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강경(스크랩)

깜보입니다 2014. 12. 2. 11:08

 

 

갱갱이는 '강경'을 일컫는 충청도 방언이다. 강가의 햇볕 고을인 강경은 조선 시대 2대 포구이자 3대 시장이었다. 옥녀봉에 서서 강경포구를 내려다보며 이 포구의 은성했던 시절을 떠올려본다. 옥녀봉에서 만난 김종원 할아버지는 ‘제주도에서 싣고 오는 말’이 들어오던 그때를, '그 많던 배가 어떻게 들어왔는지 모르겠다’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신기하기만 하단다. 지금은 텅 빈 강경포구에 배 한 척만 남았다.

<비옥하고 드넓은 곡창지대를 끼고 있는데다가, 금강 본류와 서해가 지척에서 맞닿는 위치때문에 일찍부터 내륙항으로 손색이 없는 곳으로 손꼽힌 게 강경포였다. 당연히 조선 후기엔 서해에서 잡히는 갖가지 해산물의 집산지가 되었고, 소금이나 곡물 등, 여러 문물이 대량으로 드나드는 교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 박범신 소설 <소금> 中 -

 


- 옥녀봉
강경을 한눈에 내려다 보는 바위

 

 

강경은 근대사의 흔적을 가장 많이 간직한 도시 중 하나다. 금강 곡류부 오른쪽 기슭에 있는 강경은 북쪽의 옥녀봉과 동쪽의 채운산 말고는 대부분 야트막한 평야 지대다. 군산, 강경, 부여, 공주를 잇는 뱃길 가운데 강경이 있었다. 금강 유역 대표적인 관문도시로 많은 배가 강경을 지나쳤고, 수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모든 이야기가 강경포구를 통해 강경으로 흘러들었고, 옥녀봉이 그 포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옥녀봉은 하늘에서 봐도 아름다웠던 모양이다. 경치가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옥황상제의 딸이 아비의 명을 어기고 내려와 놀다가 하늘에 오르지 못하고 죽었다는 전설 때문에 ‘옥녀봉’이라 이름 붙었다는 말이 있다.

<옥녀봉은 높지 않은 암산이지만, 서북으로는 휘돌아가는 강에 발을 대고 동남간으로는 너른 벌판을 사이에 둔 채 계룡의 준령들과 대둔산에 뻗대어 있어, 그곳에서 보는 정경은 모난 데 없이 늘 원만하고 부족한 데 없이 언제나 풍요로웠다. > - 박범신 소설 <소금> 中
“지금 이 시간에는 사람 많아서 앉아 있덜 못했어. 에어컨 나오기 전까지는 여가 최고 좋은 피서지였지. 여름엔 얼마나 좋은 명당인데. 지금도 봐바. 바람이 시원하게 불자녀. 일제강점기엔 우리나라 사람은 있도 못했지. 여가 젤 가는 명당인게. 일본 사람들 다 차지하고, 우리나라 사람은 있을 데도 없었어.”
여든 해 넘도록 이 동네에 살았다는 김종원 할아버지는 여름이면 이곳에 오른다. 일본은 우리에게서 많은 것을 빼앗아 갔다. 그 수많은 것 중 하나가 이들에게는 ‘바람’이기도 했다. 옥녀봉에 서면 솔솔 불어오는 바람이 한여름에도 차다. 시원한 바람마저도 일본인에게 빼앗겼던 그때가 떠오르자 김종원 할아버지는 서글픈 마음이 들었나 보다.
옥녀봉 자락에서 발길을 붙잡는 것은 바람뿐만이 아니었다. 하나둘, 내려다보이는 강과 강경 읍내가 근심을 잊게 한다. 230년 동안 자리를 지킨 느티나무도 말없이 서 있다.
1905년 5월 경부선 철도 개통은 강경포구의 쇠락을 예고하는 전주곡이었다. 경부선이 금강의 소항 종점인 부강을 지나면서 군산과 강경을 거쳤다. 경부선이 상류의 공주와 청주지역을 강경의 상권에서 분리하면서 금강 수운은 큰 변화를 맞았다. 1911년 호남선 부설은 금강 수운의 쇠퇴와 강경의 침체를 더욱 가속했다. 그해 7월 11일 호남선 구간 중 대전~강경 구간이 먼저 개통돼 강경은 번영과 침체의 길을 함께 걷는다. 강경역이 들어서고 읍내에 많은 근대건축물이 자리잡으면서 활기를 띠는가 싶었지만, 기존 시장의 구실은 서서히 축소되었다.

 


- 옥녀봉에서 만나는‘흔적’
옥녀봉 슈퍼 ▶ 암각 해조문(논산시 향토유적 제24호) ▶ 기독교한국침례교회 국내 최초 예배지(논산시 향토유적 제38호)

 

 

옥녀봉 바로 아래에서는 60년 가까이 이 자리를 지킨 슈퍼를 만날 수 있다. 옥녀봉 공원이 만들어지면서 주변 주택은 모두 철거되었는데, 옥녀봉 슈퍼는 자리를 지켰다.
“철거할 때 시어머니랑 함께 있었는데, 시어머니가 연세가 지긋했어. 100살이 넘게 사셨으니까. 그래서 나는 그냥 시어머니랑 여기 있겠다고 버텼지.”
옥녀봉 슈퍼를 지키는 송옥례 할머니의 이야기다. “시어머니는 유옥녀고, 나는 송옥례니까 옥녀봉 슈퍼 할 만하지?” 할머니의 웃음이 가게를 가득 채운다. 옥녀봉 슈퍼에서 음료수 한잔 마시고 조금 내려가면 암각 해조문(논산시 향토유적 제24호)을 발견할 수 있다.
강경포구는 침체되어 사라졌지만, 당시 포구를 이용하던 주민을 위해 만든 조석표는 옥녀봉 남쪽 암벽에 남았다. 암각 해조문은 조선 철종 11년(1860) 8월 강경 옥녀봉 인근에 거주하던 송심두에 의해
쓰였다. 바위 절벽에 가로 131cm, 세로 110cm의 음각 평면을 만들고, 그 위에 총 190자를 새긴 암각문은 강경포구의 밀물과 썰물의 발생 원인과 시각, 높이를 기록한 조석표다. 한강, 낙동강 등 유서 깊은 포구가 많았지만, 누구라도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해조문을 새긴 곳은 거의 없다. 강경을 오가던 수많은 사람이 해조문을 바라보는 모습이 그려진다.
옥녀봉 공원에서는 기독교한국침례회 국내 최초 예배지(논산시 향토유적 제38호)를 내려다볼 수 있다. 이곳은 2013년 10월 17일 복원 공사를 끝내고, 문을 열었다. 1896년 포목장사를 하던 지병석 씨는 선교사들의 전도를 받아 최초 침례교인이 되었다. 고향인 강경에 선교사들까지 모셔와 자택에서 예배를 드렸고, 이것이 기독교한국침례회의 시작이었다.
오랫동안 버려두어 음산한 분위기가 감돌던 허름한 옛집은 복원 후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 구 강경노동조합
노동자들 함께 모이던 건물

 

옥녀봉을 따라 내려와 하나둘 근대의 흔적을 밟는다. 1920년대 당시 수산물은 대부분 강경포구를 통해 전국 내륙지방으로 유통되었다. 강경포구에서 하역작업을 담당하는 노동자도 그만큼 많았다. 1910년대 중반, 강경포구에서 하역
작업을 하던 노동자들은 ‘강경노동조합’이라는 조직체를 결성했다. 조합원은 60~80명이 한 조가 되어 총 10개 조로 780여 명이 있었다. 현재 강경노동조합 건물은 초대 조합장이었던 정흥섭을 중심으로 1925년 신축했다.
구 강경노동조합 건물(등록문화재 제323호)은 신축 당시엔 우리나라식과 일본식이 혼합된 목구조 2층 건물이었다. 6·25전쟁때 폭격으로 2층이 파손된 후 1953년 가을에 개축했다. 강경노동조합은 옥녀봉에서 자동차를 타고 2~3분 정도 걸린다. 날 좋으면 걸음걸음으로도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다. 강경노동조합 근처에 강경젓갈시장이 자리를 잡았다. 여름 막바지 더위가 한창인 8월이었지만, 젓갈시장에는 사람이 제법 많다. 노동조합 건물은 굳게 닫힌 채 근대건축물로 남고 그때를 살았던 노동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아직 시장의 모습은 그렇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