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스크랩] 닭실마을, 선비의 시간을 품다

깜보입니다 2014. 5. 2. 10:28

 

청빈한 삶을 살았던 선비들의 삶을 보다

큰 욕심 없이 자연과 더불어, 그리고 사람 도리 다하며 살라했던 우리네 선비들. 그 후예들이 사는 봉화는 선비의 고장이다. 그 중 닭실마을은 안동 권씨 집성촌으로 조선시대 청렴한 선비의 표상으로 알려진 충재 권벌 선생의 후예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다. 택리지에서 영남의 4대 길지 중 한곳으로 뽑았다는 닭실마을의 기품 있는 봄 풍경이 궁금해 길을 나섰다.

닭실마을 들머리에 위치한 석천계곡에는 봄빛이 완연하다. 맑은 물길을 따라 보송보송 피어난 버들강아지가 봄바람에 몸을 맡긴 채 하늘하늘 춤을 춘다. 그 옆에는 청하동천(靑霞洞天)이라는 글이 쓰인 큰 바위가 보인다. ‘신선들이 사는 마을’이라는 뜻을 지닌 이 계곡의 아름다움은 도깨비들까지 들끓게 했다고 한다.

마을로 들어서니 아름다운 정자 하나가 길손을 맞는다. 조선 중종 때 권벌 선생이 직접 지었다는 청암정(靑巖亭)이다. 권벌 선생은 사화와 당쟁이 판치는 현실정치에서 벗어난 신선세계를 이 정자로 표현했다고 한다. 정자에 올라앉으니 바깥 풍경이 한없이 평화롭기만 하다. 새삼 옛 선현들의 풍류와 빼어난 미적 감각이 놀라워진다.

청암정 옆으로는 권벌 선생 종택이 위치해 있다. 높은 지휘에 올랐으나 청빈한 삶을 살았던 권벌 선생의 18대 종부와 종손이 이곳을 지키고 있다. 지어진 지 500년이 지났지만 고택은 여전히 종가의 풍모를 유지하고 있다. 초승달처럼 휘어진 솟을대문을 넘어 □자형 살림채가 눈에 들어오는데, 세월의 풍파에도 꼿꼿이 양반가의 전통을 이어온 종가답게 위상이 남다르다. 청빈한 삶을 살았던 선비들의 삶이 이 안에 깃들어 있다 생각하니 마당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오래된 나무 기둥의 주름 하나도 쉬 보이지 않는다.

단단한 목질 속 선비의 기품을 담다

1956년 영암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기차에 실려 전국으로 팔려나간 명품 소나무가 있다. 바로 봉화군 춘양면에서 자란, 그래서 목재상들이 춘양목이라 이름 붙인 소나무다. 봉화의 명물인 춘양목을 아니 보고 갈 수 없어 발길을 재촉한다.

비오는 산길을 한참 걸어 춘양면의 외씨버선길 끝자락에 닿으니 쭉쭉 뻗은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반겨준다. ‘억지 춘양’이란 말도 바로 이 춘양목에서 나왔다고 한다. 가짜 춘양목을 두고 진짜라고 억지를 부렸다는데, 춘양목이 얼마나 인기였기에 이런 말까지 나왔을까 싶다.

춘양목은 모든 나무의 으뜸이라고 한다. 줄기가 곧게 자라며 결이 곧고, 재질이 단단한 나무는 켠 뒤에도 크게 굽거나 트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벌레가 먹거나 썩지 않으며, 대패질을 해놓으면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나무라고 한다. 그래서 춘양목은 한옥을 짓는 데에 으뜸가는 목재로 쳤다고 한다.

긴 세월 귀한 대접 받아온 춘양목 곁을 천천히 걸으니 소나무의 맑은 기운이 길손에게도 전해진다. 상쾌함에도 격이 있다면 춘양목에서 느껴지는 이 상쾌함이야말로 최고가 아닐까 생각된다. 나무들 하나하나에 눈을 맞춰 본다. 쭉쭉 뻗어나가기 위해 스스로 가지를 자르는 춘양목. 그 모습이 보면 볼수록 꼿꼿한 선비의 풍모를 닮았다.

조선 선비의 집에 몸을 누이다

소나무 길을 걷다보니 어느새 저녁이다. 조선 선비의 집에서 하룻밤 묵고자 춘양면의 만산고택(晩山古宅)을 찾는다. 만산 강용 선생이 지은 만산고택은 고종 15년(1878)에 지어진 집이다. 마당에 들어서니 옛 선비의 집답게 곳곳에서 단아한 기품이 느껴진다. 이 오래된 집과 마당을 가꾸고 있는 이는 만산 선생의 4대 후손 강백기 씨다. 길손을 맞이한 종손은 집의 전체적인 구조와 의미를 설명해 준다.

“조선 사대부 가옥의 가장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춘양목으로 지은 기둥은 140여 년이 지난 아직도 끄떡없습니다.” 철근, 콘크리트로 지은 현대식 아파트도 30년이 지나면 부식하고 균열이 생겨 재건축하겠다고 난리인데… 새삼 낮에 들러보고 온 춘양목의 격이 달라 보인다.

마당 정면으로 보이는 사랑채는 당시 강용 선생이 거처하던 곳이라 했다. 맨 오른쪽에 ‘晩山(만산)’이라는 현판이 있는데, 만산은 강용 선생의 호로 흥선대원군이 친필로 써주었다고 한다. 마당 왼편 서당의 ‘翰墨淸緣(한묵청연)’이라는 현판도 눈길을 끈다. 고종의 일곱 번째 아들 영친왕이 8세 때 쓴 글씨라는데 여덟 살이 어쩌면 저리도 멋진 글씨를 쓸 수 있었는지 놀라울 뿐이다. 허나 아쉽게도 이곳에 현재 걸려 있는 현판은 모두 탁본이다. 도난 때문에 모두 연세대학교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진품을 못 본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도난당하는 것 보단 낫다는 생각이 든다.

길손이 안내된 방은 마당 오른편의 별채 칠류헌(七柳軒)이다. 이 건물의 용도는 손님이 오면 모시는 장소라 했다. 방에 들어서니 싸늘함이 느껴진다. 주인장은 불을 넣어 놓을 테니 식사를 하고 오라 한다. 아쉽게도 고택에서 선비의 밥상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니 그 사이 방이 따뜻하게 데워져 있다. 잠을 청할 방은 작고 단정하다. 있는 거라곤 이불과 베개 뿐. 문고리를 걸고 누워 잠을 청하며 종가의 삶을 생각해본다. 뿌리를 기억하고 후손을 돌보며 가문의 구심점이 되어야 하는 종가. 선비정신을 대대로 전하기 위해 마음을 다지고, 일상을 다지고, 늙어가는 고택을 지키는 삶은 누구나 쉬 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종가의 후손으로 산다는 건 고단함이 수반된 크나큰 명예가 아닐까…. 이 생각 저 생각 하다 보니 어느 덧 선비 마을에 밤이 깊어 간다.

철길로만 허락된 비경을 만나다

봉화를 찾아간다고 하니 누군가 전해준 말이 있다. 봉화를 제대로 느껴보기 위해서는 기차를 타봐야 한다고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처럼 도로가 많이 놓이기 전 과거 봉화 사람들의 발이 되어준 건 기차였기 때문이다. 봉화에선 유독 많은 터널을 지나게 된다. 산이 많다 보니 터널이 많은데 이렇듯 험준한 산과 깊은 계곡 때문에 열차가 봉화의 주된 교통수단이 될 수밖에 없었다. 봉화에는 작은 간이역들이 많다. 요즘은 열차를 이용하는 승객이 줄면서 여객열차가 정차하지 않고 그냥 통과하는 역도 많아졌지만 봉화에선 기차가 서는 간이역에 내려 주변을 돌아보는 것도 재미있는 방법이다. 그중에서도 분천역은 협곡열차의 시발역으로, 산에 둘러싸인 작은 역이지만 백두대간 오지에서 반백년을 지낸 간이역이다. 협곡열차는 분천을 출발해~양원~승부~철암(태백시) 구간(27.7㎞)을 왕복하며 평소 보기 힘든 백두대간 협곡의 절경을 선사한다. 설레는 마음 가득 싣고 백두대간을 누비는 협곡열차를 타고 느릿느릿 달리다 보면 어느새 몸도 마음도 자연에 닿게 된다.

여행의 끝자락은 송이로 마무리 된다. 봉화에서는 몸값 귀한 송이가 밥에도 된장찌개에도 우동에도 들어간다. 소나무가 많다보니 소나무 뿌리에서 자라는 송이버섯이 많이 자라는 탓이다. 송이솥밥과 송이차를 마주하니 다시 한 번 향긋한 봉화의 매력에 푹 빠지고 만다.

숲을 이뤄 온 나무처럼, 꿋꿋하게 자리를 지켜 온 사람들이 사는 곳. 그리고 흐르는 물처럼 욕심 없이 살아온 그들이 지켜온 땅. 선비의 시간을 품은 자연으로 남은 봉화의 여행이 향긋하게 끝을 맺어간다.

글 이현주 사진 남윤중

출처 : 한국의재발견 사랑방
글쓴이 : 한국의재발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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