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봄이 거기 고여 있었다. 굽이굽이 무등 자락엔 아직 산벚꽃이 한창이다.
그 찬란한 길에 스스로를 유배 보냈다.
그 찬란한 길에 스스로를 유배 보냈다.
‘유배지’라는 단어 밑바닥엔 옅은 낭만의 정조가 맴돈다. 유폐된 작은 처소 한 가운데에는 매일 밤 글줄이나 끼적이다 잠들었을 이들의 가련함이 돌서렁처럼 흩어져 있지만, 어느 귀퉁이론 고립감이 가져온 여유와 홀가분함도 스멀거린다. 지긋지긋한 속세와 영영 연을 끊을 수 있다니, 그 얼마나 산뜻한 생활일까. 사는 날들이 고될 때마다 유배 가고 싶다, 누가 좀 귀양 보내줬으면 좋겠다며 철없는 노래를 불러댄 건 그래서다. 유난히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던 올봄, 스스로를 유배 보내기로 했다. 적당한 장소를 헤아리다 번뜩 떠오른 곳이있어 곧장 길 떠날 채비를 했다.
물 많고 돌 많은 고장 화순. 투명한 물빛이 햇살에 흔들린다.
유배길 찬가
목적지는 전라남도 화순군. 이곳은 크고 작은 산들이 켜켜이 양장구곡을 이룬고장이다. 유배지의 지형적 조건은 벌써 갖추고도 남는다. 찾아가는 길을 그리는 것만도 벌써 지난하다. 서울서 출발하면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대전회덕 나들목에서 호남고속도로로 접어든 뒤 광주 너릿재터널을 빠져나와서야 겨우 화순에 닿는데, 무려 4시간 30분이 걸린다(이는 KTX로 부산을 왕복할 수 있는 시간이다). 역사적인 명분도 충분하다. 이곳엔 이미 앞서 유배 온 이들이있다. 첫 번째 이름은 정암 조광조. 중종 때 사림을 대표하는 인물로 대사헌의 자리까지 올랐으나, 기묘사화를 구실로 이곳에 유배된 끝에 사약을 받고 말았다. 정암의 적려유허비는 화순군 능주면에 있다. 두 번째는 김삿갓이라 불리는 난고 김병연이다. 역적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산천을 떠돌던 그는 삶의 마지막을 화순에서 보내기로 한다. 이곳에서의 영원한 유배를 자처한 셈이랄까. 동복면 구암마을 창원 정씨 댁 사랑채에서 수년을 머물다가 끝내 그곳에 묻혔다. 3년 후 그의 후손이 영월로 이장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봄날의 유배지로 화순만큼 아름다운 곳이 있을까? 좋은 건 남몰래 누리고픈 인간의 본성과 좋은 것만 골라 만방에 알려야 하는 에디터의 숙명 사이에서 매달 머리를 쥐어뜯는 자에게 화순은, 속내를 드러내자면, 이제껏 철저히 전자의 욕망으로 품어온 여행지다. 광주, 보성, 구례, 나주까지 쟁쟁한 이웃 도시 사이에서 짐짓 겸손한 모양으로 존재감을 감췄지만, 외지 사람들은 잘 모르는 온갖 비경이 바로 이곳에 집결해 있다.
먼저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운주사의 천불천탑. 통일신라 말 도선국사는 배의 지형을 가진 이곳에 돛대와 사공을 상징하는 여러 개의 불탑과 불상을 세우고 사찰 이름으로 ‘구름 운雲’, ‘배 주舟’자를 붙였다. 언덕 위의 거대한 와불이 특히 유명한데, 불상을 만들던 석수장이들이 동자승의 “꼬끼오” 소리에 놀라 돌아간 탓에 누운 채로 남게 됐다는 전설이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인돌유적도 이곳에 있다. 강화도, 고창 것보다도 훨씬 넓은 고인돌군이 화순군 도곡면 효산리와 춘양면 대신리에 펼쳐진다. 탁자식, 개석식 기반 등 유난히 커다래서 희귀한 것들도 모두 여기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무등산. 비할 데 없이 높아 ‘등급을 매기지 못하는’ 산이라 하여 고려 때부터 불린 이름이다. 해발 1187미터에 달하는 이 산은 광주광역시 동구, 북구, 담양군 남면과 더불어 화순군 이서면까지 그 유려한 자락을 뻗친다. 깎아놓은듯한 봉우리들을 가졌지만 오르기에 어렵지도 않은 그 품은, 마치 잘생겼는데 착하기까지 한 남자 같다. 이렇게 틈나는 대로 한 번씩 살금살금 다녀오느라 어느새 여름 운주사, 가을 무등산, 겨울 고인돌을 보았다. 남은 건 오직 봄의 화순. 끝내 아껴두고 맛보려던 필살의 장소, ‘전남 화순 세량지’를 내비게이션에 입력했다. 세량지 산벚꽃 보고, 만연사라는 절집을 좀 걷다, 그 귀하다는 노루목 적벽을 마주해야지. 우선은 해 뜨는 걸 보려고 쉼 없이 달렸다.
세량지는 아마추어 포토그래퍼들의 인기 출사지다.
화순의 아침
도착지에 가까워오자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이 외딴 고장에 승용차가 많아도 너무 많질 않은가. 심지어 주차장은 만차에 가까웠다. 아무렇게나 차를 대고 세량지가 있는 언덕 너머로 뛰어갔는데, 맙소사. 이미 한 무리의 사람들이 촬영 포인트에 바글바글 모여 삼각대를 갖다 댄 채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몰라도 한참 몰랐다. 아마추어 포토그래퍼들의 인기 출사지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 열기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대체 세량지가 뭐냐고 묻는다면, 자연이 하나의 ‘장면’을 위해 정교하게 만들어 내린 성소라고 답하겠다. 미국 CNN의 ‘한국에서 꼭 가봐야 할 50곳’ 리스트에 선정됐다는 에피소드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고향의 봄’이라는 관용구를 들었을 때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영상이 바로 이곳 세량지의 풍경일 것이다. 세량지細良池라는 이름은 ‘세량리의 못’이라는 뜻이다. 본래 ‘샘 있는 마을’이란 의미로 ‘새암곡’이라 불리다 한자 표기에 의해 ‘세양동細楊洞’, 후에 다시 세량리가 됐다. 정체를 파고들면 1969년 흙으로 둑을 쌓아 인공적으로 만든 농업용수 저수지에 불과하다. 전국구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건 불과 10여년 전부터. 산벚꽃이 만발한 어느 봄날 아침, 누군가 이곳을 찾았고 마침 물 위로 피어오르는 안개와 봄빛 흐드러진 산의 반영을 발견했을 것이다. 폐쇄 위기에 처했던 버려진 저수지는 오직 아름다움을 찾아 헤매는 이들 덕에 오늘날의 명성을 얻었다.
“바람 때가 좋지 않네.“바람 때가 좋지 않네. 어젠 물이 잔잔해서 반영이 제대로 나왔는데” 하는 푸념, “안개 자욱한 것도 그 나름 멋지잖아” 하는 독려, “수면이 좀 데워져야 물안개가 멋지게 피어오를 텐데” 하는 분석.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들려오는 포토 존 중심을 빠져나와 한갓진 외곽에 자리를 잡았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보니, 수십 명의 시선이 하나로 쏠려 있는 모습도 제법 장관이다.
“어, 해 뜬다!” 찢어지는 외침이 들린다. 별안간 해가 산기슭에 새어들기 시작했다. 연노란색 볕을 받아 산세는 더욱 신묘하게 낯빛을 바꿔가는데, 바람 탓인지 수면이 일사불란하게 흔들린다. 반영을 놓칠까 두렵다기보다도, 눈앞에 펼쳐진 압도적인 풍경에 넋을 잃어갔다. 연두색, 분홍색, 다갈색, 속살처럼 예민한 빛깔들이 한데 뒤섞여가는 모습 속에 혹시라도 숨 쉬는 것조차 누가 될까봐 조심스러웠다. 그런 광경은 난생처음이었다. 언어도단이라고밖엔 설명할 길도 없다.
한식당 오죽헌의 맛깔스러운 상차림.
어느덧 시침이 ‘9’를 가리켰다. 생업이 있는 아마추어 사진가들은 밀물처럼 빠져나갔고, 유배 온 한량만 남아 이곳저곳을 들쑤시며 산책을 좀 더 즐겼다. 세량지를 찾는 뜨내기들을 상대로 세량리 마을 사람들이 기껏 생각해낸 장삿속이란 산나물을 파는 것이었다. 그렇게나 암향이 좋은 산고사리, 참두릅, 곰취나물, 달래며 쑥을 한 봉지 ‘가득’ 기준으로 2천~3천원을 받고 팔았다. 여보, 사가소, 이렇게 연하디연한 나물이 없소, 하며 발목을 잡혔는데 잔돈이 없어끝내 사들고 오지 못한 게 안타깝다. 세량지를 만났다는 사실에 긴장이 풀린 탓일까, 허기가 맹렬히 밀려왔다. 화순 전통시장 근처 골목을 이리저리 누비다 ‘오죽헌’이라 쓰여 있는 간판을 보고 들어가 앉아 정식을 주문했다. 강릉도 아니고 화순에서 웬 오죽헌일까, 싶었지만 남도에 왔으니 아무거나 먹어도 괜찮을 거란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궁금증을 삭히고 기다리려는데 옆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자꾸만 귀에 걸린다. 웅얼거리듯 들리는 이야기를 좀 더 또렷하게 듣고 싶었다.
“이 집 음식은 맛이 이렇게 좋아. 이건 어간장을 넣었나?” “그러게. 어간장 만들려면 갓소금 넣고 3년 넘도록 푹 묵혀야 하는데, 하나 만들어두면 참 요긴하지.” “맞아, 어디 넣어도 맛이 확 살잖아.” 귀를 쫑긋 세우고 엿들은 바, 남도의 갑남을녀들은 조선왕조의 궁중에서나 담가 먹었다던 어간장 이야기부터 시작해 목포 게찜에 이르는 식도락 이야기를 이렇게나 일상적으로 나누는가 싶다. 이들의 말맛이 하도 좋아서 자꾸 입안에 군침이 돌았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눈앞에 찬이 줄줄이 깔리기 시작한다. 백조기라 불리는 부세구이,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연잎찰밥, 싱그럽고 새콤한 피꼬막무침, 제대로 삶아 부드러운 수육, 화순의 특산물인 파프리카를 잔뜩 볶아 올린 잡채, 향긋한 쑥을 넣고끓인 된장국. 수저가 어딜 먼저 향해야 할지 몰라 허공을 자꾸 헛돌았다. 먹어없어지는 것이 아까운 식사였다. 탈탈 긁어 먹은 밥상을 물리곤 가까운 절을 찾아 잠깐 걷기로 했다.
만연사의 고즈넉한 경내. 배롱나무에 연등 열매가 열렸다.
항아리가 정갈하게 펼쳐진 만연사의 뜰 앞 풍경.
절의 이름은 만연사. 화순읍 동구리에 자리한 이 절의 첫인상은 퍽 이국적이었다. 남국에서 볼 법한 나무들을 대웅전 앞에 심어두고 아름드리 배롱나무에는 진분홍색 연등을 열매처럼 달아둔 것이 꽤나 독특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흘러나오는 ‘관세음보살’ 가락도 유난히 온화하고 영롱했다. 고려시대 희종 때 원효사에서 수도하던 만연선사는 조계산의 송광사로 돌아가던 중 이 자리에 머물다 낮잠을 달게 잤는데, 16나한이 등장해 석가여래를 받드는 꿈을 꾸곤 그길로 절을 세웠다. 전각은 6.25 때 전소되었으나 점차 복원하여 오늘날 도지정 문화재 제185호 괘불을 모신 큰절이 됐다. 다산 정약용도 이곳에 잠시 거처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새초롬한 바람, 풍경 소리, 큰 나무 그늘 아래 궁그는 돌탑들, 스님의 합장. 고운 것들이 조용하게 모여 있는 모습 앞에서 마음이 흐뭇해졌다.
노루목적벽의 비경. 풍채 한번 늠름하다.
적벽의 오후
화순엔 오죽헌뿐 아니라 적벽도 있다. 화순 적벽은 무려 조선 10경의 하나다. 기묘사화로 유배 온 신재 최산두라는 인물이 이서면의 창랑리, 보산리, 장항리 일대에 걸친 7킬로미터 정도 길이의 불그죽죽한 단애를 일컬어 처음 ‘적벽’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중국 후베이 성에 있는, <삼국지> ‘적벽대전’의 배경인 적벽을 닮았다는 뜻이다. 크게 4개의 군으로 나뉘어 있는데, 물염적벽, 창랑적벽, 보산적벽, 그리고 노루목적벽(장항적벽)이 그것이다.
제일가는 것은 단연 노루목적벽과 보산적벽. 높이 90미터의 으리으리한 절벽 면이 선명한 단층과 함께 펼쳐진다. 다만 이 둘은 1971년 상수도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데 이어 1985년 동복댐 건설로 인해 인접도로가 한동안 폐쇄됐는데, 2014년 근 30년 만에 제한적으로만 일반에 공개하기 시작했다. 수, 토, 일요일에만 운행하는 버스 투어를 이용하면 볼 수 있는데, 사전 예약한 시간대에 탑승해 2개의 적벽을 돌고 빠져나오는 프로그램이다. 버스는 상수도 보호구역 입구부터 굽이굽이 이어진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간다. 동복호와 거북섬의 풍광이 먼저 눈에 들어왔는데, 오랫동안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아서인지 투박하고 싱그러운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노루목적벽과 망향정도 머지않아 시야에 나타났다. 망향정이란 이름은 동복댐 건설로 수몰된 15개 마을을 고향으로 둔 이들을 위한 것이다. 벽을 바로 보고 자리한 망향정에 드러누우니 잠시나마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한낮의 햇살을 받아 절벽의 표면이 꿈틀거렸다. 추상표현주의 회화처럼 거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김삿갓이 이곳을 즐겨 찾아와 노래 부르다 가곤 했다는데, 이런 감흥이라면 춤추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 같다.
물염정 뒤로 때늦은 벚꽃이 한창이다. 언덕 아래로 내려가면 물염적벽을 가까이 바라다볼 수 있다.
남은 2개 군의 적벽도 궁금해졌다. 차를 돌려 창랑리로 향했다. 창랑. 이름자에서부터 푸르고 맑은 물결이 흐른다. 창랑적벽은 앞서 본 2개의 적벽보다 훨씬 극적인 형태로 이뤄져 있었다. 일정한 기울기로 켜켜이 쌓인 단층의 모습이 하늘 아래 깔린 고급스러운 태피스트리 같다. 그 길을 그대로 10분 정도 달리면 물염적벽에 닿는다. 망향정에서 노루목적벽을 보았듯 이곳에선 물염정에 올라야 한다. 해 떨어지기 직전의 주홍빛이 다갈색 절벽을 더욱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가슴이 벅차올라 얼굴도 벌겋게 달아오르는 기분이다.
연둔리 둔동마을의 숲정이에서 마주한 따뜻한 풍경.
숲정이 노을
해가 다 지기 전에 유배길 마지막 행선지인 숲정이로 걸음을 옮겼다. 이 숲정이란 예쁜 말은 농촌 마을에 자라는 숲을 일컫는 순우리말 보통명사인데, 상수리 숲, 왕대 숲, 소나무 숲 등이 대부분이다. 동복면 연둔리 둔동마을의 동복천변엔 왕버들, 느티나무, 서어나무, 검팽나무 등 200그루가 넘는 나무들이 1킬로미터에 이르는 길을 따라 자라난 숲정이가 있다. 화순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이름난 숲정이다. 연둔교를 건너 숲에 발을 들였다. 하루의 유배를 돌이키며 다리를 쉬기 좋은 장소다.
참으로 멀리도 떠나왔지만, 사실 유배란 보낸 자가 마음을 바꾸지 않는 이상 떠난 자가 돌아올 수는 없는 법이다. 스스로를 유배 보내는 건 어쩌면 여행의 속성과 비슷한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수면 위로 해가 떨어진다. 숲정이 옆 둔덕 위로 마을 어르신이 느릿한 걸음을 둔다. 이 초현실적인 평화로움 속에 영원히 고여 있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이 유배에서 풀려나는 대로 생각을 좀 해봐야겠다. 그저 어디 닿은 데 없이 외롭고 싶던 이 봄의 유배길도 느리게 저물어간다.
화순 여행자를 위한 안내서
가는 길
서울에서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달리다 대전회덕나들목에서 호남고속도로로 접어든다. 광주에 이르러 너릿재터널을 빠져나오면 곧장 화순이다.
세량지
화순이 오랫동안 숨겨둔 비경. 다른 시간대보다도 아침에 찾기를 권한다. 사진 동호회의 동향을ㅡ 살펴 출사를 위한 길일을 찾으면 당신도 프로사진가 부럽지 않은 작품을 남길 수 있다.
운주사
천불천탑의 신비를 간직한 화순의 대표 사찰. 도암면 대초리 천불산에 위치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송광사의 말사다.
TEL061-374-0660
만연사
화순읍 만연산 자락에 위치한다. 1208년 만연선사가 창건했다.
2002년 보물 제1345호로 지정된 괘불탱을 이곳에서 친견할 수 있다.
TEL061-374-2112, 8399
WEB만연사.kr
화순적벽
화순에는 적벽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단애가 크게 4개의 군으로 나뉜다. 그중에서도 상수도 보호구역에 자리한 노루목적벽과 보산적벽을 감상하려면 미리 웹사이트에서 예약해야 한다.
연둔리 숲정이
숲정이란 마을의 천변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숲을 일컫는 순우리말이다.
화순에는 볼만한 숲정이들이 유난히 많은데, 특히 연둔리의 것이 아름답기로 이름났다. 작은 교회당, 버려진 웨딩스튜디오 등 소소한 포토 존도 자리한다.
화순전통시장
화순 읍내 한가운데 자리한 전통시장. 평상시엔 상대적으로 조용한 여느 시장과 다를 바 없는데, 5일장(3일, 8일)이 서는 날이면 이 고장 전체가 떠들썩할 정도로 인파가 몰려든다. 맛깔스러운 시장 주전부리뿐만 아니라 화순의 특산품인 파프리카부터 표고버섯, 산나물, 산도라지 등 각종 지역 산지 식재료들을 만날 수 있다.
TEL061-375-0330
성안마을
화순전통시장 바로 옆에는 2011년 즈음 ‘마을미술프로젝트’로 조성된 예쁜 벽화 단지인 성안마을이 위치한다. 주민들과 젊은 아티스트들이 협업해 마을 전체를 하나의 아기자기한 놀이터처럼 꾸몄다. 가을엔 국화꽃이 만발한다.
능주삼거리식당
능주의 조광조 적려유허비 인근에는 전국구급 맛집이 숨어 있다. 그 이름은 능주삼거리식당. 머릿고기와 족발, 국밥을 주로 하는데 메인 메뉴는 물론이고 곁들여 나오는 찬 하나까지 상차림 중 어느 것 하나 버릴 게 없는 식당이다.
TEL061-372-1376
<2016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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