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펌)강진, 맛.멋 따라 걷는 길

깜보입니다 2015. 6. 24. 11:45

전남 강진에 비밀스러운 숲이 숨어 있다. 누구에게도 알리기 싫은 구중심처에서 풀 냄새 맡고 찻잎 뜯어 먹으며 숨바꼭질을 했다.

↑ 전남 강진

↑ 함께해海길

가우도 함께해海길을 걷는 사람들.



↑ 백운동 별서

백운동 별서의 우거진 연둣빛 숲.



↑ 무위사 극락전 내의 삼존불

무위사 극락전 내의 삼존불. 영험한 기운이 흐른다.



↑ 무위사 경내

월출산에 폭 안긴 무위사 경내의 모습.



어느 주말, 종로 한복판 사무실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는 어깨에도 봄볕은 쏟아진다. 잔인하다. 이럴 땐 글 쓰는 일이 다 무용하다. 건물 밖으로 한 걸음만 떼도 봄인데. 무얼 바라 몇 자 더 욱여넣겠다고 아등바등하나. 팽팽했던 손끝의 긴장이 풀린다. 때마침 선물 받고 아직 읽지 못한 책 하나가 떠오른다. <강진 백운동 별서정원>. 다시 들춰보니 오묘한 부제도 따라붙는다. "동백 숲길 맑은 그늘 물 끝난 곳 구름이네." 붉은 기가 흐드러진 동백 숲길을 눈 감고 헤아린다. 맑은 그늘 아래 앉았다가, 하늘 보고 콧노래를 흥얼대다가, 냇물 흐르는 소리 따라 걷다가…. 문득 구름 앞에서 심상이 막힌다. '물 끝난 곳'이란 무어며, 또 구름은 어찌 인다는 것일까?

구름 조각 같은 바람이 불어올 때

봄볕에 몸이 달아 어디로든 떠나려던 차, 계시처럼 만난 문장 따라 길을 나선다. 책의 저자인 한문학자 정민 선생은 첫머리를 이렇게 연다.



백운, 아마 '물 끝난 곳에 일던 구름'의 정체인가보다. 내비게이션에 '백운동' 석 자를 검색한다. 그런데 주소를 찾을 수 없다. 오늘날 이곳이 지번 주소로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에 속한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진 얼마간의 시간이 더 소요됐다. 예로부터 안정동과 백운동이라 불리던 두 동을 안운마을이라 묶어 부른다는 것도 새로 알았다. 그리하여 주소를 고쳐 넣고 그대로 남하한다. 넉넉잡아 5시간이 걸리니 참 오래도 간다. 동틀 때 출발하면 반나절이 지난 점심께야 겨우 강진군에 접어든다. 아름다운 것들은 멀리 있어 더 아름답다던가.

기실 강진에서 가장 사랑받는 명승지는 다산초당이다. 21세기에도 여전히 다산 정약용의 제자를 자처하는 이들이 많고, 그곳이 아름다운 별서로 이름났기 때문이다. 별서란 어지러운 속세로부터 숨어들 만한 숲 속 별장과 정원을 이르는 말이다. 다산은 강진으로 유배 와 18년 유배 생활 동안 10년을 이곳에서 지냈다고 한다.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이곳에서 다산학의 기틀을 닦았음은 물론이다. 흔한 말로 '3대 별서'를 꼽기도 하는데 담양 소쇄원, 보길도 부용동정원과 함께 이 다산초당이 든다. 그 때문인지 백운동 별서는 이제까지 잡풀 우거진 숲으로 평가절하당해왔다. 오죽했으면 뭇사람들이 이곳에 캠핑장 세울 궁리를 했겠나.



별서에 가기 전에 한 군데 들를 곳이 있다. 무위사다. 백운동 별서 근방에 위치한 신라 때 절이다. 다행스럽게도 강진군청에서는 몇 해 전부터 백운동 별서와 이곳 무위사, 다산 유배길로 이어지는 강진다원, 월남사지를 하나의 벨트로 묶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그 덕에 휴가철 행락지가 될 뻔했던 백운동 별서는 옛날의 고아했던 빛을 찾아가는 중이고, 다산 유배길과 강진다원은 지속적인 개발과 정비를 반복하고 있다. 무위사는 이 권역의 첫째 여정지다.



여느 사찰들이 그러하듯 이곳 역시 대부분이 새로 지은 전각들로 이뤄져 있는데 경내 한가운데서 단청 다 벗긴 채로 서 있는 극락전만은 창건 때의 모습 거의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다. 맞배지붕에 배흘림기둥을 쓴다는 건축적 특징이 있지만 그보다 단숨에 눈을 사로잡는 건 속살 훤히 드러내는 목조 골격이다. 무위사 극락전은 서울 숭례문에 이어 국보 중 두 번째로 지정된 목조 건축물이다. 숭례문이 불타 원형을 상실하고 새것에 가깝게 복원됐다는 것을 감안하면 사실상 첫 번째가 아니냐는 우스개가 떠돈다.



↑ 동문주막 사의재.

다산이 유배 초년 묵었던 동문주막 사의재.



↑ 샘물

주막 한편의 맑은 샘물.



↑ 강진다원

강진다원의 드넓은 풍경.



합장하고 안을 둘러본다. 사방 벽에 걸린 불화들이 온화한 시선으로 아래를 응시한다. 가운데 삼존불 벽화에는 완성 후 50일간 문 열지 말라는 엄명이 붙어 있었는데, 그걸 어긴 죄로 삼존불의 눈동자들이 날아갔다는 얘기가 얽혀 있다. 개인적으로 마음이 쏠린 건 그 바로 뒤에 맞붙은 그림, <백의관음도>다. 정식 명칭은 <백의관세음보살도>. 붉은 연잎에 올라 파도 타는 관음보살을 그렸다. 산뜻한 흰 옷차림을 하곤 왼손에 정병, 오른손에 버들가지를 쥐었다. 우아하게 나부끼는 옷자락을 보고 있으면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는 기분에 사로잡힌다. 이렇게 고운 바람이려면 아무래도 비밀의 정원에서 새어 나온 것 아닐까. 상상만으로 콧잔등이 간질거린다. 바람의 근원을 보려면 백운로 동쪽 별서로 가야 한다. 유심히 신경 쓰지 않으면 팻말과 안내문을 보고도 지나칠 만큼 소박한 입구가 기다리는 곳으로.



옥판봉 아래 숨은 정원에서 걷다가 차 마시다가

별서에 들기 전, 정민 선생의 글을 한 번 더 좇는다.



제자 초의. 새로운 이름이 이 여행길에 등장했다. '풀 옷'을 제 이름으로 삼고 작은 암자에 머물며 검박하게 살았던 학승. 오늘날 우리가 백운동을 볼 수 있는 것은 오롯이 초의선사와 다산의 <백운첩> 덕분이다. 이들이 쓰고 노래하고 그림으로 남긴 작품들은 백운동의 물리적인 자연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상호침투하면서 새로운 의미와 역사를 만들어나간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곳 별서를 산책하는 가장 좋은 코스는 별다른 여지 없이 <백운첩>의 백운 12경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입구에서 만나는 옥판봉의 상쾌한 기운(옥판상기)을 들이쉬고, 그 길로 이어지는 산다경의 동백나무 그늘(유차성음)을 지나, 백매오의 매화 향기(백매암향)에 코를 대어본다. 그러다 단풍나무 붉은빛으로 물든 폭포(풍리홍폭, 홍라보장)나 마당을 휘도는 물 위에 띄운 술잔(곡수유상)을 상상도 하고. 창하 벽에 쓴 글씨를 비롯해 길 군데군데 놓인 잘생긴 바위들(창벽염주, 선대봉출), 정유강의 용 비늘 닮은 소나무(유강홍린), 계단 끝에 심은 모란(화계모란)을 눈으로 쓸다가 사랑채 취미선방의 초가(십홀선방)에 앉아 한숨 돌리곤 운당원에 우뚝 솟은 왕대나무(운당천운) 숲길로 걸어나간다. 흠결 없는 한붓 그리기. 지체하고 싶은 순간엔 걸음을 느리게 두면 될 일.



깊은 숲에 들어와 있음을 깨우치는 건 카랑카랑한 새소리다. 불국사에서 불던 새피리와 꼭 같은 소리로 운다. 노래 잘하는 새를 꾀꼬리라고 하는데, 여기선 동박새다. 동백나무의 수분을 돕는 요정 같은 새 말이다. 발에 채는 동백 낙화를 밟으며 동박새 노래에 한참 귀 기울인다. 그러자 나뭇잎 건드리는 바람 소리가 함께 들린다. 연두에서 초록이 되어가는 숲의 한가운데서 들려오는 이 소리는 싱숭생숭한 마음에 비질을 한다.



할 수만 있다면 저 아래 흐르는 물에 찻잔을 띄워 마시고 싶다. 이곳에선 술 아니고 차다. 이 숲 곳곳엔 야생차가 자라고, 왕대나무 숲길을 지나면 드넓은 강진다원이 펼쳐진다. 차밭이라면 대부분 보성을 먼저 떠올리고, 그다음 제주 다원을 얘기하겠지만 여기를 보고 나면 그 둘의 인상이 희미해지고 만다. 아직 벚꽃이 지지 않은 때, 흰 꽃잎과 새파랗게 차오르는 찻잎은 완연한 대비를 이루며 색면회화를 그린다. 월출산의 유려한 산세에 안긴 그 모습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풍경이다.



↑ 옥판차

이한영 생가 터에서 옥판차를 마신다.



월출산 옥판봉 아래서 덖은 '옥판차'를 처음 개발한 건 강진의 다부茶父 이한영이다. 차밭을 보고 내려오면 이한영의 생가에서 옥판차를 우려 마실 수 있다. 강진 사람들은 이한영의 제삿날이면 월출산 삼존암의 물을 길어 차를 바치는 행사를 연다. 차와 차를 사랑하는 마음을 존경하기 때문이다. 유별나게도 보이지만 예로부터 이곳은 고유의 차 문화를 이어온 지역이다. 이들에겐 자신들의 문화를 이어오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월출산 자락은 예로부터 물과 흙이 좋아 야생 차밭으로 이름나 있었다. 옛 태평양그룹의 초대 회장은 일본 유학 시절 모로오카 다모스와 이에이리 가즈오가 우리 리 차문화를 답사하고 저술한 <조선의 차와 선>을 읽고 강진에 와 오늘날의 차밭으로 가꾸게 된다. 이것이 설록다원의 시작이다. 일부 차 밭뙈기는 여전히 야생차 방식으로 제초제도 쓰지 않고 손으로 직접 따는 전통을 잇고 있다. 냄새에 민감한 찻잎인지라 수확할 때는 무조건 의관을 정제해야 한다. 이렇게나 공들여 얻어진 차는 무려 100그램에 100만원을 호가하는 가격으로 팔린다. 보통 사람들이야 당연히 기함할 얘기지만 없어서 못 판다는 소문이 있다. 직접 마셔본 바, 색깔부터 다르다. 잎을 따서 먹을 땐 떫기보다 순연한 풀 향이 혀를 맴돌더니 차로 우려 마실 땐 그 은은한 냄새가 오래도록 지속된다.



엄총흘흘지기심嚴叢屹屹知幾尋(바위가 품은 생각은 헤아리기 어려운데)

상유고대접천제上有高臺接天際(무지개처럼 아름다운 재에 앉아)

두작성하자야차斗酌星河煮夜茶(북두칠성으로 길은 은하수에 밤차를 다리니)

다연냉쇄월중계茶煙冷鎖月中桂(차 끓이는 연기 계수나무를 휘도네)

차밭 옆으로는 진각국사 혜심이 주지로 있던 월남사의 터가 삼층석탑만을 남기고 폐허로 자리하고 있다. 이 월남사 터가 의미 있는 건 오롯이 진각국사가 남긴 이 '다시茶詩'의 아름다움 때문일 테다.



↑ 가우도 출렁다리

가우도 출렁다리의 늘씬한 모습.



↑ 가우도 해변

고요한 수면을 보고 있으면 호수처럼 느껴지는 가우도 해변.



↑ 강진의 남도식 한정식 상.

강진의 남도식 한정식 상. 강진 앞바다에서 난 해산물로 차린다. 상다리가 부러진다.



↑ 영랑

영랑과 한 벤치에 앉아 기념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숲으로부터 바다, 바다로부터 섬

산과 바다를 한데 볼 수 있는 여행지를 좋아한다. 해마다 강릉에 가는 이유다. 올여름부턴 강진을 여기 추가해야겠다고 다짐한다. 강진 역시 산과 바다가 하나로 흐른다. 다원에서 나오면 고요한 호수 같은 바닷길이 뻗어 있다. 바다 못 미치는 곳에 잠깐 머물다 가야 할 곳이 있다. 다산이 한양에서 유배 왔을 때 처음 머물던 주막, 사의재다. 다산을 문둥병 환자 보듯 했던 마을 사람들과 달리 인간 취급하고 방을 내준 주모가 여기 있었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다산에게 벼락 같은 질문을 던진다. "보아하니 책 많이 읽은 선비 같은데, 내 궁금한 게 하나 있어 묻는다. 나 같은 여자 또한 사람인데 왜 천시하는 것인가?" 다산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친구들에게 편지를 한다. "천지에서 이토록 지극히 묘한 말을 하는 이를 처음 보았다." 주모는 백면서생이었던 다산에게 실사구시를 촉구했던 페미니스트였다. 다산은 머물던 방을 사의재로 고쳐 부르기 시작한다. 생각, 용모, 말, 행동의 4가지를 바로하겠다는 뜻에서다. 강진군청에서는 여기에 여행객들이 다산처럼 머물다 갈 만한 숙소를 추가로 만드는 중이다. 6월 초순께면 문을 연다니, 아욱국밥에 막걸리 반주하고 잠자다 가야겠다. 다시 길을 따라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가우도라는 섬이 나온다. '소의 멍에'라는 뜻을 가진 이 섬은 3년 전 '출렁다리'라는 교량을 양끝에 매달고부터 강진의 새로운 명소가 됐다. 다리를 건너 섬을 반 바퀴쯤 돌면 벤치에 걸터앉은 동상 하나를 본다. 강진에서 나고 자란 시인 김영랑의 것이다. 으레 강진에 가면 많이들 둘러보는 것이 영랑의 흔적인데, 여기서 만난다. "나는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학창 시절 역설법의 대표적인 예시로 외다시피 한 구절을 한봄에 읽고 보니 새삼스레 좋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영랑이 언제 내 속에 왔다 갔나? 내내 이런 생각으로 강진을 쏘다닌 하루였다. 멀리 해가 저문다. 그새 시가 하나 더 보인다.

구비진 돌담을 /돌아서 돌아서 /달이 흐른다. 놀이 흐른다.

하이얀 그림자 /은실을 즈르르 몰아서 /꿈밭에 봄마음 가고 가고 또 간다.

가고 가고 또 간다. 봄도, 마음도, 꿈도, 세월도, 구름 흐르듯 잘도 간다. 곧 월출산에 달 뜨겠다.



가는 길

서울에서 강진까지 자동차로 꼬박 4시간 30분이 소요된다. 최단 시간으로 닿으려면 서울발 목포행 KTX를 타고 목포역에 내려 시외버스로 가는 편이 낫다. 버스는 서울 센트럴시티터미널에서 오전 7시 30분부터 2시간 간격으로 출발한다.


강진문화관광 061-430-3312

↑ 다산 유적지 권역

다산 유적지 권역

다산 정약용 선생의 흔적을 좇고자 하는 이들이라면 다음의 장소를 반드시 방문해야 한다. 다산초당은 다산이 강진 유배 18년 중 10년을 기거했던 곳이다.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의 대표작을 이곳에서 저술한다. 남쪽 800미터지점에는 다산 선생 관련 진품 유품을 전시한 다산기념관이 위치한다. 강진읍으로 넘어가면 다산이 유배 와서 처음 묵은 주막 사의재가 있다. 주막 여인의 살뜰한 도움으로 다산은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다. 고성사의 보은산방은 혜장스님과 친교를 나누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다산초당1길 7-5
다산기념관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다산로 766-20
사의재전라남도 강진군 강진읍 사의재길 27
고성사전라남도 강진군 강진읍 고성길 260

고려청자 요지

강진군의 대구면은 예로부터 질 좋은 고려청자를 만들었던 곳으로 알려져왔다. 9세기에서 14세기까지 이곳의 188기 청자 가마터는 불씨 마를 날이 없었다. 고려청자의 보존과 연구를 위해 개관한 강진청자자료박물관은 국내 유일의 청자박물관이다. 근처의 도예문화원도 둘러볼 만하다. 청자촌의 명물인 천연기념물 제 35호인 대구푸조나무도 놓쳐선 안 될 구경거리.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청자촌길 21-11
TEL061-430-3732



영랑생가

강진을 대표하는 두 사람을 꼽으라 하면 다산, 그리고 영랑이다. 영랑 김윤식 선생은 1903년 강진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영랑은 이 시절에 불렸던 아호다. 영랑의 시 중 60여 편이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영랑을 중심으로 형성된 동인 시문학파의 문학관이 인근에 위치한다. 영랑뿐 아니라 정지용, 정인보, 이하윤, 변영로, 신석정 등 당대 대표 시인들의 작품을 한데서 볼 수 있다.

전라남도 강진군 강진읍 영랑생가길 15
TEL061-430-3185

하멜기념관

강진에 7년 동안 억류당한 외국인이 있었다. 헨드릭 하멜, 우리에게 <하멜 표류기>로 잘 알려진 바로 그다. 한국을 네덜란드에 소개한 공로로 강진에서는 그를 기리는 기념관을 세웠다. 강진과 네덜란드 호르큼시는 자매 결연을 맺었다.

전라남도 강진군 병영면 병영성로 180

061-430-3318



와보랑께박물관

사랑스러운 이름을 가진 박물관으로 전라도 사투리와 얽힌 남도의 생활 민속품을 전시한 곳이다. 김성우 관장이 직접 운영하는 이곳은 주민들의 적극적인 전시품 기부로 운영된다. 초등학교 교과서, 새마을 라디오, 사투리 패널, 사투리 사전, 시집 등 아기자기한 볼거리가 많다.

전라남도 강진군 병영면 장강로 804-6
TEL061-432-1465



↑ 모란추어탕

모란추어탕

영랑의 시에서 이름을 딴 모란추어탕. 걸쭉한 국물은 의외로 담백한 맛이 돈다. 호박죽과 양파 김치를 기본 반찬으로 주는 것이 독특하다. 나물 볶음이나 겉절이 등 양념 간이 잘 밴 밑반찬이 모두 훌륭하다.

전라남도 강진군 강진읍 탑동길 5

0503-5263-8815



↑ 강진만한정식

강진만한정식

강진의 남도 한정식은 이곳에 왔다면 꼭 먹어 봐야 할 음식이다. 1인당 1만1천원을 내면 홍어 삼합, 육회, 게장 등 귀한 음식이 한 상 가득 차려진다. 먹어도 먹어도 음식이 남아 있다.

전라남도 강진군 강진읍 보은로 113

061-433-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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