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전설의 지리산 묘향대 1

깜보입니다 2008. 1. 18. 15:41
전설의 지리산 묘향대 1 등록자 : 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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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지선’ 넘어 천길 벼랑끝, 하늘이 열리다

 

가파른 외길 몇시간, 꿈속처럼 아련한 집 한 채

삐긋하면 나락, 잔돌 받친 참선 좌대 ‘이 뭐꼬?’

 

 붓다는 ‘무릇 있는 바 모든 현상은 다 허망하니 모든 현상이 진실이 아님을 보라’고 했다.
 ‘보왕삼매론’은 ‘막히는데서 도리어 통하는 것’이라며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고,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기도 바라지 말고, 일이 쉽게 되기도 바라지 말고, 남이 내 뜻을 순종해주기도 바라지 말고, 분에 넘친 이익도 바라지 말라’고 했다.
 경허 선사도 ‘좋은 일을 당하든지 좋지 아니한 일을 당하든지 마음을 편히 하며 무심히 가져서 남 보기에 벙어리같이 지내고 소경같이 귀먹은 사람같이 어린아이 같이 지내라’고 했다.
 싫다. 세인은 이를 온 몸으로 거부해왔다. 그러나 거부와 원망과 갈증의 외침을 거두고, 탐욕과 갈등의 마음을 내면으로 돌려 스스로 샘이 된 이들이 있다. 우리가 지금부터 매주 한차례씩 찾아가는 곳은 그런 이들이 깊은 산속 옹달샘처럼 숨어 있는 곳이다. 깨달음과 영성을 그리워하는 현대인들을 위해 하늘마저 감춰두었던 곳들이다.  편집자주

‘출입금지’
 그곳은 ‘금지 구역’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국립공원 지리산관리사무소의 ‘출입금지’ 푯말을 지나 그 금지 구역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내가 가는 그 묘향대가 바로 그 금지구역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제 삶은 금지된 선을 넘는 것으로 일관해왔습니다.

 

 ‘출입 금지’ 푯말 지나 오솔길 오르며 되돌아 본 삶

 

 부모 형제의 말을 거스르거나 학교를 중퇴하거나 가족을 떼어두고 1년씩 인도와 히말라야를 헤매고 다닌 정도는 긴 인생에서 작은 선을 넘은 것에 불과한 일일 수 있습니다. 목숨을 걸고 성인들이 깨쳐서 그토록 간절히 알려준 푯대도 어김 없이 무시한채 금지된 구역을 넘나들었습니다.
 

 

부처님은 ‘무릇 있는 바 모든 현상은 다 허망하니 모든 현상이 진실이 아님을 보라’고 했지만, 여전히 예쁜 것은 아무리 봐도 예쁘고, 미운 놈은 아무리 봐도 미웠습니다. 그래서 미추(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한 분별을 떨구지 못함으로써 저는 부처님의 말씀을 어겼습니다.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은 ‘막히는데서 도리어 통하는 것’이라며 몸에 병 없기도 바라지 말고,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기도 바라지 말고, 일이 쉽게 되기도 바라지 말고, 남이 내 뜻을 순종해주기도 바라지 말고, 공덕을 베풀되 과보도 바라지 말고, 분에 넘친 이익도 바라지 말라’고 했지만, 저는 도저히 병과 곤란과 액란을 받아들이고 싶지않아 거부하는 한 생각을 떨치지 못해 또 금지선을 넘었습니다.

 

 어기고 어기고 또 어기고… 경허선사가 쳐놓은 선마저 넘어

 

 뭇조사들은 본시 천지자연은 청정무구하다고 했지만 세상은 고통과 아픔의 눈물로 얼룩져만 보였습니다.
 그래서 세상과 세상일에 비탄함으로써 저는 조사들의 말씀을 어겼습니다.
 경허 선사는 ‘남이 나를 옳다고 하든지 그르다고 하든지 마음에 끄달리지 말고, 다른 사람의 잘하고 잘못하는 것을 내 마음으로 분별하여 참견도 말고, 좋은 일을 당하든지 좋지 아니한 일을 당하든지 마음을 편히 하며 무심히 가져서 남 보기에 숙맥같이 지내고 병신같이 지내고 벙어리같이 지내고 소경 같이 귀먹은 사람같이 어린아이 같이 지내라’고 했지만, 죽으면 죽었지 그리는 살고 싶지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존경하고 또 존경하는 경허 선사가 쳐놓은 금지선조차 넘고 말았습니다.

 

 ‘인간 못 된 게 중 된다’는 말처럼 어쩌면 선을 잘 넘는 분들일 것 

 승가에서 우스개소리로 스님들은 ‘인간 못된 것이 중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못됐으니 부모 형제도 처 자식까지 버리고 매정하게 출가하지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마도 스님들도 상구보리 하와중생(깨달음을 얻고, 중생들을 보살핌)이라는 원대한 서원으로 출가하신 분도 적지않지만, 애초에 저처럼 금지선을 누구보다 잘 넘어서는 분들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자신을 스스로 가두기도 합니다. 한 번 들어가면 깨치기 전엔 나올 수 없는, 문이 없는 무문관에 자신을 가두기도 하고, 가톨릭 수도사들은 죽어서조차 영원히 밖으로는 나갈 수 없는 봉쇄수도원에 자신을 가두기도 합니다. 무애자재한 대자유를 얻어 벽을 박차고 나올 그날을 고대하며.

 그 옛날 지금보다 더 가기가 어려웠을 오지 중의 오지 묘향대를 찾았던 선승들도 바로 그런 수행자들이었을 것입니다.

 

 하루에도 몇차례씩 안개, 우박, 비, 그리고 금방 말짱 
 

지리산 성삼재에서 꼬박 대여섯시간을 걸어서 푯말 하나 없는 ‘출입금지구역’의 오솔길을 헤치고 나아갔습니다. 평지와 달리 지리산의 기후는 하루에도 몇차례씩 안개가 끼었다가 우박이 내렸다가 비가 왔다가 언제 그랬냐는듯이 개는 변화무쌍함의 연속이지요. 바다는 동해나 서해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리산에 올라 새벽 구름 바다를 본 적이 있는지요? 구름바다 사이로 떠오른 봉우리를 보노라면 운무에 젖은 바람이 절해고도의 쓸쓸함을 안고 가슴팍을 파고듭니다. 옛 선승들도 바랑 하나 들쳐메고 이 고해바다를 건너 대자유의 항해를 꿈꾸면서 이 운무 속을 헤쳐갔을 것입니다.

 

 성삼재서 대여섯 시간 걸려 노루목 지나 샛길 빠져 오르락내리락

 

 노고단 산장을 지나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곧바로 배낭에 판초를 씌우고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임걸령과 노루목을 지나서 아는 사람만이 아는 샛길로 빠졌습니다. 그 때부터 겨우 사람 하나 지나다닐 가파른 오솔길을 오르내렸습니다.

 그러기를 몇시간 하느라 지칠 무렵. 멀리 아련한 꿈 속마냥 집 한채가 보였습니다. 묘향대였습니다. 바랑하나 메고 전국을 만행하는 선승들조차 가보기 어려워 꼭 한번은 가보고 싶어한다는 그 전설의 묘향대였습니다. 지리산 중봉 아래 굳건한 암벽 바위가 둘러싼 요새 중의 요새에 묘향대는 독야청청한채 서있습니다.

 

  전국 만행하는 선승들조차 꼭 한번은 가보고 싶어하는 곳
 

그 허름한 집에서 홀로 묘향대를 지키는 호림 스님이 나왔습니다. 솔바람처럼 선선한 그의 웃음을 대하니 대여섯시간 동안 상승일로였던 열기가 일거에 �겨갔습니다. 세속의 인연과 오욕칠정을 끊어내며 홀로 살아가는 수행승들은 그 서릿발같은 기상이 있어서 세인은 그 괴팎함에 질리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미리 연통을 해서 방문을 허락받아서인지 호림 스님은 세인의 번뇌만이 가득한 바랑을 솔바람으로 비워주고 웃음으로 채워주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 찻길에서 가장 먼 곳. 그런 오지에서 홀로 살아가는 결기를 승복 속에 감춘 채.

 

 받쳐놓은 잔돌 하나라도 빠져 꼬꾸라지면 천길 낭떠러지

 

 묘향대는 대여섯평이나되는 작은 법당 양쪽으로 두어평짜리 방 두개가 고작입니다. 그앞 마루엔 쇠종이 놓여있고, 서까래엔 북이 걸려있었습니다.

묘향대 마루와 토방, 마당에선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지리산의 능선들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마당 축대 끝 벼랑가에 좌대 하나가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바위 위에 고사목을 깎아 얹어놓았는데, 한눈에도 참선을 하는 자리였습니다. 고사목이 기울어져 있어서 잔돌들로 한쪽을 받쳐놓았는데 벼랑 끝에 그렇게 세워진 좌대는 아주 위태위태해 보였습니다. 그 좌대에 앉았다가 잔돌이 하나라도 빠져 뒤로 꼬꾸라지는 날엔 천길 벼랑 끝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름하여 백척간두, 거기서 한발 더 내디뎌라는 건…

 

 그 좌대에 앉았습니다. 미세한 흔들림이 엉덩이에서 느껴지면서 머리털이 쭈볏쭈볏해졌습니다. 송나라의 장사 선사는 이곳에서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천길 낭떠러지에서 한 발을 내디뎌라)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시방세계현전신(十方世界現全身), 즉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것입니다. 즉 최고의 위치에 올랐거나, 최고의 지식을 얻었다거나, 최상의 위에 등극했다하더라도 그것마저 버리고 한 발을 내디뎌라는 것입니다.

 

좌대에 앉은 조현 기자

 

생사해탈도 식후라는 게 윤회를 거듭하는 범인의 상식이렷다!

 

 오욕락(재욕·財欲, 성욕·性欲·色欲, 음식욕·飮食欲, 명예욕·名譽欲, 수면욕·睡眠欲의 즐거움)을 놓지 못하는 속인에게 생사해탈을 종용하는 성화라니! 스스로 허허롭게 터지는 웃음이 한줄기 바람에 실려 반야봉을 훌쩍 뛰어넘어갔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으니 생사해탈은 식후에나 생각해보자는 게 늘 윤회를 반복하는 범인의 상식이려니.

  공양간쪽에서 밥냄새가 풍겨왔습니다. 공양간에선 가끔씩 손님이 올 때면 스님을 도우러 멀리 피아골에서 네다섯시간을 달려오는 보살님이 밥을 해 방에 들여왔습니다. 보살님이 방금 해온 밥상엔 연하디 연한 열무가 양푼에 소복이 담겨 있었습니다. 1500고지의 묘향대 옆 작은 텃밭에서 스님이 가꾼 열무였습니다. 된장에 싸먹은 그 여린 열무가 입안에 들어가자 갑자기 온 세포가 깨어나는 듯 했습니다.

 

 ‘두두두 둥둥’ 법고, 한순간에 번뇌 싹둑 베어버리는 취모검으로

 

법고 치는 호림 스님

 오후 여섯시가 되자 저녁 예불 전 스님이 북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고요히 두둥 두둥 때리던 북채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습니다.
 “두두두 둥둥둥……”
 그 법고는 어느새 번뇌를 싹둑 베어버리는 취모검이 되어 춤을 추었습니다. 한순간이었습니다. 우주의 굉음보다 더 큰 북소리가 내 뇌를 파열했습니다. 그리하여 소리가 내가 되고, 지리산이 되고 우주가 저 하늘이 되었습니다. 스님도 북채도 소리도 그렇게 저 지리산과 하늘과 땅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전기도 없는 칠흑 어둠, 눈은 잠들고 귀와 가슴이 깨어나

 

 북소리가 모든 물상을 고요히 잠재워버렸습니다. 그래서 어둠이 깔렸습니다. 전기도 없었습니다. 태양열 집열판이 하나 있는데 2주 동안 줄 곧 비가 내린채 햇볕이 나지않아 태양열을 저장할 수 없어서 전기를 쓸 수 없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어둠이 점차 가리면서 눈은 조금씩 잠이 들고 대신 귀와 가슴은 살짜기 깨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스님이 내린 녹차를 마시고, 또 보살님이 피아골에서 가져온 야생곡차를 마셨습니다.

 가끔씩 법담 속에 산새소리가 끼어드는 것말고는 고요만이 가득했습니다. 내가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것은 산야초의 묘한 향기가 내장까지 퍼지면서 기분이 아찔해질 무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계속해 내리는 비 때문에 보름 동안이나 별빛하나 없었다는 밤하늘에서 별들이 우박처럼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하늘이 구름을 모두 걷어내고 이렇게 문을 활짝 열어준게 얼마만이냐면서 호림 스님도 어린아이처럼 좋아했습니다. 하늘에선 별똥별들이 마치 축포마냥 중봉에, 반야봉에, 노고단에, 장터목에, 천왕봉까지 쏟아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몇백만년 전에 달려온 별들, 광대한 시간에 인생 칠팔십은 그저…

 

시간은 무엇이고, 생사는 무엇일까요. 저 하늘의 수많은 별이 내 시야에 들어오기까지 몇백만광년이 걸렸는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이미 몇백만년전의 저 별은 지금 이 순간에 자취를 감추고 대신 수많은 새끼 별들이 더 아름다운 은하수를 수놓고 있는 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한 시간 두 시간, 또 우리가 길다면 길다고, 짧다면 너무 짧은 인생 칠팔십은 저 광대한 우주의 흐름에서 드러낼만한 시간과 존재인 것일까요. 나는 우주의 한 별인 이 지구에서 그 무엇을 잡으려 그토록 애착했던 것일까요. 이 광대한 우주에서, 이 아름다운 축제의 현장에서 우리는 무엇 때문에 미워하고 원망하고 절망하고 분노하는 것일까요.

 

 미움도 원망도, 절망도 분노도…, 죽어가는 것이 저토록 아름다운 것을!

 

 그리고 무엇을 잡은 채 자연의 법칙마저 끝내 거부하는 것일까요. 인생의 고락도 생과 사는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자연의 법칙임에도 세인에겐 언감생심 생사해탈을 논할 수조차 없는 일이라 치부했건만 저 하늘의 수백만, 수천만, 수억의 별들은 인생의 고락도 생사도 고통과 울분으로 거부할 금지선이 아니라 우주의 축제임을 시현해 보여주었습니다.
 이곳 지리산에서 줄 곧 수행을 해 깨달음을 얻었던 서산선사의 제자 풍담 의심은 죽음에 즈음에 이런 열반게를 노래했습니다.
 “기이한 저 영물은/죽음에 이르러 더 즐겁도다/생과 사는 바뀌지 않으니/더더욱 밝은 것은 가을 하늘이구나”(기괴저영물 寄怪這靈物/ 임종우쾌활 臨終尤快活/ 사생무변용 死生無變容/ 교교추천월 皎皎秋天月)

 죽어가는 것이, 사멸하는 것이 저토록 아름다울 수 있을까요. 별똥별은 아무런 흐느낌도 슬픔도 없이 아름답게 즐겁게 춤추듯 지고 있었습니다.

 

조현 한겨레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영상 은지희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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