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화를 통해 본 세계무형유산 강릉단오제 | ||||||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 등재 경과 및 의미2005년 11월 25일 강릉단오제가 유네스코의 제 3차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에 등재됨으로써 우리나라의 세 번째 세계무형문화유산이 되었습니다. 강릉단오제의 등재는 그동안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더욱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강릉단오제를 세계무형유산 후보로 신청한 사실을 중국의 언론이 보도하자 중국 측은 한국이 중국의 단오절을 도둑질하여 유네스코에 등재하려고 한다면서 거센 비난과 항의를 하는 돌발 상황이 발생하였으며, 급기야 한-중 공동 등재론 까지 제기되었으며 동북공정에 이은 또 다른 외교 마찰로 비화되기 일보직전까지 발전되었습니다. 이에 강릉시, 외교부 및 문화재청 등 유관기관이 적극 대응하여 다행히 파국을 모면한 바 있습니다. 한편, 그동안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심사위원으로 활동하던 우리나라 임돈희 교수가 임기만료로 물러나고 대륙 안배의 원칙에 따라 중국 측 인사가 심사위원으로 위촉되는 설상가상의 상황이 전개되었습니다. 따라서 중국인 심사위원이 방해하고 로비할 경우 강릉단오제의 등재는 기대하기 어렵게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가능한 한 다수의 국가가 이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나라처럼 한 국가가 연속 3회 등재되는 것은 허용되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무형문화유산보호협약이 발효되면(2006년 3월 예정) 이 프로그램은 종료가 되고 앞으로는 동 협약에 의해 구성되는 정부간위원회에서 인류대표무형유산목록과 소멸위험에 처한 무형유산목록을 작성하게 되며, 이미 등재된 세계무형유산은 대표목록에 자동 편입 됩니다. 앞으로는 협약에 의해 목록에 등재되므로 보다 까다롭고 제한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리한 여건 하에서도 강릉단오제가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강릉단오제가 중국의 단오절에서 유래되었다는 종속설에서 벗어나 독창성을 국제기구로부터 인정받고 세계인의 무형유산 및 세계인의 축제로 승격되었다는데 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강릉단오제에 얽힌 신화 우리나라 대표적인 전통축제인 강릉단오제는 대관령의 국사성황(國師城隍) 신앙과 단오라는 세시민속이 결합하여 신앙과 놀이 및 난장(亂場)이 조화를 이룬 전국 최대 규모의 축제로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강릉단오제의 정확한 유래와 전승과정은 아직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으며 단편적인 기록을 통해 오랜 세월동안 많은 변화를 겪으면서 전승된 것으로 짐작되고 있습니다. 특히 근대에 이르러 강릉단오제는 1909년경 일본인에 의해 폐지되어 전승이 중단됩니다. 그러나 강릉시내 중앙시장 상인들이 갹출하여 제사지내고 무당 굿하는 것으로 그 맥을 이어 왔습니다. 그러다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현재 강릉단오제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제례, 관노가면극, 무속 굿 등 세 분야가 지정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 관노가면극은 지정당시 이미 전승이 단절된 상태였으나 생존해 있던 몇몇 전승자들을 통해서 복원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 전승과정을 거쳐 이제 세계적인 축제로 자리매김한 강릉단오제의 유래와 관련된 주요 설화 및 기록을 관동대 황루시 교수의 논문자료를 토대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호랑이와 관련한 기록 및 설화 강릉은 동예(東濊)의 땅으로 무천(舞天)이란 제천의식을 행한 곳입니다. 따라서 축제로서의 연원은 시기와 성격은 다르지만 동예의 무천과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삼국지』「위지」동이전에 의하면 동예는 호랑이를 신(神)으로 여겨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영동지역에서는 지금도 호랑이 숭배신앙이 남아있어 삼척의 어느 마을에는 백호(白虎)를 서낭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대관령 국사성황은 호랑이를 사자(使者)로 데리고 있고, 호환(虎患)을 당한 여인을 국사여성황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국사 여성황(여서낭)의 설화 옛날 강릉 최씨네 집에 정씨가 살고 있었습니다. 과년한 딸이 있었는데 정씨 꿈에 대관령 성황신이 나타나 장가오겠다고 합니다. 정씨는 사람이 아니기에 거절합니다. 그 후 정씨네 딸이 툇마루에 앉아있는데 호랑이가 업고 달아납니다. 가족들이 대관령 국사성황을 찾아가보니 성황과 함께 서 있는데 죽어 정신은 없고 몸만 비석처럼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몸이 떨어지지 않아 가족들이 화공을 불러 화상을 그려 세우니 비로소 몸이 떨어졌습니다. 이처럼 국사성황이 호랑이를 사자로 보내 처녀를 데려가 처로 삼은 날이 바로 4월 15일이므로 이 날 대관령에 올라가 국사성황님을 모셔다가 여성황사에 모십니다. 이 설화에서 보듯이 호랑이는 국사성황의 사자로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즉 이 설화는 호랑이의 신앙적 위치를 결정해 준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강릉지역에서 호랑이는 복합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통적으로는 신앙의 대상으로서, 또는 자연적 재앙물로서 인식되기도 하고 여전히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여국사성황 설화를 통해 호랑이는 비로소 안정된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 설화를 통해 호랑이는 국사성항의 사자로서의 신성성을 얻게됩니다. 그렇지만 원래 가지고 있었던 직접적 신앙 대상의 위치에서는 밀려나 2차적 신앙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한편 사람들은 더 이상 호랑이를 신으로 모시거나 두려움으로 피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원래 호랑이 신앙은 산신신앙과 깊은 관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국사성황이 전통적으로 있었던 산신의 성격을 포용하면서 호랑이 신앙 역시 국사성황 신앙아래에 편입되었습니다. 이로서 강릉은 국사성황을 중심으로 기존의 토속신앙을 재편성한 것입니다. 여 용사(창해역사)의 설화 여용사는 강릉 대창리 성황사에 모셨던 육성황(肉城隍)입니다. 대창리 성황사는 현재 옥천동 강릉역 부근으로 1962년에 철거되었습니다. 여용사에 관한 설화는 약간씩 차이가 있는 3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홍만종의 『순오지(旬五志)』기록에 의하면 예국의 한 할머니가 시냇가에서 빨래를 하다가 박만한 크기의 알을 발견했습니다. 집에 두었더니 알이 갈라지면서 남자아이가 나왔습니다. 아이가 6, 7세가 되자 키가 8척이 되고 얼굴이 검어 어른 같았습니다. 얼굴이 검다고 하여 여(黎)를 성으로 하고 이름을 용사라 불렀습니다. .예국에 사나운 호랑이 한 마리가 밤낮으로 수많은 사람을 해쳤습니다. 여용사는 반드시 이 악한 짐승을 잡아 나라의 근심을 덜어 주리라 말했으나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집채만 한 호랑이가 나타나자 여용사는 호랑이의 등에 올라타더니 한 주먹에 호랑이를 쳐서 박살내었습니다. 또한 장사 수백명이 움직이지 못한 만근이 나가는 종을 한숨에 번쩍 들어 옮겨 달았습니다. 임금이 그의 힘을 높이 사 옆에 두고 상객으로 대우했습니다. 또 다른 기록에 의하면 남대천에서 할머니가 빨래를 하다가 고지박이 하나를 건졌습니다. 이 고지박이 깨지면서 아기가 나왔습니다. 새까매서 성을 여(黎)씨로 했습니다. 6살이 되었을 때 이미 키가 9척이 되었습니다. 이름을 창해역사라고 했습니다. 사나운 호랑이가 나타나 사람을 잡아먹었습니다. 창해역사가 호랑이를 주먹으로 때려 죽였습니다. 임금이 그를 상객으로 삼았으며, 창해역사는 120근 무게의 철퇴로 매일 훈련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중국의 장량이 진시황을 죽여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중국에 건너가 진시황을 죽이려 했으나 수레를 잘못알고 공격하다가 실패하여, 방랑사 모래 밑에 굴을 뚫고 도망갔습니다. 진시황이 그를 잡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습니다.(최돈규본 창해역사 이야기/김선풍) 인간신 관련설화 강릉단오제에서 신앙하는 산신, 국사성황, 국사여성황을 비롯하여 여러신들은 모두 인격신이고 전승설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강릉단오제는 대관령 국사성황 및 여성황, 대관령 산신을 비롯하여 제 성황을 제사지내는데, 국사성황은 범일국사, 여성황은 정씨가의 딸, 육성황(肉城隍)은 창해역사(여용사), 소성황(素城隍)은 김시습으로 강릉출신, 또는 강릉과 관련이 있는 사람입니다. 현재 육성황과 소성황은 제사되지 않고 있으나 이러한 인격신에 대한 유래 이야기는 강릉단오제의 성격을 상당부분 설명해 줄 수 있다는 점입니다. 범일국사 신화 범일은 신라 말의 유명한 선승으로 대관령 국사성황신으로 신앙되고 있습니다. 실재 인물이 신격화된 것입니다. 신라 헌덕왕 2년(810) 강릉에서 태어나 진성여왕 3년(889) 강릉 굴산사에서 입적하였습니다. 범일의 신화는 주로 출생담을 위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출생에 대한 몇 가지 설이 있는 바, 『임영지(臨瀛誌)』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때 양가집 딸이 굴산(학산)에 살고 있었습니다. 나이가 들도록 시집을 못가고 우물위에서 빨래를 하던 중 햇빛이 뱃속을 비추자 돌연히 산기가 있었습니다. 남편 없이 아들을 낳자 주위 이목이 두려워 아기를 얼음위에다 버리니 새들이 날아와 아기를 덮어 감쌌으며 밤이되자 하늘에서 상서로운 빛이 비쳤습니다. 아기를 도로 데려다 길러 이름을 범일(梵日)이라 하였습니다. 성장하여 중이 되어 성불의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또 다른 유사한 자료에 의하면 굴산(학산)의 학 바위에 얽힌 탄생담으로 한 처녀가 우물에서 물을 뜨던 중 해가 입속으로 들어갔으며 이로부터 태기가 있었고 열달 만에 아기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처녀가 아기를 출산한 것은 불상사니 학 바위 밑에 갖다 버렸습니다. 그런데 학이 날아와 날개로 아기를 감싸 안아 보호하자 이를 기이하게 여겨 아기를 다시 데려와 키워 범일국사가 되었습니다. 우물은 불상사라 하여 메웠는데 그 밑에 또 다른 우물이 생겼으며 현재 학산(鶴山)에는 석천(石泉)이라는 우물이 있는데 범일의 탄생 담이 깃든 장소라고 명기한 안내판이 세워져있습니다. 또한 학산은 옛 부터 학이 많은 마을이었으나 예비군 훈련장이 생겨 총을 자주 쏘니 학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마을뒷산에 있는 학 바위는 지금도 마을 아이들이 놀러가는 곳입니다. 이러한 설화는 학 바위나 석천이 범일전승의 증거물이며 범일이 강릉 학산 출신임을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화재별 관련 설화 발굴 이상과 같이 강릉단오제와 관련된 많은 설화가운데서 몇 가지만을 간략하게 소개해 보았습니다. 강릉단오제에 관한 기록이 단편적이고 어느 시기의 기록은 전무하여 그 정확한 유래를 알 수 없는 것이 유감입니다. 이러한 단절된 부분은 설화를 통해서 보완된 것으로 보입니다. 강릉단오제는 그 대상 신격이 다양하고 관련 기록이나 설화도 각각 차이가 있어 강릉단오제의 전승과정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주고 있습니다. 앞으로 누군가가 관련 설화를 보다 흥미롭고 신비스러운 이야기로 재구성하여 강릉단오제의 홍보에 활용할 뿐만 아니라 다가오는 '스토리 텔링(story-telling)' 시대에 대비하여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봅니다. 이는 비단 강릉단오제 뿐만 아니라 모든 유·무형문화재, 사적·명승지, 천연기념물 및 민속마을 등을 대상으로 설화나 신화 또는 관련 에피소드를 개발하고 발굴하여 문화재 안내 자료로 활용하여 우리 문화재의 관광 자원화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로렐라이 언덕」의 전설처럼... ▷ 문화재청 무형문화재과 과장 문상원 | ||||||
게시일 2006-12-13 15:54:00.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