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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이도의 슬픔을 기리다

깜보입니다 2008. 3. 10. 18:26
청년 이도의 슬픔을 기리다 [박경자]
이 글은 『世宗實錄』23·24권, 세종 6년 2월 25일부터 4월 15일 사이에 기록된 열여섯 개의 기사와 『世宗實錄』32권 세종 8년 4월 12일의 기사를 바탕으로 작성하였다.


"슬프다, 연약한 여식이여!
내 기도가 모자라서 인가?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네 목소리, 얼굴은 눈에 어른거리건만 넋은 어디로 갔는가!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어 가슴을 치며 슬퍼하노라"

문 앞에 봄이 와 있던 1424년 2월, 어린 딸이 홀연히 세상을 떠나자 나이 스물여덟의 젊은 아비는 한없는 슬픔을 이렇게 토로하였다. 연약하였으나 맑고 아름다웠던 딸이 아니었던가! 손을 이끌고 다니며 어루만져 사랑했던 딸이 아니었던가! 아비 이도(李?)는 조회와 시장을 삼일동안 폐하고 그 비통함을 달랬다. 하찮은 병으로 끝내 죽음에 이르고 말았던 그녀는 세종과 소헌왕후의 맏딸이며 세자 이향(李珦, 훗날의 文宗)의 누이, 정소공주(貞昭公主)였다.

世宗 6年 甲辰 2월 25일
王女卒于宮內, 年十三. 停朝市三日

열 살을 갓 넘긴 세자는 “조물주가 누이에게 긴 나이를 주지 아니함”을 한탄하며 한 탯줄의 간절한 정을 술잔에 담아 “오직 나의 슬픔을 고(告)한다”라고 하였다. 열다섯 나이에 얻은 어여쁜 딸이 혼인하여 집을 이루기를 소망했던 젊은 아비는, 어렸으나 성인(成人)과 같은 품성을 지녔던 딸의 관(槨)에 칠(漆)을 하고 “현철한 아가씨”의 죽음을 애처로워하는 글을 새겨 함께 묻는 것으로 차마 스스로는 끊을 수 없는 부녀간의 정을 달래야 했다. 그 해 이른 봄, 세종은 이토록 깊은 슬픔을 안고 있었다.
1418년 6월, 세종은 폐세자인 맏형 이제(李?)의 뒤를 이어 세자에 책봉되었고 불과 두 달 후에 부왕인 태종과 여러 신하들의 뜻에 따라 왕위에 올랐다. 즉위 여섯 달 전에는 동생 성녕대군이 사망하고 그 해 12월에는 장인 심온이 정치적인 죽임을 당하였으며, 그 1년 후에는 큰아버지인 노상왕(老上王) 정종이, 그 다음 해에는 아버지와 불화했던 어머니 원경왕후가, 그리고 그 두 해 뒤에는 아버지 태종이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부왕의 상(喪)이 끝나갈 무렵 딸 정소공주가 “넋”이 되고 말았다. 스물두 살의 청년 국왕 이도(李?)는 즉위 후 십여 년 동안 상중이었는데 이 상황은 공적인 것이었으며 동시에 “집안의 일”이기도 하였다. 육선(肉膳)을 즐기고 풍채가 좋았던 세종이었지만 연이은 국상(國喪)은 정신적으로 또 육체적으로도 감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뿐이던가, 정치적인 이유로 몰락한 외가(外家)와 처가(妻家)로 인한 어머니와 아내의 불행한 삶이 세종의 등 뒤에 서 있었다. 이 무거운 가족사(家族史)의 끝자락에 일어난 어린 딸의 죽음은 “차마 스스로는 어찌할 수 없는” 아프고 아린 것이었다. 세종으로 하여금 지극한 효자이게 하였으며, 다정한 지아비이도록 그리고 두터운 정으로 어루만져 사랑하는 아버지이게 한 세 여인의 삶은 온전히 다사롭지 못했다.
공주는 1424년 2월 25일 궁중에서 졸(卒)하였으나 국상(國喪)이 아니었으므로 그녀의 시신은 다음 날 광연루(廣延樓)의 서문으로 나가 어려서 자란 이맹균(李孟畇)의 집에 빈소(殯所)를 마련하였다. 그 해 4월 경기도 고양현 북쪽 산리동(酸梨洞) 언덕에 지석(誌石)을 묻고 묘표를 세워 장사하였으니 일찍 생을 마감한 숙부 성녕대군(誠寧大君)의 묘소 옆이었다. 이년 뒤 망자와 마지막 이별을 고하는 담제(?祭)를 지내며 세종은 딸을 보내는 마음을 제문에 담았다.

“부녀간의 정은 언제나 변할 수가 없으니
사랑하고 귀여워하는 마음이 어찌 변할 리가 있겠는가!
아아, 네가 죽은 것이 갑진년이었는데
세월이 바꾸었어도 생각은 더욱 간절하구나.
이제 담제일이 닥치니 내 마음의 슬픔은 배나 절실하구나”

재위(1418-1450년) 기간 동안 많은 상(喪)을 치른 세종이었으나 군왕으로서의 공적인 슬픔이 아니라 어린 딸의 죽음에 눈물을 멈추지 못하는 청년 이도(李?)의 개인적인 슬픔이 이토록 절절하게 표현된 적은 없었다. 세종은 세월이 여러 번 바뀌어도 딸의 모습을 잊지 못하였으나 뒷날의 사람들은 그의 슬픔을 오래 기억하지 못했다.
1938년, 성녕대군과 정소공주의 묘역 일대는 일제에 의해 농장으로 개발되었고 이 과정에서 정소공주의 묘를 비롯한 조선 초기 왕족의 묘들은 무참히 파괴되어 지금의 고양시 원당리에 있는 서삼릉(西三陵)으로 한꺼번에 이장되었다. 이 과정에서 온전히 지켜지지 못한 부장품들은 허망하게 산일되었으니, 『世宗實錄』23권 6년 3월 23일에 “아아, 슬픈 일이로다”라고 탄식하며,

“애처롭다, 현철한 아가씨여!
길한 땅으로 점을 치고, 좋은 날로 정했으니
이미 굳고 또 정밀하여, 만세토록 갈무려 계실 곳이라”

고 예문관 제학 윤회(尹淮)가 찬(撰)한 그대로 새긴 묘지(墓誌)는 고려대학교박물관에, 공주의 태(胎)를 넣었던 것으로 알려진 네 귀가 달린 두 개의 항아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그림1, 그림2).
덧없어라! 허망하여라! 만세토록 갈무려 계실 곳이라 하였건만, 오늘 나에게는 오래전 스물여덟 청년 세종의 안타까운 슬픔을 기릴 곳이 없다. 박물관 유리장 너머에 마치 열 세 살의 어린 그녀처럼 서 있는 이 항아리를 오롯이 그녀인양 바라보며 건널 수 없는 시간의 강가를 서성인다.

<그림1> 정소공주 묘 출토 분청사기상감초화문항아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림2> 정소공주 묘 출토 분청사기인화문항아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문화재청 청주국제공항 문화재감정관실 박경자감정위원
게시일 2008-03-10 10:4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