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숙종시대 충청도 '병적기록부' 발견>

깜보입니다 2007. 11. 4. 23:21
<숙종시대 충청도 '병적기록부' 발견>
연합뉴스 | 기사입력 2007-11-04 07:03 | 최종수정 2007-11-04 16:24

17세기 충청도 '병적기록부' 발견

토지박물관 3천878명 군적 입수.."수록 정보 무궁무진"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거주지와 신장, 나이, 얼굴 생김새, 신체적 특징 등의 신상정보를 자세하게 담은 17세기 후반 조선의 병적(兵籍) 기록부가 발견됐다.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관장 조유전)은 조선 숙종시대 충청도 관찰사 휘하 군인들의 개인신상 정보를 수록한 군적(軍籍) 자료 3책을 최근 한 문중으로부터 구입했다고 4일 밝혔다.

병적 기록부 3책 중 2책은 작성 시기가 각각 강희(康熙) 18년(숙종 5년, 1679)과 강희 36년(숙종 23년, 1697)이며 다른 1책은 앞장 일부가 떨어져 나가 작성연대를 알 수 없다.

이 자료들을 검토한 육사 교수부장 이현수 준장은 "조선시대 군적 자료로는 서애 류성룡 가문에 전하는 17세기 초반의 '진관관병용모책'(鎭管官兵容貌冊)과 육사박물관이 소장 중인 18세기 후반 자료 정도만 알려져 있다"면서 "이번 군적은 그 자체로 대단히 희귀한 자료인 데다 분량과 그에 따른 수록 정보가 다른 군적보다 광범위하다"고 평가했다.

아직 문서 전체에 대한 세부적인 검토는 이뤄지지는 않았으나 이들 3책에는 총 3천878명에 달하는 신상명세가 올라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토지박물관이 추계한 결과, 1679년 군적에 632명, 1697년 군적에 1천767명, 제3책에 1천479명에 관한 정보가 각각 수록됐다.

17세기 충청도 '병적기록부' 발견

다만 1697년 군적 마지막 부분에는 총 숫자를 1천905명으로 기록하고 있어 실제와 차이를 보인다.

이들 군적에는 지금의 사단장, 여단장, 연대장, 대대장, 소대장 등등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 무관직들인 천총(千摠.정3품), 파총(把摠.종4품), 초관(哨官.종9품), 기총(旗摠), 대장(隊長)을 필두로 그 예하 소속 인력에 대한 개별 신상 정보가 수록했다.

이현수 준장은 "이 문서에 수록된 인물 모두가 현역 군인은 아니며, 전체 3분의 2 가량은 '보인'(保人)이라고 해서 정규 군인을 경제적으로 뒷바라지 한 사람들"이라면서 "현역 군인으로 등록된 사람 중에서도 상당수는 1년에 일정 기간만 교대로 군대에 징집되는 대상이었다"고 말했다.

따라서 이번 군적 자료는 "조선왕조가 병역 자원들을 어떻게 관리하고 파악했는지를 엿보는 데 결정적인 자료가 된다"고 이 준장은 덧붙였다.

군적은 임진왜란 이전 조선 전기에는 언제건 실제 군대로 징발할 수 있는 명단이라는 실용적인 측면이 강했으나, 조선후기에는 군포(軍布)라고 하는 일종의 국방세금을 거두기 위한 기초자료로 주로 활용됐다.

군적은 병적 자원별로 이름과 나이, 거주지, 키, 얼굴 피부 특징, 신체 전반(특히 흉터 여부)에 대한 특징, 주특기, 나아가 신원보증인과 군적에 편입된 시기 등까지 빠짐없이 수록했다.

예컨대 1697년 군적 중 제7 좌사좌초관(左司左哨官.중대 정도에 해당) 예하 일기(一旗.소대 정도에 해당)에 소속된 임유청(林有靑)이란 사람의 항목을 보면 나이 43세에 병촌(幷村)이란 곳에 살며, 얼굴에는 마(麻) 즉, 마마 자국이 있고, 염(髥.수염)은 적으며(小), 왼쪽 빰에는 흉터가 있다고 했고, 아버지는 '맛생', 주특기는 포(砲.포병)라고 적었다.

17세기 충청도 '병적기록부' 발견

토지박물관 심광주 실장은 "이번 군적 자료가 수록한 정보는 무궁무진하다고 할 수 있다"면서 "예컨대 신장 정보를 통해 신장 평균치를 낼 수 있을 것이고, 마마 흉터 소지자를 분석하면 천연두 발병에 대한 유의미한 결과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군적은 자료 출처가 명재(明齋) 윤증(尹拯) 가문인 데다 그의 아들인 윤행교(尹行敎)가 숙종 37년(1698)에 충청도관찰사에 제수된 역사적 사실로 볼 때, 윤행교의 관찰사 재직 시절 감영에 있다 윤씨 가문으로 흘러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군적은 승정원일기를 쓴 뒷면을 이용해 작성했다. 종이 재활용인 셈인데, 승정원일기는 영조 4년(1728) 11월에 해당하는 기사가 확인된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