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펌) 지리산의 이원규 시인

깜보입니다 2021. 1. 24. 13:27

이원규 : 책(2021.01.11발행)-나는 지리산에 산다(휴먼앤북스,328ㅉ, 15,000원)

 

시인으로 지내던 1998년 봄 서울역에서 전라선 밤기차에 올랐다. 구례구역에 내린 뒤 지리산에 입산한 지 23년째, 산중 빈집을 떠돌며 이사만 여덟 번을 했다. 잠시 집을 비우고 ‘4대강을 살리자’며 먼길을 나선 지 얼마 뒤, 3만 리 순례의 후유증으로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지독한 고통으로 찾은 병원에서 결핵성 늑막염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홀연 지리산으로 되돌아간 그가 어느 날부터 안개와 구름 속의 야생화를 담기 시작했다. 비바람이 불고 먹구름이 밀려오면 날마다 산에 올랐다. 날마다 수백 장의 사진을 찍었지만 모두 지우다보니 7년 동안 단 3장만을 남기기도 했다. 몽환적인 사진 한 장을 위해 야영을 하고 우중의 산정에서 한 송이 꽃 앞에 쭈그려 앉아 아홉 시간을 기다렸고 비바람 몰아치는 산길에서 구르기도 다반사였다. 마침내 도처에 숨었던 야생화들이 환한 얼굴을 드러냈고, 빛이 없는 산속에서 별들이 찬란하게 쏟아져 내렸다. 비로소 족필(足筆)의 시인이 된 그가 이 책에 지극히 사랑하는 산과 꽃과 별의 자취를 남겼다. 오늘도 그는 세상도처의 꽃들과 벗하며 지리산 품에 안겨 산다

 

책 소개

지리산 입산 후 날마다 되새기는 문장이 있다.


“우리가 오기 전에도 지리산은 있어왔고, 우리가 떠난 뒤에도 섬진강은 유장하게 흐를 것이다…….”
숨가쁜 마음이 한결 웅숭깊어진다. 생의 한철 머물다 가는 나그네로서 초심을 잃지 않으려 애써 보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천 년 전에도 더울 때는 덥고 추울 때는 추웠을 것이다. 지리산과 섬진강이 언제나 암수한몸이었듯이 나 또한 지리산 마고할미의 품에 안기거나 섬진강변에 깃들어 어느덧 23년 동안 잘 놀고, 잘 먹고, 잘 울고, 잘 잤다.
- 11쪽

10여 년 동안 저자거리를 벗어나 안개와 구름 속의 야생화와 천년 폐사지의 별빛을 보며 지난 생을 복기했다. 문단의 술자리를 피하다보니 오해도 많이 받았다. 그래도 말더듬이처럼, 한글을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가갸거겨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다시 발로 쓰는 족필足筆의 시를 꿈꾸었다. 다만 가더라도 내가 먼저 가고 그 뒤에 발자국처럼 시가 나를 따라오기를, 그동안 쓴 시를 불태워 시가 좀 더 빛나기를!
- 37쪽

그동안 오직 야생화만 생각하며 지리산뿐만 아니라 전국의 산과 강과 바닷가를 어슬렁거렸다. 21세기 시작부터 10여 년 동안 한반도 남쪽 3만 리를 걸어보았지만, 인간사는 고사하고 야생화도 제대로 몰랐다. 세상이 대립과 갈등의 아수라지옥으로만 보였다.
그러나 아무도 봐주는 이 없어도 이 땅 곳곳에 피어나는 야생화들에게 마음을 주면서부터는 달라졌다. 그늘이든 양지든, 바닷가든 산정이든 제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꽃을 피우고 씨앗을 맺으며 수천 년 동안 멸종되지 않고 자생해온 야생화들에게 경외감이 들었다. 그 마음의 속내는 이 세상을 당달봉사처럼 허투루 살아온 지천명의 참회였다.
- 90쪽

같은 하늘 아래 초록별 지구에 살아도 누구는 사람의 시간, 누구는 짐승의 시간, 누구는 악마의 시간으로 또 하루를 보낸다. 사람이 사람의 시간으로 사는 것도 만만찮은데, 이 땅의 시절들은 아무리 봐도 짐승의 시간을 넘어 악마의 시간으로 접어든 지 참으로 오래된 것 같다.
가당치 않은 미몽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오래도록 하늘의 시간을 꿈꿔왔다. 지리산 입산이 그러했고, 구름과 안개 속의 야생화인 몽유운무화를 찍으면서부터 더더욱 간절해졌다. 번잡하고 탁한 사람의 시간에서 잠시라도 벗어나 비와 눈이 내리는 산속으로 도피하고 싶었다. 차라리 비겁한 도피자여도 좋고, 후안무치의 무책임한 사람이어도 좋았다.
- 140쪽

언제나 그렇듯이 미리 상상하고 예감하고 예측하는 일은 즐겁다. 남몰래 속으로 후끈 달아오르는 신명을 어찌할까. 5월 말부터 백주대낮에 홀로 상상하고 예감하며 반딧불이의 행로와 별들의 일주를 예측했다. 예감은 역시 몸으로 하는 것, 밤마다 별과 반딧불이보다 먼저 자리를 잡고 온몸 캄캄하게 기다려야 했다. ‘살아 춤추는 지상의 별’ 반딧불이와 ‘시공초월’ 천상의 별이 어떻게 마주치는지 궁금했다.
보름 정도 마음을 주고 몸을 부리다보니 단 하룻밤, 그것도 세 시간 정도만 ‘우주 쇼’를 보여주었다. 상상과 예감과 예측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처럼 지리산 반딧불이와 별들이 춤을 추었다. 그리하여 별 궤적과 반디의 춤이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았다. 오랫동안 홀로 숨죽이며 꿈꾸던 사진이었다. 반딧불이의 군무가 보여주는 ‘오래된 미래’가 눈물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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