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 유명해, 더 유쾌해! 갈론구곡
계곡과 호수의 고장, 충북 괴산
갈론구곡은 신선이 내려왔다는 뜻의 강선대, 신선이 바둑을 두던 자리라는 뜻의 선국암 같은 굽이(曲) 이름에서 보듯 신선 설화와 구곡 문화가 어우러진 곳이다. 너럭바위로 맑은 물이 흐른다. 완만한 계곡 곁 노송과 야생초로 이뤄진 숲과 흙으로 덮인 길이 이어진다. 지엔씨21 제공
화양·선유·쌍곡구곡 앞에선 이황의 노래도 잊은 채
너럭바위 앉아 계곡에 발 담그고 물 흐르는 소리 듣고
충북 괴산(槐山)의 ‘괴’는 느티나무 괴다. ‘수중지왕(樹中之王)’이라 부르던 나무다. 궁궐을 괴신(槐宸)이라고도 했다. 괴산군은 607년 된 이 지명을 자부한다. 괴산군 나무(군목)도 느티나무다. 수령 100년 이상인 느티나무가 110그루, 300년 이상이 50그루다. 장연면의 오가리 느티나무(천연기념물 382호)는 900년이 넘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느티나무는 전국에 19그루다. 정자나무나 당산나무로 심은 느티나무가 흔할 리는 없다. 지난 9~10일 둘러본 괴산은 ‘물의 고장’ 같았다. 괴산 지도만 놓고 보면, 좌우를 성황천과 쌍천이 양분한다. 5개 천을 거쳐 세종시까지 이어지는 오천자전거길(bike.go.kr/nation/74_1) 주요 구간이다. 괴산의 남북을 비스듬히 가르는 달천(괴강)은 괴산호를 기점으로 굽이굽이 남쪽으로 흘러간다. 괴산 명소인 산막이옛길이 이 달천을 따라 나 있다.
괴산은 전국에서 구곡(九曲)이 가장 많은 곳이다. 주자학을 창시한 주희는 굽이(曲)를 둔 계곡을 공부하고 수양하는 데 이상적인 장소로 봤다. 중국 무이산 계곡을 무이구곡(武夷九曲)이라 하고 굽이마다 이름을 붙였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이를 따라 전국 골짜기 곳곳에 구곡을 지어 경영했다. 중국의 소상팔경(瀟湘八景)에서 따온 ‘팔경’을 붙여 ‘구곡팔경’이라 했다. 중국에 가본 적 없는 유학자들이 중국의 이상향을 조선 땅에 대입한 것이다.
달천의 오른쪽인 칠성면과 그 아래 청천면 계곡 7곳에 구곡이 놓여 있다. 대표적인 게 청천면 화양구곡(華陽九曲)이다. 화양이라는 이름에서 영화 <화양연화>(花樣年華)를 떠올릴 법도 하다. 영화는 ‘꽃 같은’이라는 뜻의 ‘花樣’, 구곡은 ‘華陽’이다. 화양구곡의 ‘화’는 중화(中華)의 화, 즉 명나라를 뜻한다. ‘일양내복(一陽來復)’의 ‘양’을 더해 명나라의 부활을 바라는 뜻으로 썼다는 해석도 나온다. 명나라에 대한 사대로 오명도 얻은 우암 송시열이 이 구곡에 화양이란 이름을 붙였다. 계곡 옆 화양서원 내 만동묘는 명나라 황제 신종과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의 위패를 둔 곳이다. 송시열은 이들 황제에게 제사를 지내라는 유언을 남겼다.
9일 오후 화양구곡에 도착한 뒤 화양서원부터 둘러봤다. 건강한 성인도 쉬이 오를 수 없는 가파른 계단의 만동묘에서 사대의 일단을 본다. 화양서원은 착취와 폐단으로 악명이 높아 고종 때 철폐됐다.
서원을 떠나 10여분 걸었을까. 화양구곡 중 핵심인 제3곡 금사담(金沙潭)에 이르니 역사에 관한 상념이 사라진다. 울창한 숲 사이로 난 골짜기에 드러난 너럭바위로 맑은 물이 흐른다. 고개를 들면 산 너머 뭉게구름이 가득하다. 아름다운 나날을 뜻하는 ‘화양연화’의 하루를 보내기에 부족함이 없는 풍경이다.
숲의 경계에 든 기암괴석에 송시열이 공부했다는 암서재(岩捿齋)가 놓였다. ‘화양’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물은 청룡처럼 흐르고, 사람은 푸른 벼랑으로 다닌다”(송시열, ‘파곡(巴谷)’ 중)는 묘사가 와 닿는 곳이다. 푸른 벼랑은 화양구곡에만 있는 건 아니다.
칠성면 쌍곡구곡 중 제2곡인 소금강은 금강산의 가파른 기암절벽을 축소해 옮겨놓은 듯하다. 표지석은 ‘병풍처럼 내린 쌍벽’이라 적었다. 벽을 뚫고 나온 소나무와 야생초의 생명력은 언제 봐도 경이롭다. 퇴계 이황, 송강 정철이 쌍곡의 산수를 노래했다. 숲과 노송, 맑은 계곡, 기암괴석은 괴산 구곡들의 공통 요소다.
쌍곡구곡의 소금강은 금강산의 기암절벽을 옮겨놓은 듯하다. 김종목 기자
얼마 전 ‘비대면 관광지’로 꼽힌 갈론구곡
가족들 여유롭고 호젓하게 물놀이하기 딱
이황은 청천면 선유구곡도 찾았다. 아홉 달을 돌아다니며 9곡의 이름을 지어 바위에 새겼다고 한다. 바둑판 모양의 기국암(棋局岩)이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속담과 관련 있다. 조선 명종 때 나무꾼이 바둑 두는 노인들을 구경하다 “신선들이 노는 선경이니 돌아가시오”라는 말에 정신 차려 보니 도낏자루는 썩어 없어진 뒤라는 전설이 내려온다.
이중환도 <택리지>에서 화양동 계곡과 함께 ‘금강산 남쪽에서는 으뜸가는 산수’라고 적었다. 전국의 여러 곳을 소금강이라 부른다. 금강산의 아우라를 강화하는 작명에서 길 막힌 금강산이 떠올랐다.
괴산의 구곡에선 주희나 송시열, 이황을 잊어도 상관없다. 소금강이든 대금강이든 대수일까. 굽이굽이 흐르는 계곡은 보기도 좋고, 놀기도 좋다. 너럭바위가 많고, 물길도 넓어 접근하기 쉽다. 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바위에 걸터앉아 발을 담근 채 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면 근심이 사라진다. 선유구곡 너럭바위 아래 소에선 대학생들이 물장구를 치며 놀았다. 설화의 신선놀음처럼 시간의 흐름을 잊는 듯하다. 현실을 잊어선 안 된다. 수영금지 부표를 둔 곳은 조심해야 한다. 술 먹고 물에 들어가는 건 금물이다. 계곡 익사자는 주로 음주자들이다.
칠성면 갈론(갈은)구곡은 화양구곡이나 선유구곡에 비해 덜 알려진 곳이다. 괴산의 구곡엔 식당이나 매점 같은 상업시설이 다른 지역보다 드문데, 갈론구곡 쪽엔 구멍가게 하나 없다.
달천(괴강)의 연하협 구름다리(위 사진)는 충청도 양반길과 산막이옛길(아래 사진)을 연결한다. 양반길은 갈론·화양·선유·쌍곡구곡으로 이어진다. 괴산호가 빚어낸 산수를 온전히 느끼려면 두 길을 이어 걷는 게 좋다. 김종목 기자·지엔씨21 제공
달천 연하협 구름다리에서 산막이옛길로 이어진
‘양반길’ 걷다보면 괴산호가 빚어낸 산수에 ‘흠뻑’
9일 갈론구곡을 찾았을 때 드문드문 산보객들이 지나다녔다. 물놀이 나온 가족이 돗자리를 펴고 호젓하게 놀았다.
지난달 말엔 한국관광공사의 비대면(언택트) 관광지에 뽑혔다. 공사가 선정한 강소형 잠재관광지 중 하나다.
세종충북지사는 갈론구곡을 알리려 기자들을 초청했다. 윤승환 지사장은 “코로나19를 피해 상대적으로 여유롭고 안전한 여행을 즐길 수 있다”고 말했다. 코로나19 관광지로 여러 언론사가 홍보하면 마냥 여유로울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여행 기사의 딜레마다.
괴산의 구곡은 ‘길’이다. 계곡 곁 길을 걷는 맛도 좋다. 충청도 양반길(95㎞)은 갈론·화양·선유·쌍곡구곡을 연결한다. 흙길을 보존한 양반길은 달천의 연하협 구름다리를 통해 산막이옛길로 이어진다. 괴산호가 빚어내는 산수를 제대로 누릴 수 있는 공간이다.
괴산군 홈페이지(goesan.go.kr)에 구곡과 길, 느티나무 정보가 나와 있다. 정보 중엔 화양구곡(華陽九谷)처럼 구곡(九曲)을 구곡(九谷)이라 표기한 것도 많다. ‘굽이’를 ‘계곡’으로 착각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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