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석가탑 ‘묵서지편’ 봉인의 비밀

깜보입니다 2007. 11. 4. 23:12
석가탑 ‘묵서지편’ 봉인의 비밀
한겨레 임종업 기자
» ‘꼬리가 몸통을 흔든다’는 말은 석가탑에서 나온 묵서지편(墨書紙片)
‘꼬리가 몸통을 흔든다’는 말은 석가탑에서 나온 묵서지편(墨書紙片)과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하 무구정경)의 관계에 적실하다.

그 동안 무구정경은 석가탑이 조성된 서기 751년에 탑 안에 넣은 것으로 간주되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이라고 기려져왔다. 그런데 묵서지편 판독 결과 △석가탑이 고려 초인 1024년과 1038년 두 차례 해체 보수한 사실 △그 당시 무구정경을 새로 넣었다는 의미로 읽히는 문구가 확인되면서 세계 최고의 지위가 위협받게 생겼다. 만일 통일신라때 것을 다시 넣은 게 아니라 고려 때 새로 넣은 거라면 세계 최고(最古)의 자리는 770년께 간행된 일본의 ‘백만탑다라니’한테로 넘어간다. 그동안 곁다리로 취급되던 떡진 종이가 국보인 무구정경의 운명을 좌우하고 있는 셈이다.

무구정경 ‘세계 최고’ 논란부를 사료
중앙박물관 수장고에 40년간 방치
박물관쪽 늑장·무성의…‘고의성’ 의혹도

묵서지편은 1966년 석가탑 해체 복원 당시 2층 탑신부 사리공 사리함에서 무구정경과 함께 발견된 떡처럼 뭉쳐진 종이뭉치다. 무구정경은 1989년 일본의 지류문화재 복원 전문회사인 오카보코도(岡墨光堂)에 맡겨 깔끔하게 수리돼 국내 최고는 물론 세계 최고의 인쇄물이라는 영광을 독차지해왔다. 반면 묵서지편은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봉인된 채 40년동안 방치돼 왔다. 물론 1988~89년 무구정경 복원 당시 최소한의 보존 조처를 했으며(1차 작업) 1997년 종이떡을 하나하나 펴는 2차작업을 했다. 1차, 2차 ‘보존작업’을 하는 몇 개월을 빼도 ‘40년’에서 큰 차가 없을 듯하다.

» 무구정경의 복원 전(위)과 후(아래).
묵서지편이 석가탑을 보수한 기록을 적은 중수기라는 이야기가 공식적으로 나온 것은 2005년 9월.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이하 박물관)의 이 아무개 학예연구실장은 “고려시대 초·중기에 해당하는 중국 연호가 보이고, 석탑 중수와 관련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사실 정도를 파악한 상황”이라며 다음해부터 본격 판독 작업을 시작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당시 박물관장이었던 이건무 교수는 그해 국정감사에서 늑장핀다는 지적을 받고 판독작업 착수를 지시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정작 조사위원회가 꾸려진 것은 2년 뒤인 올해 5월. 이승재 교수(서울대 언어학과)와 함께 판독작업에 참여한 노명호 교수(서울대 국사학과)는 자료를 한꺼번에 제공받지 못하고 일부는 판독 중에 넘겨 받았다고 말했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

사실 묵서지편은 10년 전인 1997년에 낱장으로 펴는 작업이 완료됐다. 당시 외부인력으로 박지선씨(현 용인대 문화재보존학과 교수)를 도와 이 작업에 참여한 천주현씨(현 박물관 보존과학팀)의 말. “지하 작업실(현 고궁박물관)에서 넉달에 걸쳐 작업을 끝내고 사진촬영도 마무리했다. 또 묵서에서 연대를 알 수 있는 연호가 나와 놀랐다. 당연히 윗선에 보고됐을 거다.” 당시 수장고 관리 담당 소재국씨(현 고궁박물관장)는 “박물관에서 공식발표하기 전이라 극비사항에 속해 몇 사람밖에 알지 못했다”고 전했다. 그는 “묵서지편이라는 이름처럼 판독 전부터 묵서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어 펼침 작업 도중에 구경하러 간 적이 있다”고 말했다. 당시 박물관 학예실장이었던 이건무 교수는 “문서의 성격을 보고받지 못했다. 만일 알았다면 방치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관장이었던 정양모 교수는 “그토록 중요한 사안이면 보고가 없을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보고받은 바 없다”고 말했다. 일선에서는 알았지만 위에까지 보고가 안됐다는 추론.


» 무구정경과 묵서지편이 나온 불국사 석가탑.
왜일까? 1997, 1998년이 박물관 이전 준비로 한창 바빴다는 게 대체적인 의견이다. 소재국 관장은 “일이 산더미 같았다. 그 일을 맡아서 하라는 지시를 받아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이 기계인가”라고 말했다. 급한 일에 밀렸다는 얘기다. 거기에다 윗선에서는 현장 장악력이 없었던 듯하다. “박물관은 여러 사업을 하기 때문에 보고받지 못하면 현장에서의 일은 알 수 없다.”(이건무 교수)

더 중요한 문제는 보존처리 따로 판독작업 따로였던 점. 당시 펼침작업을 담당한 박지선, 천주현씨는 외부인력이었던데다 맡은 일 자체가 하드웨어 작업에 국한되었다. 그렇다고 이들에게 문서를 판독할 능력이 있는 인력이 따라붙지도 않았다. 보존처리와 판독을 기계적으로 나누어 동시작업 아닌 선후작업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기껏 판독을 위한 기초작업을 다 해놓고는 도로 수장고에 넣어두었다가 10년 뒤인 올해 조사위원회가 구성되어 판독작업에 나선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일부러 펼침작업과 판독을 미룬 것은 아닐까.

묵서지편을 펴서 공개하지 않으면 무구정경은 붙박이 세계 최고인데, 괜히 잘못 건들여 긁어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있나, 혹은 위험부담이 있는 일에 내가 총대를 멜 필요가 있나 하고 판단한 사람은 없었을까. 당사자들은 펄쩍 뛸 일이지만. 무구정경의 간행시기가 고려로 내려올 가능성을 언급하는 것 자체를 비애국적으로 보는 현실에서 그런 혐의를 말끔히 지울 수는 없다. 이름을 밝히기 곤란한 문화계 인사는 묵서지편의 내용분석을 두고 “누구 좋으라고 하는 소리냐?”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90년대 중반까지 종이떡을 펼칠 국내인력이 없었다는 박물관쪽의 해명은 사실로 보인다. 97년 박지선 교수의 펼침작업에 조수로 참여한 천주현씨는 종이떡 분리해체는 습도를 일정한 수준으로 맞추지 않으면 불가능한 작업이라면서 정교한 기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일본에서 그 기술을 배운 것으로 알려졌다.

아무튼 묵서지편을 둘러싼 해프닝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전한다. 국립중앙박물관은 통이 커 10년 또는 40년 단위로 움직인다는 것. 앞으로 문서의 완전한 해독과 무구정경의 발간연대 확정은 적어도 10년을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기사등록 : 2007-11-01 오후 07:5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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