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펌)쌀, 재난, 국가

깜보입니다 2021. 2. 6. 14:46

"한국의 유례없는 성공도, 세대불평등도 벼농사체제에서 기인한다"

[경향신문]
<불평등의 세대> 이어 신간 <쌀 재난 국가> 낸 이철승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

                   2월 2일 이철승 서강대학교 사회학과 교수가 경향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영민 기자


한국인은 어떻게 불평등해졌는가. 이철승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50)의 신간 <쌀 재난 국가>의 부제다. 묵직한 질문이다.

386 기득권 논란이 뜨거웠던 지난 2019년, 때마침 출간된 이 교수의 전작 <불평등의 세대>가 주목받았다.

기존의 세대논의가 주로 정치권 386의 기회독점을 두고 벌어졌다면, 이 교수의 저작은 이 세대기득권 문제가 한국사회의 경제발전에도 착종돼 있다는 주장을 펼쳤기 때문이다.

전작에서 이 교수는 이 세대네트워크의 뿌리엔 동아시아적 발전을 가능케 했던 벼농사협업시스템이 있다고 주장했다.

지난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엽의 한국의 압축적 성장과 성공을 가능하게 했던 핵심 열쇳말이다.

마냥 긍정적 역할만 한 것은 아니다. 특히 최근 10여년간 한국사회의 진영분화, 노동시장 불평등을 악화시킨 주범이기도 했다. 체제의 시효가 다한 것이다.

이 교수의 신작은 이 ‘한국적 발전과 불평등’의 기원을 추적한 책이다.

2월 2일 서울 서강대에서 이 교수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기자간담회를 열었습니다. 인문사회과학자가 신간을 내 기자간담회를 한 것은 적어도 최근 20여년간은 없었던 일인 것 같은데요.

“그래요? 출판사에서 하자고 해서 한 것이긴 한데 기자들이 많이 오긴 했더라고요. 약간 어색하긴 했습니다. 학자가 책 한권 냈다고 이렇게까지.”

 

-지난해 말과 올해 초, 여러 매체에 실린 ‘2021년에 발간될 기대되는 신간’ 기사의 맨 앞자리에 이 교수의 책을 올려놓은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기사를 체크하나요.

“제 책과 관련된 보도는 저도 읽어보죠. 제 입장에서는 잘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본인들이 기대했던 책인지 여부는 잘 모르겠어요. 이게 워낙 긴 역사에 대한 ‘황당한’ 이야기일 수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 오랫동안 생각한 프로젝트이긴 합니다. 원래 세대론보다 먼저 작업하고 있었는데, <불평등의 세대>가 먼저 나와 공론화되는 바람에 이게 나중에 나온 셈이 되었죠.”

 

-불평등의 기원을 이야기하는 것이니 큰 이야기입니다. 사실 사회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에게는 사회학 3대 고전의 하나로 이야기되는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대한 안티테제를 담고 있으니 저자의 야심작이라고나 할까요.

“사회학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읽힐 수 있겠네요. 나름대로 막스 베버 테제에 대한 비판이라고 쓴 것이니까요. 역사학 쪽에서는 브로델을 수용하면서 이를 비판한 것이고, 인류학에서는 레비스트로스를 가져오면서 동시에 그 구조를 뛰어넘어보자는 논의를 담았습니다.”

 

-전작 <불평등의 세대>가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왜일까요.

“책이 진영 사이의 갈등 근거로 소비되길 바라지 않았습니다. 한쪽에서는 분단 기득권세력의 앞잡이로 세대론이 사용되고 있다고 비판한 반면, 다른 쪽에서는 ‘거봐라, 586이 다 해 먹는다’는 식으로 소비되고 끝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노동시장에서 저를 포함한 50대가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살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것이잖아요. 우리가 너무 많고 많이 태어나, 또 너무 잘 싸워 많이 올려놓은 임금테이블을 다 같이 공유하며 50대에 진입하면서 초래되는 한국사회의 여러 문제, 비정규직 청년실업, 기업의 구조적 효율성 저하 등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볼까 같이 고민하자는 것인데, 막상 그 문제는 별로 해결을 하지도 못하고 넘어가 버리는….”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죠. 386 기득권 문제는 뜨거운 감자인 것 같습니다. 당장 논란 과정에서 제기된 ‘공정’ 문제에 대해 세대 간의, 그리고 세대 내의 시각차도 워낙 벌어져 있어서요. 최근 한겨레신문 기자 41명이 자사 보도 태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에 대한 시각차를 보면 이른바 ‘똥팔육’을 비판하는 젊은 세대들이 말하는 공정이란 무엇일까 고민이 되던데요.

“젊은 세대들이 말하는 공정이라는 키워드엔 여러 가지가 섞여 있다고 봅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불평등은 시장 메커니즘으로 만들어지는데, 사회학자 오찬호 선생의 표현에 따르면 젊은 친구들이 차별에 찬성한다는 것인데, 차별을 어떻게 정당화하느냐의 문제라고 봅니다. 자신들은 정당화하고 싶지만 정당화가 안 되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을 공정하지 않다고 받아들인다는 것이거든요. 특히 90년대 생들, 젊은 세대들의 내부 불평등이 공정한 시장경쟁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가 아니라고 판단하는 것이죠. 물론 이 공정의 기준이 우리 세대와 같냐는 것이 한가지고….”

 

-전형적인 386의 반응은 ‘우리가 교육을 못 시켰다’는 것인데.

“윗세대는 젊은 세대의 경쟁체제에 노출된 적이 없어요. 실제 젊은 세대들, 학생들을 학교에서 가르쳐보면 정말 뛰어납니다. 우리가 교육을 잘 시켰어요. 굉장히 똑똑하고 능력이 있고 스펙까지 빠지는 것이 없어요. 책도 많이 읽고 글도 잘 쓰고…. 문제는 잡(job·일자리)을 잡기 어렵고, 노동시장에서 일자리를 잡았을 경우도 대기업이냐 중소기업이냐에 따라 처우가 극단적으로 나뉩니다. 여기에 집을 장만하거나 결혼할 때 또다시 겪는 극복할 수 없는 부모 수준의 차별이 계속 켜켜이 쌓인 것이죠. 젊은 친구들하고 이야기해보면 <불평등의 세대>에서 이야기하는 세대 간 불평등에 찬성하지 않는다기보다, 그게 근원인 것은 이해하겠는데, 자신들은 솔직히 말해 자신들 내부의 차별이 너무 크기 때문에 차별이 어디서부터 시작했는지가 오히려 큰 관심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하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전작을 낸 뒤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코로나19 발발입니다. 원래도 재난은 주요키워드로 다룰 예정이었죠.

“벼농사체제 자체가 재난과의 싸움이고 재난극복 과정입니다. 전통적인 벼농사체제에서는 가뭄, 홍수, 역병이 바로 그 재난인데, 코로나19 시기이니 그 문제를 들여다본 것이지요.”

 

-사실 지난 총선 과정을 지금에 와서 평가해보면 여당에 180석을 몰아준 것은 결국 코로나19 극복과정에 대한 평가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런데 이건 마냥 긍정적으로만 평가할 것이 아닌가, 양가적입니다. 잘해도 임금, 못해도 임금 탓이니까요. 언제든지 뒤집힐 수 있거든요. 동아시아 사회에서 국가의 역할이 재난의 극복과 구휼로 최소화돼 있었고, 핵심은 마을단위의 협업생산과 결과의 개인적 소유라는 분석틀이 인상적입니다.

                                     이철승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 /김영민 기자

 

“사실 두레나 품앗이에 대한 연구는 역사학과 민속학 연구에 많이 기대고 있습니다. 계급이나 신분 이야기는 많이 안 했어요. 기존의 민족주의 역사학과 식민지근대화론이 기존의 좌와 우는 꼭 아닌데, 하나는 민족주의 사관이고 또 하나는 엘리트 사관입니다. 엘리트 사관은 외부효과, 그러니까 일제가 커다란 역할을 했다는 시각입니다. 이 두 조류 모두에 거리를 유지하고 한국의 경제발전 성과를 설명하는 제3의 길은 없을까 하는 모색입니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산업화세대의 성과를 박정희와 분리하는 그런 포부 내지는 의도가 있습니다. 그 엘리트들이 아니었더라도, 심지어 장면 정권이 남아 있더라도 한국의 경제발전은 어쨌든 이뤄졌을 것이라고 본 겁니다. 왜? 전근대 시대부터 우리가 발전시켜온 협업의 기술 때문이에요. 국사책에서 봤던 두레·품앗이가 사실 간단한 게 아닙니다. 두레·품앗이 내부에서 강력하게 협동을 만들어내는 제도적 기재가 있었고, 노동의 표준화와 숙련을 증진시키는 내부 통제기제가 있었다는 겁니다. 그것이 세대를 몇백년 건너뛴 것도 아니고 바로 우리 아버지 세대죠. 1920년대에서 1940년대까지 산업화세대들이 농촌에서 배웠던 몸에 배어 있는 ‘아비투스’가, 이들이 대거 도시에 상경해 공장과 사무실을 디자인할 때 이들의 협업의 원리도 정착된 겁니다. 연공제는 하나의 에피소드 같은 산물인데, 지금의 노동시장을 규정하는 강력한 것이 됐다는 주장입니다.”

 

-사실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오원철, 아웅산에서 사망한 김재익 같은 관료들의 시대에 앞선 선구안 내지는 역할이 중요했다고 산업사나 경제사하는 분들이 주장합니다.

“물론 발전국가론에서 이건희나 정주영의 역할을 강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동아시아의 실패를 설명하는 이론이 막스 베버나 소위 오리엔탈리즘의 관점이었다면 이전 세대의 서구학자들이 동아시아의 예외적인 성공을 설명할 때 여러 버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박정희가 잘했다, 재경부 관리들이 금융제도를 잘 세팅해 선별지원하면서 세계시장에서 승자들만을 잘 키워내는 지원책을 마련했기 때문이라는 등 여러 버전의 발전주의 국가논의가 있습니다. 뭐 그렇게 볼 수 있다고 봅니다.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데, 그렇다면 도대체 사무실과 공장에서 라디오, TV, 배, 자동차를 만든 사람들의 스킬(skill), 이 사람들의 협업을 통한 기술은 누가 가르쳤나, 그 질문은 왜 안 하냐는 겁니다. 그걸 정주영이나 이건희가 가르쳤을까요, 아니면 박정희나 기술관료들이 가르쳤을까요. 그 부분이 블랙박스로 남아 있거든요. 아무도 이 질문을 안 하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최근에 이뤄진 공장작업시스템에 대한 연구를 보면 한국은 숙련을 동반하지 않은, 이것도 일종의 엘리트 이론인데, 일본식 장인 모델이 아니라 숙련을 향상시키지 않은 엔지니어가 주도한 모델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 엔지니어의 숙련은 또 어디서 왔냐는 질문을 똑같이 할 수 있습니다. 추적해보면 다 외국에 가서 거꾸로 리버스엔지니어링한 다음에 다시 조립하면서 자기들끼리 습득했다고 하거든요. 위에서 오더가 내려왔다고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저는 스스로 유물론자라고 생각하는데, 마르크스주의적 생산양식과 계급갈등의 길도 아니고, 베버주의적으로 프로테스탄트나 유교적인 윤리로 무장한 그런 신과의 계약으로 노동의 동기를 스스로 부여하는 그런 길도 아닌 제3의 길이 있었다고 본 것입니다.”

 

-벼농사 협업체제에서 그 시스템이 기원했다는 거죠.

“기업현장의 작업장 시스템을 깔면서, 이 전통적인 도덕 내지는 제도, 법적·정치적 제도가 아니라 몸에 배어 있는 인간관계상의 제도를 어떻게 이용했느냐의 문제이죠. 반도체도 그렇지만, 동아시아가 특화하는 산업은 협업의 기회를 극단화시킨 경우가 많죠. 불량률을 최소화하는 극도의 긴밀한 협업의 과정, 그게 어디서 왔느냐. 그게 벼농사체제에서 유래한다는 것이죠. 물론 협업의 기술을 잘 픽업해 이용하는 것이 엘리트의 몫이긴 합니다. 이 부분이 이야기가 안 되어 있기 때문에 동아시아 발전은 뛰어난 지도자를 만났기 때문에 잘된 것이라는 식의 발전주의 국가론을 계속 되풀이해온 겁니다. 시진핑이나 박정희가 잘한 것일까요. 일본 메이지 지도자들이?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산업화세대 자신들이잖아요. 본인들의 능력 내지는 본인들이 이룰 수 있던 저변을, 우리 부모세대잖아요? 그분들에게 온전히 돌려주고 싶은 그런 뜻도 있고요. 어떻게 말하면 이 책은 부모세대에 대한 전상서입니다. 박정희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가지고 그렇게 싸웠는데 사실 그렇게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겁니다.”

 

-코로나19 국면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지 않나요. 사실 방역을 잘한 것은 국민이었는데.

“그렇죠. 정부가 그렇게 해달라고 하니 지금도 국민이 알아서 자제를 해주잖아요. 놀러갈 것 안 가고 집에 있어 주잖아요. 서로 눈치 보면서. 물론 앞에서 적절한 시그널을 적시에 보내는 것은 중요한데 서구에서 그거 안 하나요. 다 합니다. 공동체가 상호조율능력이 깔려 있지 않으면 정부의 협조요청이나 시그널이 먹혀들질 않습니다. 서구를 보면 잘 드러나잖아요. 서구의 개인주의 사회에서 얼마나 쉽게 망가지는지.”

 

-알겠습니다. 이 체제에 특유한 질시의 문화를 이야기했어요. 전작에서도. 정체성이 만들어지는 게 자기의 노동이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평가하느냐, 거기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남들이 뭘 가지고 뭘 만드는지 몰라야 관심을 안 가지는데, 여기서는 그게 안 되죠. 제가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에 18년을 살아봤잖아요(편집자 주: 그는 서강대에 오기 전에 시카고대학교에서 테뉴어를 받아 교수로 재직했다). ‘저 사람은 노벨상을 받았으니 100만달러를 받겠구나’하고 마는 거예요. 서로 신경을 안 써요. 우리는 월급을 다 얼마를 받는지 서로 묻습니다. 다 까잖아요. 자기가 받는 돈이 더 적으면 부글부글 끓습니다. 이전에 한 유수의 재벌이 호봉제를 하다가 능력급·성과급을 도입해 개인별 차등을 처음 뒀을 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과장·부장·대리할 것 없이 우르르 인사부에 몰려와 항의하더라는 거예요. 자기들끼리 점심시간에 너 얼마냐, 서로 다 까봤던 거예요. 우리는 그런 문화였던 것입니다. 성과급이나 직무급이라고 해도 무늬만 실행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죠.”

 

-연공제 시스템이 최근년간 한국사회 불평등 문제의 핵심으로 보고 있는데요.

                                 이철승 교수의 신간 <쌀 재난 국가>/문학과 지성사

 

 

“그 연공제를 지탱하기 위해 나머지 세대를 희생시키는 시스템입니다. 이게 생산성을 위해서라고 하는데 진짜 생산성을 위해서냐, 하면 그건 아닙니다. 제 포인트는 연공급제가 바뀌지 않는 것이, 가장 상위에 있는 계층이 예전에는 노동귀족이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한시적 자본가라고 불러야 한다고 봐요.”

 

-왜 그렇죠.

“주인이 없잖아요. 주인이 없는 조직에서 잠깐 연공급 최상위에 머무르면서 이 모든 시스템을 돌아가도록 주도한 다음에 연공제 상위에서 5년, 10년 있으면서 수혜를 누리고 다음에 오는 사람에게 넘기는, 한시적 자본가 역할을 하는 거죠. 대학도 공기업도, 공기업의 돈줄은 기획재정부가 쥐고 있다고 하지만 기본적으로 독립채산제이고 감사만 하니. 설령 사주가 있는 회사도 노조가 강력하면 컨트롤하지 못합니다. 대기업 정규직의 경우는 노조라기보다 임금상승투쟁기구라고 불러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원래 노동조합은 총노동을 대변해 위와 아래 간격 레벨을 축소해야 하는데, 한국에서 노조의 역할은 위를 끝없이 올려 더 많이 받아가게 하고, 밑은 그로 인해서 더 고통스럽게 살도록 만드는 시스템이거든요. 원래 노동의 권리와 평등을 위해 싸우는 것이 노조인데 그 역할을 못 하는 거죠.”

 

-이다음에 쓸 책은 불평등의 극복을 어떻게 할 것이냐는 논의를 담은 거죠.

“종전에는 불평등의 극복을 이야기한다면 노동이 자본으로부터 얼마나 많이 가져올 것인가, 이게 전통적인 패러다임인데 그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서 노동이 어떻게 스스로 자본이 될 수 있을까를 모색해보려고 해요. 일차적으로는 무기계약직이 되자는 것이고. 창업생태계에 대한 책이 될 겁니다. 각자가 스스로 자기 노동을 통제하면서 자기의 생산물과 생산과정을 타인에 의해서 점유되지 않는. 그러려면 교육시스템이 잘 깔려야 하고 시장의 전횡에 맞서 스스로 생존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나갈 수 있어야 하죠. 너무 이상적인 건가요.”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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