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년을 살아낸 뼈, 그날의 역사를 쏟아내다
노형석 입력 2020.09.21. 05:07 수정 2020.09.21. 08:16 댓글 5개
[동물유체 고고학의 '발견']
신라 서봉총에 생굴 채운 항아리
월성 인공연못 바닥에 깔린 곰뼈
평양 석암리 도미·고등어 뼈부터
꿩·돔·상어까지 다양한 개체 확인
흙과 뒤엉킨 고대사의 증인들
물체질로 조금씩 걸려내 분석
권력자의 제사·식생활·문화 등
옛사람들 취향·생활상 일러줘
걸음마 수준이던 동물유체 고고학
한국 고대사 발굴의 획기적 기회로
영남대박물관이 소장한 임당고분 출토 동물 뼈 해산물 유체와 저장토기들.
“아니, 여기서 왜 이런 게 나왔지?”
흙 속에서 희끗희끗하게 드러난 건 바로 굴 껍데기들이었다. 1500여년 전 신라 왕릉 무덤 가장자리를 파고들어가던 조사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2016년 10월7일, 신라 고도인 경주 노서동 대릉원 국가사적 구역의 서봉총 유적 현장은 흥분에 휩싸였다. 그해 4월부터 서봉총 남분(남쪽 무덤)을 발굴 중이던 국립중앙박물관 조사단이 무덤가에서 1500여년 전 만든 제례용 큰항아리들과 그 안에 든 굴과 조개류 등의 해산물을 무더기로 발견한 것이다. 이후 한달 동안 추가 발굴을 해보니 새 사실들이 속속 드러났다. 고분 가장자리를 두른 둘레돌(호석)의 바깥에 높이 1m를 넘고 무게가 50㎏에 이르는 큰항아리(대호) 10여개가 열 지어 묻혀 있었다. 그중 4개 항아리 속에 굵직한 굴 껍데기들이 가득 차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 신라 왕족들이 내륙인 경주에서 조상 무덤에 해산물을 가득 올려 제사하는 독특한 얼개가 윤곽을 드러낸 것이다. 이 희한한 발견은 걸음마 차원이던 국내 동물 고고학 분야가 3년 뒤 한국 고고학의 새 지평을 여는 주역으로 떠오른 계기가 된다.
남분 봉분 언저리에서 출토된 4호 대호의 출토 장면. 아랫부분만 남은 항아리 안에 허연빛의 생굴 껍데기가 가득 들어찼다.
■ 생굴 채운 대호의 미스터리 항아리 속엔 큰 덩어리의 굴 껍데기들과 조개와 소라, 납작한 육면체 모양의 제사용 토기들이 흙과 엉킨 채 뒤섞여 있었다. 이 해산물 먹거리들은 서너개 큰항아리에 담긴 무게만 300~400㎏이나 됐다. 고대 고분에서 이렇게 막대한 분량의 해산물 유물들이 나온 적은 과거에 없었다. 현장 조사원이었던 윤온식 국립대구박물관 연구사는 “1980년대까지 남분 주변에 민가가 들어서 다 파괴된 줄 알았는데, 흙층을 걷어내니 굴을 채운 큰항아리들이 호석렬을 따라 잇따라 드러나 신기하고 놀라웠다”고 떠올렸다.
굴들은 껍데기째 출토됐으므로 생굴이었다. 토함산 너머 동해안에서 채취해 바로 무덤 쪽으로 옮겨 제사에 쓴 것이 확실했다. 무덤 호석 둘레 줄줄이 해산물 항아리를 세워 제사를 지낸 풍습이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조사단에선 토론이 벌어졌다. 왜 쉽게 상하는 생굴을 내륙까지 가져와 한가득 무덤 앞에 올렸을까? 왕족들은 싱싱한 해산물을 제수로 선호했던 것일까? 온갖 호기심이 조사단을 자극했다.
경산 임당·조영동 고분의 토기 안에서 무더기로 나온 꿩 뼈들. 영남 지역 고대인들이 꿩을 즐겨 먹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데이비드총’의 해산물들을 물 체질하다 서봉총은 먼저 쌓은 직경 46.7m의 북쪽 큰 무덤(북분)에 직경 25m의 작은 남분이 붙은 연접분이다. 칼 등의 무기류가 나오지 않고 화려한 금관이 나온 북분을 왕비의 것, 출토품이 빈약한 남분을 왕자 무덤으로 추정해왔다. 특히 북분은 1926년 일제 학자들의 발굴 당시 봉황 모양 장식이 달린 금관이 출토된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조선을 방문 중이던 스웨덴 황태자 구스타프 아돌프가 조사 현장을 찾아와 직접 발굴한 인연을 맺은 까닭에 스웨덴의 한자표기 ‘서전’(瑞典)과 출토된 ‘봉황’(鳳凰) 금관장식의 앞 한 글자씩을 따서 ‘서봉총’이란 이름이 붙었다.
이와 달리 남분은 원래 ‘데이비드총’이란 더욱 낯선 이름으로 불렸다. 1929년 영국인 퍼시벌 데이비드가 서봉총 북분의 발굴 성과를 듣고 일제의 발굴허가를 따낸 뒤 주검 자리만 파헤쳤으나 유물은 별로 나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붙은 무덤 이름 말고는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고 떠났다. 일제 학자들이 조사한 북분도 결국 보고서가 나오지 않았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나서야 보고서를 내기 위해 재조사에 나선 박물관 쪽이 2016년 기대하지 않았던 남분에서 조사 착수 다섯달 만에 무덤 제례용 항아리들과 역대 최대 분량의 제사 먹거리 유물들을 찾는 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하지만 현장 조사의 한계는 명확했다. 항아리 속 해산물은 100㎞ 이상 떨어진 동해안 남해안에서 실어 와 채운 것이 분명했다. 싱싱하고 진귀한 것들을 직송해 왔으니 최대한 가짓수 다양한 해산물이 담겼을 텐데 당장 눈에 띄는 것은 굴과 조개 등의 패각류뿐이다.
경주 서봉총 남분 큰항아리 내부에서 해산물 유체들과 납작한 제례용 토기가 뒤섞인 채 발견된 모습.
박진일 연구관과 윤온식 연구사 등 조사단원들은 항아리 속 내용물의 비밀을 푸는 것은 역량 밖이라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남분의 항아리 세군데에서 흙, 토기와 섞여 나온 수십킬로그램의 굴 껍데기와 조개껍데기 덩어리들을 통째로 한 전문가에게 보냈다. 동물 유체 고고학 분야의 국내 전문가인 김건수 목포대 교수였다. 짐승과 생선의 뼈를 표본과 비교하며 가려내는 동종 작업의 명수인 그는 서봉총 남분의 항아리 속의 굴과 조개 덩어리들을 받은 뒤 1년 넘게 분석했다. 부슬거리는 내용물들을 약품을 써서 경화 처리하고, 흙과 섞인 미세한 뼈 덩어리들을 조금씩 조금씩 물 체질하면서 걸러낸 뒤 돋보기, 현미경 등을 써서 일일이 특징을 가려내어 종을 확정하고 계통을 짓는 작업을 되풀이했다. “천천히 가면, 무조건 시간이 해결해준다”고 되뇌며 끈질기게 물 체질 분석을 거듭한 끝에 그는 우리가 몰랐던 1500여년 전 신라 귀족들의 무덤 제례와 식생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서봉총 남분 호석을 따라 묻힌 큰항아리 안 내용물에서 확인된 돌고래 뼈. 앞쪽의 발(지느러미)에 해당하는 전지골 부분이다.
■ 싱싱한 해산물 제사상이 바로 절대권력이었다 지난 7일 국립중앙박물관은 발굴 3년 만에 남분의 4개 항아리에서 나온 해산물에 대한 김 교수팀의 분석 결과를 발표했다.
내용은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굴과 조개뿐 아니라 무려 7700여점의 해산물 유체가 검출됐다. 굴과 가리비, 다슬기 등의 조개류가 1883점이고 어류는 3배가 넘는 5700여점이나 됐다. 특히 포유류인 돌고래의 앞지느러미 격인 전지골과 파충류인 남생이의 등갑, 신경 독을 품은 복어, 성게, 도미 등 다종다양한 해산물들이 항아리 속에 꼭꼭 들어찼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돌고래의 몸에서 전지골의 부위를 담은 모식도.
신라 왕족들이 풍성한 해산물로 다양한 식생활을 즐겼다는 사실과 왕릉급 고분에는 싱싱한 해산물을 가득 담은 제기를 둘러싸게 하고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오늘날 서해에서만 잡히는 민어 뼈가 경주에서 쓰지 않는 토기 등과 함께 나와서 다른 지역의 인사들이 왕족의 죽음을 맞아 어물을 들고 조문을 왔다는 추정도 할 수 있게 됐다. 가을에 주로 잡히는 회유 어종인 청어와 방어 등도 확인돼 무덤이 조성되고 제사를 봉안한 시기가 6세기 가을이라고 짚을 수 있다는 게 박물관 쪽 설명이다. 흥미로운 건 항아리가 놓인 호석렬 남쪽에서 제사 기반시설인 상석 자취가 발견됐다는 점이다. 상석에 제수를 놓고 정례 제사를 지내는 건 7세기 태종무열왕릉에서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이번에 해산물 항아리와 함께 상석이 남분에서 발견되면서 이런 상석 제사의 시기가 100년 앞당겨지게 됐다. 그렇다면, 왜 싱싱한 해산물을 바다에서 내륙으로 다량 가져와 제사 음식으로 쓰려 한 것일까. 보고서를 쓴 김대환 연구사는 “경주 내륙에서 싱싱한 생물로 해산물 제사상을 차리는 것 자체가 신라 왕실의 절대권력을 생생하게 내보이는 것”이라고 풀었다. 5세기 지증왕 때 얼음 저장고인 석빙고를 건립한 것이나, 바다에서 내륙으로 신선한 굴, 성게, 복어 등의 어물을 가져오는 것도 수취체계를 틀어쥔 강고한 권력이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해산물 제사 자체가 권력의 상징이란 해석이었다.
남분 대호 안에서 발견된 성게의 유체.
■ 빛을 뿜기 시작한 생물 유체 고고학 동물유체 고고학은 1980년대 국내 구석기 고고학의 개척자인 파른 손보기가 서해안 패총 등에서 조개 등 유체의 동종 분류를 시도한 것을 시초로 꼽지만, 1950년대부터 동물고고학이 정착된 일본에 비해 90년대까지 걸음마 수준을 면치 못했다. 지난 10여년 전부터 자원하는 연구자들이 생겨나 서구와 일본에 유학하고 조금씩 연구 성과를 쌓다가 최근 들어 경주 등지에서 유기물 유물 발굴 성과가 쏟아지자 철제 무기, 장신구, 토기, 무덤 얼개 등에 바탕을 뒀던 기존 고고학 조사에 획기적인 지형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얘기다.
옛 신라궁터인 경주 월성의 인공연못(해자)에서 출토된 곰 뼈를 동물유체고고학자가 정리하고 있다. 지난 4월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이 곰 뼈가 반달가슴곰의 것으로 고급가죽을 쓰기 위해 해체됐을 것으로 추정한다는 분석 결과를 발표했다.
실제로 올해 들어 동물 고고학계는 굵직한 성과들을 쏟아냈다. 4월1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월성의 인공연못 해자 바닥에서 나온 곰 뼈를 동물유체연구자 박헌석 박사가 분석한 결과 신라 군대의 깃발 장식에 쓰이는 가죽을 얻기 위해 해체한 것들이었음을 밝혀냈다고 발표했다. 국립중앙박물관도 2년 이상의 작업 끝에 일제가 100년 전 발굴한 평양 석암리 9호분의 유물들을 분석한 보고서를 냈다. 무덤 안 낙랑 토기에 들어 있던 어류의 척추골과 과거 일제 학자들이 촬영한 사진에 나온 어류 뼈 사진을 분석해 넙치류와 도미, 고등어의 것이란 분석 결과를 내놓았다. 100여년 전 발굴한 뒤 분석하지 못했던 것을 100년이 지나 재조사로 실체를 밝힌 셈이다. 1982년 이래 10여년 동안 영남대박물관이 발굴해 소장해온 경산 임당·조영동 4~5세기 고분 유적 출토품은 이준정 서울대 교수팀이 200개체가 넘는 인골과 더불어 토기 부장품에 있는 새 뼈와 각종 해산물의 골격을 분석해왔다. 꿩과 돼지, 소, 개, 고둥, 돔, 상어 등 다양한 개체의 실체를 확인하며 주목을 받았다. 조영동 고분에서 나온 한 토기에서는 무려 70개체가 넘는 꿩의 뼈를 발견해 당시 경산 사람들이 꿩 요리를 좋아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됐다.
1916년 일제가 조사한 평양 석암리 9호분 낙랑고분 출토 토기에서 나온 생선 뼛조각.
100여년 만에 국립중앙박물관이 정밀분석을 벌여 이 뼈가 넙치의 일종임을 밝혀 보고서에 소개했다.
서봉총 발굴단장을 지낸 함순섭 국립대구박물관장은 “유적에서 나온 동식물 유체의 종류만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 상황을 복원하는 게 유체 고고학의 본령”이라며 “토기나 장신구 같은 기존 고고유물이나 문헌이 규명할 수 없는 옛사람들의 취향이나 사회 얼개, 생활상을 짚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고고학의 블루오션이 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국립중앙박물관·영남대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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