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스크랩] 약천 남구만 선생님의 이모 저모

깜보입니다 2013. 12. 6. 11:31

포은 정몽주 선생만 기리지 말고

약천 남구만 선생의 역사도 좀 살펴 봤으면 합니다.

모현면 면민 여러분 맞지요?

 

약천 선생의 권농가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강원도 동해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고  <약천문화마을>,<약천 팔경>등을 고증하여 되살리고 지역의 문화로 승화 시키고 있고.

 

-경상도 남해에서는  자암 김구, 서포 김만중, 약천 남구만, 소재 이이명 등 유배지에서 문학작품을 남긴 문인들의 삶을 소재로 <유배 문학관>을 만들어 추억하고 있다.

 

-또한 충남 홍성에서는 약천 선생이 태어난곳이라고 해서 대대적으로 군의 문화유산으로 만들어 2013년5월25일 제2회 재 너머 사래긴 밭 숲길 걷기 대회가 1500여명의 주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약천 선생의 생가가 있는 홍성읍 남산에서 구항면 보개산을 잇는 ‘재 너머 사래 긴 밭 가는 숲길’ 구간에서 열렸다.

 

용인시에서 노후를 보내면서 후학을 양성하고 멋진 권농가인 동창이 밝았느냐~를

남기신 약천 남구만 선생에 대하여 이렇게 홀대하여도 되는지 묻고 싶다. 모현면 외대옆의 장전평 사래 긴 밭도 홍성에 빼앗기고. 재 너머의 그 재인 모현면 장사리 고개도 홍성의 그 재 너머가 된 현실을 알고 있는지~!

 

용인시는 포은 정몽주선생을 대대적으로  추억하면서 장례 상여를 둘러 메고 장례 행렬이 시내를 활보하고 다니면서 용인시를 진정 死去龍仁(죽어서 가는 용인)으로 만들 셈인가~!  그분들은 연일 정씨 가문에서 행사를 하던지 포항인지 영천인지 모르겠지만 태어난곳에서 하는것이 맞을 듯 하다.

 

그분들의 살아온 발자취와 그후를 조명 해본다.

 

 

약천 남구만선생의 초상은 보물1484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보물 1484

 

南九萬(1629-1711)은 숙종 초 대사성, 형조판서를 거치고 1683년 노소론이 나뉠 때 소론의 영수가 된 인물이다. 화면의 우상단에 ‘領議政致仕藥泉南先生眞 文人領議政崔錫鼎贊’이라고 쓰여 있고 화면 좌상단에는 大司成 崔昌大가 쓴 긴 찬문이 쓰여 있다.

 

최창대가 대사성으로 있었던 것은 1711년뿐이었고 이후에는 더 높은 관직을 역임하였으므로 대사성이란 관직명으로 인하여 이 초상이 1711년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초상은 관복을 입고 교의에 앉은 전신교의좌상으로 얼굴이 정면상으로 묘사되었다는 점이 이채롭다. 오사모에 녹포단령을 착용하고 쌍학문 흉배와 서대를 하고 있다. 이 초상 가운데 가장 특이한 요소는 얼굴..

 

 

남구만초상 (용인시)

 

약천 선생의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갈담리 552

 

모현사거리에서 용인방향으로 가다가 갈월마을 입구 반대편 입구로 파담마을에 위치

 

모현사거리에서 승용차로 5

 

 

<관광자원소개>

남구만(南九萬)의 초상은 모현면 갈담리 파담마을 남춘희씨댁에 전한다. 본래 남구만의 초상은 5본이 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충청도 해미(海美)의 영당(影堂)에 임진년 (壬辰年)에 봉안하였다는 초상은 실전되었다.


현존하는 것은 국립박물관 소장본 1본과 갈담리의 가묘본(家廟本) 3본 뿐이다. 가묘본은 유복(儒服) 차림의 반신상(半身像)과 전신상(全身像), 녹포단령(綠袍團領) 차림의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이 있다.


이 초상은 그가 영의정에 재임시에 모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유복차림의 반신상은 가묘본의 전신상을 이모(移模)한 것으로, 상단의 좌측에는 최석정(崔錫鼎)의 찬문(讚文)이 있다. 현손(玄孫) 남진화(南進和)가 추서(追書)한 것이다.


현존하는 초상의 상용(相容)은 모두 정면상(正面像)이나 포치안배(布置安配)에 있어서는 국립박물관 소장본과 가묘본이 약간 다르다. 가묘본 중 녹포단령 차림의 전신교의좌상은 전신이 규각선(圭角線) 으로 포치되고, 흉배의 쌍학(雙鶴)이 요대(腰帶) 위로 노출되어 있다. 이에 반하여 박물관 소장본은 방형(方形)으로 나타나는 흉배의 쌍학 중 아래의 것은 각대(角帶)로 가리워져 있으며, 팔소매가 복부 아래로 치우쳐 하반신의 폭이 어깨부위의 넓이보다 더 크게 양변으로 돌출되어 있다.

 
안정감에 있어 서는 가묘본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호피(虎皮) 문양의 반점도 가묘본은 간결하게 표현되고 단령(團領)의 문양이 세필(細筆)된 점에 비하면, 박물관 소장본은 등 좌우에만 나타나며 조밀하게 표현되었다. 그밖에 좌대의 발 모양에 있어서도 상이점이 나타나고 있어 동일인의 작품으로 보기는 어렵다.


대부분의 초상이 7,8분면상인데 반하여 남구만의 초상은 정면필법(正面筆法) 으로 안모(顔貌)를 사출하였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회화사(繪畵史)에서 중요시된다.

 

업적과 살아 온길

 

 

남구만(南九萬, 1629 ~ 1711)


본관 의령(宜寧). 자 운로(雲路). 호 약천(藥泉) ·미재(美齋). 시호 문충(文忠). 1651(효종 2)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656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정언(正言)을 지냈다. 1660(현종 1) 이조정랑 ·집의(執義) ·응교(應敎) ·대사간(大司諫) ·승지(承旨)를 거쳐, 1668년 안변부사(安邊府使) ·전라도관찰사가 되고, 1674년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유학(儒學)
을 진흥시키고 변방수비를 다졌다.


숙종 초에 대사성 ·형조판서를 거쳐, 1679(숙종 5) 한성부좌윤을 지냈다. 서인(西人)으로서 남인(南人)을 탄핵하다가 남해(南海)로 유배되고, 이듬해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도승지 ·부제학 ·대제학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1683년 병조판서가 되어 폐사군(廢四郡)의 복치를 주장하여 무창(茂昌) ·자성(慈城) 2군을 설치하였다.


이 때 서인(西人)이 노소론(老少論)으로 분열되자 소론의 영수가 되었으며, 1684년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687년 영의정에 올랐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득세하자 강릉(江陵)에 유배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 때 다시 영의정에 기용되어, 1696년 중추부영사가 되었다.


1701년 희빈(禧嬪) 장씨의 처벌에 대해 경형(輕刑)을 주장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퇴관, 경사(經史) ·문장을 일삼았다. 송준길(宋浚吉)의 문하에서 수학, 문장과 서화에 뛰어났다. 시조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는 그의 작품이다. 문집에 《약천집(藥泉集)》이 있다.

 

<관련정보>최종수정일 : 2004 01 31
약천집 (
藥泉集) : 필사본. 34 17. 규장각도서. 1723(경종 3)에 남구만의 후손이 편집 ·간행하였다. 1~2는 시(), 3~13은 소() ·(), 14~29는 문(), 30~34는 서독(書牘)으로 되어 있다. 특히 권29 잡저(雜著)의 함흥십경도기(咸興十景圖記) ·북관십경도기(北關十景圖記) ·영남잡록(嶺南雜錄) ·연행잡록(燕行雜錄) 등의 기행문은 뛰어난 문장으로 유명하며, 독도(獨島)에 관한 기록도 있어 중요한 사료로 꼽히고 있다.

 

[형태 및 구성]

후손인 남춘희씨가 소장하고 있는 유복본은 정면 전신상으로 머리에는 흑색관을 쓰고 대수포의 학창의(鶴?衣)를 입었으며, 두 손은 복부 위에서 공수하고 있다. 학창의는 흰색의 포로 깃과 도련·소매부리에 검정색의 연()이 둘려 있다. 자연스럽게 내린 팔을 감싼 어깨와 대수포를 크고 넉넉하게 표현하였다.

소맷부리의 팔()자형 검은 연과 도련의 십일자형 연은 수직적 효과를 강조하여 화면을 길게 분할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 얼굴은 얇은 세선으로 윤곽 및 이목구비를 잡고, 음영과 굴곡 표현은 엷은 선염으로 표현하였다
.

그림의 왼쪽에는 찬문이 있는데, 영의정
최석정(崔錫鼎)이 찬한 것을 현손 남진화(南進和)가 추서하였다. 학창의 차림의 반신상은 전신상을 이모한 작품으로 보인다.

[특징]

남구만 초상은 모두 정면상인 것이 큰 특징이다. 조선시대 사대부의 초상은 좌안팔분 혹은 구분법 등으로 오른쪽으로 약간 몸을 틀고 있는 것이 대부분으로, 정면상의 남구만 초상은 이례적이다. 특히 사대부복인 학창의를 입고 있는 유복본도 같은 구도를 취하고 있어 주목된다.

안면 표현에서는 얼굴의 요철을 선염으로 표현하는 정도가 17세기에 비해 세선을 극도로 자제하고 엷은 운염법으로만 사용하려는 흔적이 역력하며, 또한 18세기 후반보다 입체감의 정도가 자연스러워 이 시기만이 가지는 양식적 특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심지가 굳으면서도 예술성이 풍부하였던
남구만의 풍채를 잘 포착한 작품으로 당대의 이름 있는 화원의 작품으로 판단된다.

[의의와 평가]

여러 벌의 관복본과 유복본으로 구성되어 문중의 후손들에게 보관되어 전하는 세트 구성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특히 정면상이라는 특성과 안면의 굴곡 있는 필법은 회화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18세기 이후 입체적 안면 묘사가 더욱 발전하는 과도기적 시기의 양식임을 드러내고 있다.

[참고문헌] 『용인시사』 2 (용인시사편찬위원회, 2006)

 

 

약천 남구만 선생의 묘역은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초부리 산 1-5번지인 하부곡 마을 입구에서 좌측 산 초입에 위치하고 있다.

남구만(1629~1711)은 조선 현종,숙종때의 문신으로, 자는 운로,호는 약천, 미재, 본관은 의령이다. 송준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효정 2(1651) 사마시를 거쳐 별시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벼슬에 역임하고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그는 재임 기간중 서인과 소론의 영수로서 경신대출척, 갑술옥사를 거치며 부침을 거듭하다가 숙종 33(1707 벼슬에서 물러나 봉조하가 되었다. 시호는 문총이다. 그는 문사, 서화에도 뛰어났다. 시조 "통창이 밝았느냐" 가 전하며, 약천집이 있다.

 

남구만의 묘소는 본래 양주의 불암산 화접동에 초장 되었다가 뒤에 모현면 초부리 하부곡마을에 이장 한 것이다.  당시 봉분은 원형이었으나, 1970년대 후반 후손들이 묘역을 확장하면서 방형의 지대석 기단을 둘러 봉토했다. 정경부인 동래 정씨와 합장한 묘소 앞에는 본래의 석물인 묘표와 망주석, 향로석 등이 배열되었다.  장명등,상석,혼유석 등의 새로 설치한 것이다. 묘표에는 음기가 없으며, 비신이 방형의 대석위에 세워져 있다. 대석 정면에는 10판의 운문판이 새겨져 있으며, 하단각면에는 6판의 당초문판이, 중앙과 각 모퉁이에는 동자주가 새겨져 있다. 가첨석 상단에는 좌우로 해태를 조각했고, 첨두에는 각각 해태의 안면을 두었다

 

 

 

 

 

 

 

 

<포은 정몽주선생의 묘역>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 문수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습니다.정몽주 선생의 고향은 경북 영천으로 천묘지(遷墓地)를 정하고 면례행열(緬禮行列)이 가는 도중 용인시 수지구 풍덕리 경계에서 잠시 쉴참에 돌풍이 갑자기  불어 명정(銘旌)이 하늘로 날아 올라가 지금의 묘소자리에 내려 앉아 는데 모두들 이곳이 명당이라 하여 이곳에 안장 하였다 전한다.

 

 

 

 

 

 

당시 고려왕권은 쇠약해질대로 쇠약해지고 조정은 썩을 대로 썩었을 뿐더러 우왕과 창왕은 王씨 자손이 아니라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떠돌아 도저히 왕씨고려를 유지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포은은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가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할 때는 이성계와 뜻을 같이 하였다.

(이런 행동을 불사이군의 충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성계일파가 최영을 처형하는 등 역성혁명을 일으켜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자 고려왕조를 지켜야 한다는 충정을 가진 포은은 명나라에 갔던 태자를 마중나간 이성계가 벽란도에서 낙마를 당한 틈을 타서 이성계의 일당인 정도전을 감금하고 조준과 남은을 귀양 보냈다
.

이는 포은이 우리나라 성리학의 창시자로, 성리학의 기본 사상인 나라에 대한 충성을 철저히 지키고자 함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역성혁명에 반대했고 대세는 이미 기운 것을 간파하고도 이성계의 병문안 차 호랑이 굴에 들어가 '단심가'를 불러 선죽교에서 조영무의 철퇴를 맞고 장렬하게 생을 마감한 것이다
.

이 때가 1392년으로 정몽주의 나이 55세였다. 포은이 타살된 후 3개월만에 이성계는 공양왕을 내치고 왕위에 올라 새 하늘을 열었다
.
포은 정몽주가 죽은 뒤 13년이 지나 이방원이 조선의 3대 왕에 등극한 태종5(1405)에 그를 영의정에 추증하였고, 당초 중들이 버려진 시신을 수습하여 개성 풍덕에 葬事한 그의 묘를 현재 위치인 용인에 이장하게되었다
.

(본시 용인으로 이장하기 위함이 아니었다는 뜻)

한편 중종 때는 정몽주를 文廟(성균관 옆에 있는 공자와 최치원, 퇴계 등 최고의 학자를 모신 곳)에 배향하는 최고의 대우를 하였다
.이는 새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데 조선에도 정몽주와 같은 충신이 필요했고 조선의 국가이념인 성리학을 뿌리내림에 있어 우리나라 성리학의 창시자인 그를 추앙하지 않으면 자기모순에 빠지기 때문이었다.

 

조선에도 왕권유지를 위하여 정몽주의 신념인 충성이 필요했고 이를 관료에게 龜鑑으로 삼기 위함이었다.이리하여 이씨조선을 개국함에 있어 逆敵이었던 그가 조선조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으니 역사는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용인시민신문 기사를 한번 보자

 

수지구에 있는 용인의 <예술의 전당격인 아트홀>이 왜 <포은 아트 홀>이 되어야 했는지 용인시 집행부에 묻고 싶다.

 

기사 언문 직접 가서 보기 (이인영 전 문화 원장의 인터뷰기사)~

아래 주소를 클릭 하시면 된다.

http://www.yongin21.co.kr/news/articleView.html?idxno=39258

 

 

 


 

 

 

출처 : 내일은 오늘의 또 다른 이름일 뿐~!
글쓴이 : 촛불아저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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