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스크랩] 잠든 문화재의 가치를 깨우는 사람

깜보입니다 2014. 4. 25. 12:12

 

13년, 수장고 유물과 함께 한 시간

국립고궁박물관 지하 2층. 잠긴 문을 열고 들어서니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지하창고다. 한참을 걷고 돌아 마주한 막다른 길에는 육중한 철문으로 무장한 수장고(收藏庫)가 있다. 우리나라 박물관 중 두 번째로 가장 많은 유물을 보유하고 있는 박물관답게 수장고 수만 18개에 달한다.

“유물의 특성 상 재질별, 형태별로 분류하여 각 수장고에 보관하고 있는데, 유물 수로 보자면 약 5만 건(20만 점)에 달합니다. 항온·항습과 같은 기본 시스템에서부터 탈색을 방지하는 형광등과 화학성분을 차단하는 불투습 패널 등의 시설 등이 갖춰져 있습니다. 유물이 가장 편안한 상태로 지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곳이죠.”

유물을 잘 보존·관리해야 하는 유물과학과의 특성 상 유물이 보관된 수장고야말로 서준 학예연구사의 ‘일터’인 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 9시부터 11시 30분까지, 오후 1시부터 저녁 5시까지 그는 직원들과 함께 수장고에서 생활한다. 박물관 자체적으로 전시를 하는 일은 물론 국내·외 박물관에서 전시 또는 대여를 할 때 유물이 파손·훼손되는 일을 막고, 이를 다시 재질과 형태에 맞게 정리·보관하는 일이 주요 업무이다 보니 시와 때를 가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집안의 물건도 가만히 놔두면 색이 바래거나 삭아버립니다. 유물도 똑같습니다. 수장고에 가만히 놔두는 것은 방치입니다. 매일 확인하고 세심히 관리해야 보존이죠. 죽어있는 것 같지만 문화재야말로 ‘살아있는 생명’과도 같습니다.”

미래 후손들에게 돌려줘야 하니 최소 몇백 년은 바라보고 보전·관리를 해야 한다는 서준 학예연구사의 노력은 13년이라는 세월 동안 한결같기만 하다. 어두운 수장고 불빛에 익숙해진 나머지 환한 대낮은 어느새 낯선 풍경이 되어 버렸지만, 여전히 이곳을 찾을 때는 보물창고에 오는 것처럼 설렌다고 서준 학예연구사는 말한다.

실제로 이곳에는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를 비롯해 사료적 가치가 높은 우수한 유물들이 많다. 조선 통치이념의 상징물이자 하늘의 이치를 알고자 했던 선조들의 위대한 과학적 산물인 천상열차분야지도, 서양에서보다 무려 200년가량 앞선 세종 24년(1442년)에 제작된 측우기는 가장 대표적인 문화재이다. 그밖에도 왕실 및 국가의 주요 행사를 기록한 의궤(儀軌) 167권과 의례용 도장인 어보(御寶) 316점, 왕과 왕비, 세자와 세자빈을 칭송하는 글을 옥이나 대나무, 금판 등에 적은 어책(御冊) 256점을 비롯해 역대 임금의 글씨를 돌에 새긴 조각 등이 100점 가량 보관돼 있다.

영조대왕이 쓴 글에는 65세가 되던 해 자신의 눈을 시험해보고자 아주 작은 글씨를 써 시력을 측정하려 했던 내용도 담겨 있다. 유물에 담긴 속내를 알고 나니 당시의 시대가, 그리고 인물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명제가 들어맞는 순간이다.

유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은 곧 사명

유물의 보존·관리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복원이다. 유실되거나 훼손된 유물은 고증을 통해 복원작업이 이뤄지는데, 서준 학예연구사에게 있어 가장 기억에 남는 작업은 다름 아닌 자격루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 물시계인 자격루는 세종 16년(1434) 장영실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현재 남아있는 것은 자동시보장치가 빠진 창경궁 자격루(국보 제229호) 뿐이다. 이를 복원하기 위해 국립고궁박물관은 2004년부터 당시 건국대 남문현 교수와 박물관의 서준 학예연구사를 중심으로 30명이 넘는 인원이 참여한 가운데 2006년 자격루 복원에 성공하였다. 세종시대 우리 과학정신과 과학능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유물이라는 점에서 복원의 의의가 매우 크다고 그는 말한다.

그 밖에도 서준 학예연구사는 2011년 어보 도록화 작업(『조선왕실의 어보』)에 이어 올해 어책 연구를 진행 중이다. 유물에 깊이 아로새겨진 가치를 끊임없이 발굴해 내 세계 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고 있는 그다. 우리 문화재 속 잠들어있는 가치를 깨우고, 어둠에 가려진 참 모습을 밝히는 일, 서준 학예연구사가 앞으로도 이루고 싶은 일들이다.

“유물에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것은 그 속에 담긴 의미와 가치를 깨닫는 일입니다. 학예연구사로서 그만한 보람과 희열은 없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 유물을 후대에 잘 물려주는 것이야말로 저의 사명이자 목표입니다.”


글 정연희 사진 이서연

출처 : 한국의재발견 사랑방
글쓴이 : 한국의재발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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