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펌)문학이라는 ‘부캐 놀이’

깜보입니다 2022. 6. 8. 15:51

문학이라는 ‘부캐 놀이’

등록 :2022-06-07 18:15수정 :2022-06-08 02:35

최재봉 기자 사진
[최재봉의 탐문] _16 부캐
 
김연수의 소설집에 <나는 유령 작가입니다>라는 게 있지만, 이 책에 대필 작가가 등장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김연수는 남들의 이야기를 수집해서 개연성 있는 이야기로 재구성해 내놓는 자신의 작업이 곧 대필 작가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뜻에서 이런 제목을 붙이지 않았을까. 그러고 보면 소설 또는 문학이란 본질적으로 유령 작가의 대필이라 하겠고, 그런 점에서 문학은 전형적인 ‘부캐놀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지난해 10월15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플라네타 문학상 시상식에서 깜짝 소동이 벌어졌다. 미출간 소설 원고를 대상으로 삼는 이 상의 상금은 100만유로(한화 약 13억원)로, 노벨상 상금을 살짝 상회하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스페인 국왕 부부까지 참석하는 이 성대한 시상식의 주인공은 <짐승>이라는 역사 스릴러를 응모한 익명의 작가 카르멘 몰라. 여성 형사를 주인공 삼은 범죄 스릴러 3부작으로 40만부 넘는 판매고를 올린 이 작가는 남편과 세 아이와 함께 사는 수학 전공 교수로 자신을 소개해왔다.
 
시상식에 참석한 이들을 놀라게 한 것은 그날 처음으로 공개된 몰라의 정체였다. 연단에 오른 수상자는 한 사람이 아니라 세 사람, 그것도 남성들이었다! 소설과 텔레비전 드라마 각본을 쓰는 이들은 공동 작업을 하기로 하면서 “별생각 없이” 필명을 정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들이 가짜 프로필을 만들고 그를 기반으로 매체와 인터뷰까지 한 것은 독자와 언론을 속인 행위라는 비판이 나왔다. 몰라는 역시 익명으로 활동하는 이탈리아 작가 엘레나 페란테에 곧잘 견주어지곤 했는데, 흥미로운 것은 페란테 역시 실제로는 남성 작가라는 추측이 있다는 사실이다.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다른 이름으로 활동하는 작가들의 사례는 드물지 않다. 국내에서라면 에스에프(SF) 작가이자 영화평론가인 듀나가 대표적이다.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낸 소설 <자기 앞의 생>으로 유일하게 두번째 공쿠르상을 수상한 일은 잘 알려져 있다.
 
포르투갈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는 무려 70개가 넘는 필명을 사용해서 ‘도피의 예술가’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였다. 해리 포터 시리즈의 작가 조앤 롤링은 로버트 갤브레이스라는 남자 이름으로 소설 몇 편을 출간한 바 있다. 스티븐 킹도 리처드 바크먼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소설들을 내놓았다. <신들은 바다로 떠났다>로 부커상을 받은 존 밴빌은 벤저민 블랙이라는 이름으로 추리소설을 쓰기도 했다. 조르주 심농은 초기에는 20여개의 필명을 사용해 대중소설을 쓰다가 매그레 반장 캐릭터가 성공을 거두자 비로소 본명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영화 원작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스위스 작가 파스칼 메르시어는 철학자 페터 비에리의 필명인데, 철학 관련서에는 본명을 쓰고 소설에는 필명을 쓰는 식으로 두 정체성을 구분하고 있다. 한편 <삼총사>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는 70명이 넘는 ‘대리 필자’를 고용해 그들이 쓴 원고를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한 것으로 유명하다.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는 이를 가리켜 ‘문학 공장’이라 표현하기도 했다.제 이름과 정체를 숨기고 다른 이름으로 활동하는 것을 요즘 유행하는 말로 ‘부캐놀이’라 하면 어떨까. ‘한라산’의 시인 이산하의 본명은 이상백인데, 그가 소설가 박상륭을 흠모하며 형이상학적인 시를 쓰던 젊은 시절에는 ‘이륭’을 필명으로 삼았다. 그 뒤 1980년대의 엄혹한 시기에 ‘한라산’과 같은 목소리 높은 시를 쓰면서 그는 민족주의의 냄새가 물씬 나는 새로운 필명 ‘이산하’를 내세웠는데, 그 이름은 그에게는 명예이자 업보이기도 했다. 지난해 초 시집 <악의 평범성>을 내고 인터뷰를 마친 뒤 헤어진 그가 한밤에 보내온 문자 메시지에서 “불쑥불쑥 ‘이륭’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든다”고 털어놓은 데에서 그가 느낀 부담과 고통을 짐작할 수 있었다.1983년에 나온 <전태일 평전> 초판은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제목으로 삼고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 엮음’이라고 밝혔다. 작고한 조영래 변호사가 실제 지은이라는 사실은 시절이 좀 좋아진 나중에야 공개되었다. 김응교 숙명여대 교수는 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수배 중에 쓴 책 <문답으로 풀어본 문학 이야기>(1990)를 ‘백민’이라는 이름으로 출간했다. 그의 첫 책이었다.
 
1980년에 무크 형태로 나온 <실천문학> 창간호에는 늦봄(문익환), 신경림, 조태일 등과 함께 ‘무단’(舞丹)이라는 이름으로 된 이의 시가 실렸는데, 그가 고은 시인이라는 사실 역시 나중에야 확인되었다.1990년대 초에는 이인화의 소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가 표절 시비에 휘말려 시끄러웠다. 그러자 평론가 류철균은 이 작품이 표절이 아니라 혼성모방이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기법을 사용한 것이라며 옹호하는 평론을 발표했다. 류철균이 곧 이인화라는 사실, 그러니까 이인화는 류철균의 필명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추가로 파문이 일었다.
 
‘이인화’는 염상섭의 소설 <만세전>의 주인공 이름이기도 하지만, 한자로는 ‘二人化’ 또는 ‘異人化’로 새길 수도 있다. 류철균이 둘로 나뉘거나 다른 사람으로 바뀐다는 뜻이니, ‘부캐놀이’의 취지에 부합하는 필명이라 하겠다.과거에는 여성 작가가 남성의 이름을 필명으로 삼는 일이 흔했다. 여성의 글쓰기에 대한 차별과 편견 때문이었다. 브론테 자매가 대표적으로, 샬럿, 에밀리, 앤 세 자매는 각각 커러, 엘리스, 액턴 벨이라는 남자 이름으로 자신들의 대표작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애그니스 그레이>를 발표했다. <미들마치>의 작가 조지 엘리엇 역시 여성으로, 본명이 메리 앤 에번스지만 지극히 남성적인 필명을 택했고 끝까지 이 이름을 고수했다. 20세기 미국의 에스에프 작가인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도 본명이 앨리스 브래들리 셸던인 여성이지만, 브론테 자매나 조지 엘리엇과 같은 이유로 남성 필명을 사용했다.
 
1991년부터 시상하고 있는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상(지금 이름은 ‘다른 상’(Otherwise Award))은 젠더 문제에 관한 시야를 넓힌 에스에프·판타지 작품을 대상으로 삼아 필명에 담긴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유령 작가’(ghost writer)는 정치인이나 경제인, 연예인 등 유명 인사들의 자서전을 대신 써주는 대필 작가를 가리키는 말이다. 김연수의 소설집에 <나는 유령 작가입니다>라는 게 있지만, 이 책에 대필 작가가 등장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김연수는 남들의 이야기를 수집해서 개연성 있는 이야기로 재구성해 내놓는 자신의 작업이 곧 대필 작가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뜻에서 이런 제목을 붙이지 않았을까. 그러고 보면 소설 또는 문학이란 본질적으로 유령 작가의 대필이라 하겠고, 그런 점에서 문학은 전형적인 ‘부캐놀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뮤지컬과 영화로도 만들어진 프랑스 작가 에드몽 로스탕의 희곡 <시라노>는 ‘부캐 놀이’라는 문학의 본질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로 소개할 만하다.
 
문무를 겸비한 귀족 시라노는 미모의 사촌 누이 록산을 흠모하지만, 록산은 시라노의 부하인 잘생긴 청년 크리스티앙과 사랑에 빠진다. 기형에 가깝게 큰 코 때문에 감히 사랑의 고백을 하지 못하는 시라노는 외모가 출중하지만 표현에 서툰 크리스티앙을 앞세워 록산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글로 쓰기로 한다.크리스티앙에게 ‘협업’을 제안하면서 시라노는 그 일을 “시인이라면 한번 해보고 싶은 실험”이라고 말한다. 그가 자신의 작업을 대필 작가의 그것과 비슷하게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필 작가를 비유적으로 ‘그림자 작가’(shadow writer)라고도 하는데, 시라노가 크리스티앙을 설득하느라 건네는 말 중에 ‘그림자’라는 표현이 나온다. “자넨 당당하게 걷고, 난 그림자처럼 자넬 따를 걸세. 난 자네의 재치가, 자넨 나의 아름다움이 되는 거지.”두 사람이 함께 전장에 나아간 뒤에도 시라노는 크리스티앙의 이름으로 록산에게 끊임없이 사랑의 편지를 보내고, 록산은 이제 크리스티앙의 외모보다는 편지의 문장들에 더 매혹된다. 크리스티앙을 처음 보았을 때 “그의 이마에는 재치, 천재성이 번뜩여요”라며 그의 외모를 찬미했던 록산은 이제 “당신의 편지들은 날 취하게 만들었어요”라며 “내가 숭배하는 건 당신의 잘생긴 외모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제부터는 스포일러에 해당하겠지만, 전쟁에서 입은 부상으로 죽음을 앞둔 크리스티앙이 시라노에게 “그녀가 사랑하는 건 바로 당신이에요”라 말하고, 크리스티앙에 이어 시라노 역시 죽은 뒤에야 사태의 진상을 알게 된 록산이 “난 단 한 사람을 사랑했고, 그를 두번씩이나 잃는구나!”라며 탄식하는 이야기의 결말은 ‘얼굴 천재’에 대한 ‘문장 천재’의 승리를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최재봉 | 책지성팀 선임기자1988년에 한겨레에 들어와 1992년부터 문학 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다. 작가들과 독자들 사이의 가교 역할에 충실하며, 문학의 본질과 변화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자 한다. 지은 책으로 <역사와 만나는 문학기행> <거울 나라의 작가들> <그 작가, 그 공간>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에드거 스노 자서전> <악평> <제목은 뭐로 하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