밖에 남지 않았다. 더불어 광해군은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연산군과 같이 실록이 아닌 일기의 형식으로 그들에 대한 기록이 실린 단 둘 뿐인 임금이다. 이런 점과 더불어 치세의 공과 과가 역대 국왕들 중에서도 가장 극명하여 그만큼 평가가 극단성을 띠기도 하는데, 일방적인 매도와 저평가와 이에 반박하는 재평가가 반복되어 광해군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그야말로 양극으로 극명하게 나뉜다. 광해군에 대한 뭇 사람들의 인식을 설명하면 그를 칭찬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는 비운의 군주 또는 조선의 희망, 반면에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는 희대의 거품이 많이 꼈던 군주다

묘호와는 별도로, 광해군은 재위 도중에 따로 존호를 받은 바가 있었다. 체천흥운준덕홍공신성영숙흠문인무서륜입기명성광렬융봉현보무정중희예철장의장헌순정건의수정창도숭업대왕(體天興運俊德弘功神聖英肅欽文仁武敍倫立紀明誠光烈隆奉顯保懋定重熙睿哲莊毅章憲順靖建義守正彰道崇業大王). 이것이 그에게 주어진 시호와 무관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조선 역대 국왕의 존호 중에서도 압도적인 길이이다.

임진왜란이 벌어지자, 선조는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 유능한 왕자를 세자로 삼아야겠다는 결단을 내려 둘째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하였다. 당시 청년시절의 광해군의 활약은 그에 대한 평가의 호오와 별개로 조선왕조 역사상 그리 많지 않은 노블리스 오블리주가 실천된 사례로써 뭇 사람들이 그를 긍정적으로 인정하는 시기였다. 조선의 역사를 통틀어 조선의 창건자인 태조 이성계를 따라 전쟁터에 나갔던 정종, 이방과를 제외한다면, 외적과의 전면전에 직접 뛰어들어 맞서 싸운 경험이 있는 국왕은 광해군이 유일하다.


선조의 사망에 허준과 광해군이 관여했다는 독살설 음모론을 미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의 주장에 대한 근거를 열거해보면, 우선 선조가 의외로 건강했는데도 불구하고 돌연사했으며, 당시에 어의였던 허준이 광해군의 비호로 인하여 그에게 내려졌던 형벌이 귀양에서 그쳤다는 점, 심지어는 북인의 신하들도 허준에게 더한 중벌을 내려야 한다는 상소를 내렸으나 광해군은 이를 모두 묵살했다는 점, 이후 광해군의 전폭적인 지원아래에 허준은 동의보감을 완성했다는 점들이다.

그러나 독살설과 관계없이 광해군이 허준에게 호의를 보일 만했건 점은 광해군이 왕자였을 때 두창에 걸려 사경을 헤매던 와중에 자원하여 치료를 해주고 마침내 완쾌시킨 사람이 허준이었다. 허준은 그 공로로 당상관에 오른 적도 있었는데, 실록에서도 이와 관련하여 광해군 치료에 대한 포상이 너무 과하다고 신하들이 따지는 대목이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왕이 죽었다고 무조건 어의들을 때려잡듯이 벌을 주고 귀양을 보낸 것은 절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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