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e이야기

안국동별궁이야기

깜보입니다 2007. 11. 5. 20:00
다시찾은 안국동 별궁


I 안국동별궁의 건립과 변천사

최근 문화재청에서는 건물터(현재 서울 안국동 풍문여고)와 담장 일부만 전해져 오고 있어 건물 소재를 알 수 없었던 안국동별궁의 건물일부를 현지 및 자료조사와 관계자 면담 등을 통해 40여년 만에 찾게 되었습니다. 언론보도 등을 통해 이미 잘 알려진 사실들을 제외하고 조사과정에서 밝혀낸 몇 가지 흥미로운 내용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려고 합니다.

안국동별궁을 건립하게 된 배경은 앞선 임금인 헌종과 철종이 후사가 없었는데 반해 원자(元子)를 얻게 된 고종은 매우 기뻐하였고, 원자의 왕세자 책봉과 동시에 가례소(嘉禮所)를 마련하기 위해 별궁 건축을 하명했던것으로 보입니다. 고종실록과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에 의하면 고종 16년(1879년) 11월15일에 고종이 별궁을 지을 것을 명하였으며, 같은 달 19일에 안국동에 터를 정하여 공사를 시작, 이듬해인 고종 17년(1880년) 9월21일 공사관계자들을 포상하였고, 9월29일 왕비 및 세자를 대동하고 역사가 끝난 별궁에 임금이 직접 행차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종17년 9월경에 완공(약10개월 소요)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해 뒤인 고종18년 12월9일 삼간택을 통해 세자빈을 선택한 후에 기거할 별궁을 안국동별궁으로 정하라는 고종의 지시가 있었고 다음해 (고종19년) 2월21일 왕세자(순종 당시8세)의 친영례(親迎禮)가 있게 됩니다.

고종이 왕실의 가례소로 쓰기 위해 특별히 안국동별궁의 영건을 하명하였을 때에는 왕실의 장구한 번창과 서운이 대대에 미치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나 안국동별궁은 이후 왕조의 몰락과 함께 폐궁이 되어 망국의 한을 안은 궁중나인들의 거소(1910년경)로 변하고 맙니다. 이후 1936년 큰길에 면해 있는 768평이 최창학에게 15만원에 낙찰, 이듬해에는 나머지 4000여 평이 민대식(閔大植)에게 불하되어 경성휘문소학교(京城徽文小學校)가 설립되었고 1944년에는 현 풍문여고의 전신인 풍문여학교가 자리 잡게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고종실록에 나타나는 별궁 내 건물은 현광루(顯光樓)와 경연당(慶衍堂) (현재 고양시 소재 골프장 내에 위치한 건물로 추정), 정화당(正和堂) (우이동 소재 모 기업 연수원 내에 위치한 건물로 추정), 정상루(定祥樓)(소재미상) 등이 있습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평면도에 따르면 안국동별궁은 대지 면적이 6000평이 넘었음을 알 수 있고, 강진철(姜晋哲)의 안동별궁고(安洞別宮考, 1963.12)에는 ‘우뚝솟은 큰대문과 긴줄의 행랑이 달린 장려(壯麗)한 별궁이 있어 행인들의 주목을 끌어 왔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현재 남아있는 건물에서 보이는 공포수법이나 단청무늬, 막새문양, 용두 등에서 나타나는 품격으로 미루어 보건데 꽤나 화려하고 위용이 장대하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대략적인 건물 실측결과 경연당 96.4평, 현광루 24.14평, 행각 4.7평, 정화당 85평 정도임)

이러한 안국동별궁 건물이 옮겨지게 된 것은 건물이 학교 앞마당에 위치하고 있어서 학교 운동장 확보를 위한 현실적인 필요에 따른 것으로 보이며, 당시 고양시 소재 골프장과 관련이 있던 모씨가 일부는 골프장내에 그리고 또 일부는 본인 별장에 해체 이전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대한 기록은 학교연혁에 ‘1965.8.31 구관2동 해축 (정화당 및 연경당과 현광루)’ 이라고 되어있고 학교 내에 있는 표석에는 이축 장소가 서삼릉과 우이동으로 적혀있고 이건공사에 직접 관여했던 관계자의 증언도 일치합니다.



II 명칭에 관하여
최근의 언론기사에서는 하나같이 안동별궁으로 칭하고 있는데 언제부터 또 무슨 근거로 안동별궁으로 불리웠는지 정확한 근거를 확인 할 길은 없으나, 지금까지의 조사 결과, 1927년 1월1일 발간된 별건곤(잡지) 제3호에 이규완 이란 분이 갑신정변 회고기사를 쓰면서 안동별궁으로 호칭하고 있어, 적어도 1927년 이전부터 안동별궁으로 쓰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36년6월3일자와 7월1일자 동아일보 및 동년 7월12일자 조선중앙일보에 별궁의 매각사실과 일부가 헐리게 된다는 내용의 기사 중에도 안동별궁으로 호칭하고 있기도 하구요.(이에 대해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에 문의한 결과 안국동을 약칭하여 안동으로 칭한 것으로 보인다는 대답이 있었습니다. 서울육백년사에는 안국방(坊)의 소안동에 자리하고 있어 안동별궁이라 부른다고 되어 있습니다.)



한편, 위에서 언급한 고종실록과 승정원일기 및 일성록에서는 안국동별궁으로 칭하고 있습니다. 가장 최근에 안국동별궁으로 칭한 사례는 1959년 7.1 일자 국민보 기사에 ‘이왕가의 후예들은 어떻게 살고 있나’ 제하의 글에서 보이고 있습니다. 본 글에서는 건립당시의 공식명칭으로 보이는 안국동별궁을 취하였으나, 명칭과 관련해서는 나중에 문화재 지정을 위해서도 좀더 세부적인 검토와 연구가 있어야 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III 안국동별궁과 갑신정변


안국동별궁이 지은 지 불과 4년 만에 재가 되어 사라질 뻔한 아찔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갑신정변(甲申政變, 고종21, 1884)은 김옥균과 박영효, 홍영식 등 개화당이 일본의 힘을 이용하여 청(淸)을 의지하고 있던 민씨 중심의 사대당 일파를 물리치고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하여 일대 개혁을 추구했던 사건이었습니다. 1884년 12월4일 저녁, 우정국 개국 축하연을 이용하여 거사를 계획하고 행사 초기에 인근


에 위치한 안국동별궁에 방화한 후,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사대당 관련자들을 제거 시킬 계획이었죠. 그러나 결국 방화에 실패하고 대신 주변의 민가에 불을 지르게 됩니다. 이후 개혁에 성공하는 듯했으나 삼일만에 실패로 돌아간 것은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 입니다.

재로 변할 뻔 했던 시련을 용케 피한 안국동별궁!한때는 왕실의 화려한 혼례와 행사가 열리는 영화로운 건물이었을 별궁이 125년여의 그리 길지 않은 세월을 지내오면서 지어진지 85년 만에 제자리를 떠나고, 그 이후 40여년을 잊혀진 건물로 지내오는 등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온 내력은 왕조의 쇠망과 근대사의 질곡을 한눈으로 보여 주는 것 같아 못내 만감이 교차합니다.


▷ 문화재청 혁신인사기획관 권석주 사무관
게시일 2006-11-29 16:37:00.0

'문화유산e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릉단오제이야기  (0) 2007.11.05
소령원이야기  (0) 2007.11.05
의상대사  (0) 2007.11.05
스크랩-동명이야기  (0) 2007.11.05
스크랩-신안유물  (0) 2007.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