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스크랩] 퍼옴. 왕릉의 깊이는 얼마?

깜보입니다 2007. 10. 26. 09:51
일반적으로 보통 무덤들은 넉 자(1.2m)정도의 깊이로 판다. 아무리 깊은 것도 여섯 자(1.8m)를 넘지 않는다. 흔히 민간에서는 무덤을 팔 때 "상투 끝이 보일락 말락 할 때까지만 파라"라는 속설이 있어 깊이 묻는 것을 꺼린다. 그러나 왕릉은 열 자(3.1m)정도 파고 시신을 묻는다. 보통 무덤에 비하여 배에 가깝다.

무엇 때문에 왕릉은 열 자나 파는 걸까? 임금 '왕(王)'자가 '십(十)'자의 上下를 막은 모양이기 때문에 열 자 깊이가 바로 왕기(王氣)를 받는 위치라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왕기는 땅 속 열자 깊이에서 난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믿음이 일반에 알려지면 너도나도 이 방법을 따라 할 터이니 왕릉에 참여했던 지관들 사이에서는 이를 비밀로 하는 것이 불문율로 전해져 왔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속설과는 상관없이 왕릉을 이처럼 깊게 판 것은 중국의 깊게 묻는 심장법(深葬法)을 따른 것이다. 중국에서는 황제의 능이 도굴 당하지 않도록 깊게 묻는 심장법을 써 왔다.
그렇다면 왕릉을 이처럼 깊게 판 것은 무슨 까닭인가?
첫째, 열 자 정도의 깊이에 시신을 묻으면 빗물이나 습기가 이르지 못해 온기를 보존해 줄 뿐만 아니라, 한기도 막아 주어 겨울에도 시신이 어는 것을 방지해 준다.
둘째, 깊게 묻으면 무덤 속에 벌레나 뱀, 개구리, 나무뿌리 등이 침범하지 못하기 때문에 시신을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다.
셋째, 깊게 묻었기 때문에 도굴을 방지 할 수 있다. 얕게 묻으면 도굴로 인하여 부장품의 도난은 물론 시신까지 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릉에 비해 일반 무덤들은 대개 얕게 판다. 그것도 왕릉의 절반도 안되게 파고 시신을 묻는다. 만일 깊게 팔 경우 물이 나올 가능성이 그만큼 더 커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관들은 자신이 잡아 준 묏자리에서 물이 나올 것을 염려해서 가능하면 얕게 파도록 한다.

그렇다면 왕릉은 어떻게 해서 이런 위험을 피할 수 있었을까? 조선시대 왕릉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같이 언덕바지나 구릉(丘陵)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웬만한 깊이에서도 물이 잘 나오지 않는다. 설사 매장 뒤에 물이 나온다 할지라도 이 점을 감안하여 미리 충분한 대비를 한다. 관을 안치한 석실(石室)이나 관(棺) 외부에 회를 바르고 다시 주위에 재를 16cm정도의 두께로 쌓아 물기가 스며드는 것을 막았다.


참고 문헌
밤 나무골 이야기(2004.06 제14호) 60P 율곡학회
출처 : 종묘를 사랑하는 사람들
글쓴이 : 권기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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