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스크랩] 전주 학인당

깜보입니다 2007. 12. 20. 10:47
 

학인당 평면

학인당 전경

 

전주 학인당 全州 學忍堂 (전북 민속자료 8호)

 


전주 교동 한옥마을내에 위치한 학인당은 전주한옥마을 내의 수많은 집들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집이다. 지금은 가세가 기울어 520평 대지에 본채, 행랑사랑채, 솟을대문, 별채만이 남았지만 학인당이 처음 지어졌을 때만 하여도 대지 면적이 2000평이 넘는 저택이었다. 현 본채의 서쪽에는 안채와 안사랑채 행랑채가 일곽을 이루었고 동쪽에는 창고로 사용되었던 고간들이 있었으며 본채 뒤쪽으로는 500여 평에 이르는 후원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었다면 우리나라의 어느 저택보다 화려함을 자랑하고 있었을 것이다.


학인당은 종손의 증조부인 백낙중白樂中선생께서 작고하신 조부 백남혁선생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2년 8개월간의 공력을 들여 지으신 것이라고 한다. 학인당이라는 당호는 백남혁선생이 아버지를 기리기 위하여 백낙중선생의 호인 인제忍齊와 학學자를 합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1908년에 완공된 학인당은 전형적인 근세 한옥이다. 대부분의 한옥을 짓는데 소요되는 기간이 1년을 채 넘지 않는 것에 비하여 근 3년의 기간이 소요되었다는 것은 이 집을 짓는데 들어간 정성이 대단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학인당을 짓는데 백미 4000석이 들어갔다고 한다.


현재의 쌀값으로도 수 억원이 소요된 것이고 당시 쌀의 상대적 가치로 따진다면 현 시세로 수십 억원을 투입하여 지은 집이다. 목재를 압록강과 오대산 등에서 가져다 지었다고 하니 이 집을 지은 공력을 가늠할 수 있다. 조선 후기에 들어 산림의 황폐화로 목재의 수급이 원활치 않아 좋은 목재를 넉넉히 쓴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은 집이라고는 조금도 느낄 수 없을 만큼 학인당의 대들보와 서까래는 대부분 곧게 뻗은 나무를 사용하여 가지런함이 잘 살아 있었다.


학인당은 한옥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조선이 가지고 있던 왕조의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문화가 유입되는 과정에서 집이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학인당은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아산 윤보선 생가(1904년)와도 여러 모로 비교가 된다. 아산 윤보선생가의 사랑채와 학인당을 비교하여 보면 매우 유사함을 많이 느낄 수 있다. 물익공을 만든 솜씨며 나무를 다루는 솜씨가 같은 사람이 한 것처럼 느껴진다. 두 집이 지어진 시기를 고려하여 볼 때 같은 목수가 윤보선 생가를 지은 후 이 집을 지은 것이 아닌가 한다.

 

내부 익공

이 집을 보면 윤보선생가보다 진일보한 개념들이 많이 들어가 있다. 윤보선생가의 사랑채는 근대적 기법과 재료가 도입되어 지어진 잘 지어진 집이지만 과거의 사랑채의 구성방식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학인당은 단순히 근대적 기술과 기법만으로 집을 지은 것이 아니라 평면의 구성과 집의 기능성을 근대적 성격에 맞추어 전혀 다른 모습으로 개선하였다. 당시 서울이 아닌 그나마 서울근교도 아닌 전주에 지어진 집에서 새로운 변화의 개념이 적극적으로 반영되었다는 것이 매우 놀라울 따름이다. 이 집을 지은 백낙중선생은 당대의 최신의 문화를 많이 접하였을 뿐만 아니라 매우 진취적인 성격을 소유하신 것으로 보인다. 


학인당은 지금은 기단이 조금 땅에 묻혀있어 외벌대로 보이지만 잘 다듬은 장대석으로 만들어진 이벌대의 당당한 집이다. 학인당은 평면이 ㄴ자 형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한옥의 일반 개념과는 전혀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다. 몇 칸 집이라고 규정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평면으로 되어있다. 예전과 같으면 몇 채로 구성되었을 집을 한 채로 묶다보니 집의 규모가 커지고 복잡해졌다. 또한 간살이 넓다보니 집이 장대하게 보인다. 아쉬운 점은 집의 규모에 비해서 처마의 길이가 짧다는 것이다. 현재는 처마 끝에 양철차양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것은 일제 시대에 첨가된 것이라고 한다. 집주인의 말에 의하면 초기에 찍은 사진을 보면 차양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양철 차양은 높이에 비하여 처마 짧아 비가 들이쳤기 때문에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서 후대에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벽 장
   

평면을 보면 퇴칸의 기능이 적극적으로 발전되어 여러 방을 연결하는 복도로서 변화되고 있다. 이러한 평면형식은 일본주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거부의 집답게 천장 속의 공간(더그매)을 수장공간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으나 과거의 천장공간과는 다른 모습으로 발전한다. 더그매 공간의 채광을 위하여 합각면에 광창을 뚫었다. 이러한 모습은 과거의 한옥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으로 서양건축의 다락방을 연상시키는 구조이다. 이러한 모습 때문에 전면에서 보는 학인당은 다른 한옥과는 다른 특이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한 이 집에는 서양의 건축기법이 부분적으로 도입되어 있다. 건물 뒤쪽에 있는 방 셋은 서재, 세면실, 목욕장으로 이용되었던 시설인데 출입문뿐만 아니라 벽체의 구성이 서양식으로 되어 있다. 아마도 서울에 있는 서양사람들의 집을 보고 그에 방식을 도입한 것이 아닌가 한다. 또한 이 집은 화장실도 본채에서 직접 연결될 수 있도록 복도가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목조의 기법 등을 고려하여 볼 때 이 모습은 일제시대에 개조된 것으로 보인다.


학인당은 세세한 부분에서 많은 고민과 시도를 한 집이다. 이러한 모습은 집안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선 대청을 활용하기 위하여 미서기문을 개량하였다. 거부의 집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공간이 필요하게 된다. 그러한 공간을 만들기 위하여 퇴칸과 대청사이에 미서기문을 들어내는 것은 물론 문지방도 분리하여 들어낼 수 있도록 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서 퇴칸과 대청사이가 분할된 공간이 아니라 하나의 공간으로 인식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또한 벽장에도 현재의 붙박이장과 같은 개념을 도입하여 고정된 가구로 설계하였고 예전의 고정시설이었던 두껍닫이도 분리할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창호의 개념은 특히 더운 여름 창을 넓게 열 수 있어 매우 유용한 방식이었을 것이다.

 

학인당 박공


현재의 전체 배치는 다른 집과는 매우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솟을대문 옆에는 일반적으로 행랑채가 있기 마련인데 이 집에서는 바깥 사랑채가 위치하고 있다. 이 사랑채의 구조는 일반적인 사랑채라고 하기에는 기단의 높이가 높지 않고 쉽게 드나들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구조는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이용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 바깥사랑채는 이 집안이 소유하고 있었던 여러 곳의 농장을 관리하는 중간관리자들의 회의와 숙박을 위한 사무공간으로 만들어진 곳이라고 한다. 원래 이곳에 있지 않았던 것인데 1935년에 이축한 것이라고 한다. 또한 현재 한옥체험숙박시설로 이용되고 있는 별채도 1937년 주변 도로가 확장되면서 헐리게 되자 이축한 건물이라고 한다.


이 집의 솟을대문은 매우 특이한 구조로 되어있다. 우선 고종황제가 백낙중선생에게 내려준 효자 정려가 있다. 문에 정려를 붙이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이 집의 문에는 단청까지 올렸다. 이렇게 일반집 대문에 단청한 예는 아마도 이 학인당 밖에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도 시대의 흐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모든 인습에서 벗어나 자신을 과시하는 방식이 자유로워지면서 이전에는 하지 않았던 시도를 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간 이 집은 두 차례 남의 손에 넘어갈 위기가 있었다고 한다. 첫 번째는 삼성 이병철회장이 이 집을 자신의 별장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당시로서는 거금인 3억을 제시하며 구매하려 하였고 두 번째는 74년 민속촌이 세워지면서 이 집을 민속촌으로 옮기기 위하여 민속촌에서 거액을 제시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집을 처분하자는 권유가 많아지자 돌아가신 백남혁선생께서 아버님이 자신을 위해 지어준 집을 남의 손에 넘길 수 없다는 의지를 가지고 서둘러 1976년에 문화재로 등재하고 학인당을 문중의 재산으로 만든 후 관리의 책임은 장손에게 있도록 규약을 정하였다고 한다. 또한 재산의 처분을 임의대로 할 수 없도록 재산 처분은 만장일치로 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백남혁선생의 의지가 없었다면 학인당은 벌써 남의 손에 넘어갔을 것이다.


집은 제 위치에 있을 때 그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이 집이 다른 곳에 옮겨지어졌다면 집의 가치는 반감되고 만다. 현재의 종손은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집을 복원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과거와는 달리 넉넉하지 않은 환경에서 그러한 결심을 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그러한 의지가 결실을 보여 과거의 모습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대청퇴마루

추 기

종손의 말에 의하면 이 곳으로 입향은 250년 전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고종이 즉위할 때는 이미 거부였던 것 같다. 종손의 이야기에 의하면 경복궁을 중건할 때 많은 돈을 희사하였기 때문에 학인당을 지을 때 서울 궁궐목수를 데려다 쓸 수 있었다고 한다. 해방 후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정치활동을 하였는데 당시 야당을 지원하다보니 정치적 탄압으로 가세가 많이 기울게 되었다고 한다.


이 곳에 전주에서는 백씨 가문이 꽤 유명하다고 한다. <남성학원>도 자신의 종친이라고 한다. 학교 재단을 설립한 것은 토지개혁 때 학교재단에 대해서는 재산을 보존해주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전국에서 많은 학교재단이 설립되었는데 바로 토지개혁에서 재산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학인당은 몇 곳이 본래의 모습과 다르다고 하였다. 건넌방 누마루 중 북쪽 끝 한 칸은 원래 화장실이었다고 한다. 또한 본채 건넌방 누마루 밖에 있는 쪽마루는 제 위치가 아니라고 한다. 원래의 위치는 좌측 끝방 앞에 설치되어 있던 것을 옮긴 것이라고 한다. 새로 집을 손볼 때 제 위치에 돌려놓을 것이라고 하였다.


마당의 가운데는 원래 우물이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없앴다고 한다. 그러나 혈의 자리라고 하여 완전히 없애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 물이 나오는데 까지 계단을 만들어 놓았는데 지금은 물이 깨끗하지 않지만 예전에는 물이 맑았으며 물이 차서 여름에는 냉장고로 이용하였다고 한다. 정원을 위에서 보면 한반도를 뒤집어 놓은 형태인데 왜 이러한 모습으로 만들었는지는 본인도 모르겠다고 하였다.

 

샘 물

정 원

이 집을 보고 나서 근대에 지어진 몇 채의 집을 다시 살펴보았다. 이미 소개한 아산의 윤보선 생가(1904년), 학인당(1908년), 서울의 홍문종가옥(1910년), 함양의 허삼둘 가옥(1918년)은 시대적으로 비슷한 시기에 지어졌으면서도 지역, 부의 정도, 당시 문화에 대한 인식에 따라 집의 구조가 각각 다른 형태로 보여진다. 이 들 집들은 조선시대에 지어진 집들에 비하여 집의 양식이나 규모 그리고 배치에 있어 시기적으로 짧은 간격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차이를 보인다. 새로운 문화가 들어는 격변기에 지어진 집이기 때문에 당시의 사회환경에 어떻게 적응하는가에 따라 집 구조가 많이 달라진 것이다. 


과거 조선시대에는 신분에 따라 집의 형식이 어느 정도 한정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지방의 토호조차도 익공를 감히 사용하지 못하였다. 20세기 들어 이러한 제약이 사라지면서 집의 재산의 있고 없음이 집의 규모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아산의 윤보선생가와 전주의 학인당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그러나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구시대의 전통이 강하게 살아 있는 지방에서는 아직은 구시대의 관습이 강하게 살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허삼둘가옥은 앞의 두 집보다 한참 뒤에 지어진 집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의 건축적 요소가 그대로 살아 있다. 이러한 것은 서울에서 활동하는 고급장인을 사용할 수 없는 제약 때문이기도 하지만 인식 자체가 아직은 조선의 질서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허삼둘 가옥을 살펴보면 안채의 구조가 특별한 것을 제외하고는 내외법이 강하게 살아있던 조선시대의 집과 그리 차이가 없다.


그러나 서울의 홍문종가옥은 이전의 집과는 전혀 다른 구조를 보인다. 안채와 사랑채의 구분이 사라졌다. 안채와 사랑채가 같은 건물로 붙어버린 것이다. 대지의 규모가 700여평 되는 것으로 서울에서도 큰 대지임에도 불구하고 안채와 사랑채의 구분을 없애 버린 것이다. 서울에서는 이 당시 이미 남녀 간의 내외구분이 사라지고 있음을 홍문종가옥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아산의 윤보선생가와 전주의 학인당은 아직 내외를 하는 기본 집구조는 그대로 살아 있다. 단 윤보선생가에 비하여 몇 년 뒤에 지어진 학인당이 보다 진일보한 집구조를 보여 주고 있어 새로운 문화의 확산이 급속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출처 : 사단법인 한국의 재발견
글쓴이 : 최성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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