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과 한국의 가장 큰 차이 겉치레 외향성문화
한번 머리를 짧게 깎은 적이 있다. 빡빡 깍은 머리와 비슷하다. 3부 정도로 밀었다. 머리가 적고 힘이 없는 머리카락 때문에 귀찮아 하던 나는 많은 독일 친구들이 그렇듯이 간단하게 깎아버린 것이다. 물론 밖에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온 아내도 놀랐다. 그리곤 공연히 잘못도 없이 시달린 시간이 한 달이었다. 내 자유가 남에 의해 침해받는 것을 견뎌야 했던 ‘한국문화에 대한 배움’의 시간이었다. 머리가 하루 아침에 다시 자라지 않아, 한국 사람들을 만나는 그 기간은 사실 질문공세에 고문을 당한 시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슨 대단한 결심을 했느냐?’는 호들갑이 섞인 질문을 비롯해 집사람과 갈등이 마치 이혼에까지 이른 듯한 상황을 전제하고 할 수 있을 질문 ‘사모님과 무슨 일이 있느냐?’ 등 실제로 질문해서도 안 되는 이런 것들에 일일이 대답하기도 힘들었다. 관심의 표현이라고 여기더라도, 또 그렇게라도 관심을 표현해야 된다고 의무감을 느끼는 것이 한국 사람들인지 모른다. 그렇게 개인의 삶에 깊이 개입한다.
그런데, 정확히 그 반대로 경험된 사람들이 독일 사람들이다. 갑작스런 변화를 눈치 채지 못했을리 없건만 독일 친구들은 그 누구도 내 갑자기 짧아진 머리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비치지 않았다. 무관심한 것인지, 혹여 내 머리가 변한 것을 모를 리 없건만 아무도 그것을 대화의 주제로 만드는 이가 없었다. 그것은 나의 결단이라고 부를 가치도 없는 귀찮아서 짧게 머리를 자르는 자유일 뿐인데, 구태여 무슨 얘깃거리가 된단 말인가? 이후 귀찮기 싫어서 귀찮은 머리를 그대로 두는 수 밖에 없었다.
한 달 동안 한국 사람들과 독일 사람들 사이에서 변화된 외모에 대해 얻은 반응이 극단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이 한 달의 경험은 너무나 선명하고 분명해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두 문화의 차이를 명약관화하게 해 주었다.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말라’는 말이 있지만, 우리 한국 사람들에겐 껍데기가 그렇게 중요했다. 조그마한 변화도 곧 대화의 책상에 올려지는 주제가 된다. 구태여 묻지 않아도 될 일을 캐물어 관심을 드러낸다고 여기는 듯하다. 상처가 될 수도 있을 것들을 질문으로 만들어 입 밖으로 내뱉고 관심이나 사랑의 이름으로 포장해서는 상대 앞에 내던지기를 주저하지 않음이다. 관심이(라)지만 도리어 배려가 부족해 깊은 관심이 아님을 오히려 시위하는 판이다. 말할 것도 없이 ‘물어주는 것’도 사랑이리라. 정이 많은 우리 나라에선 당연히 동정심을 그런 ‘물음’으로 표현한다.
여자들은 특히 머리를 자르거나 화장에 변화가 있으면, 심경의 변화로 읽는다고 한다. 화장이 예의로 이해되는 한국, 진한 화장을 한 사람을 보면 그런데 내게는 ‘가면’을 쓴 사람으로 보인다. 간단한 립스틱 화장 정도나 보는, 진한 화장을 한 사람을 거의 일상에서 보기 힘든 독일에선, 천편일률적으로 화장을 한 한국관광객들을 보면 왜 그런지 매우 낯설게 느껴진다. 물론 이곳에서 자주 보는 동양 사람들, 즉 중국인과 일본인에 비해 우리 한국여인들이 훨씬 예쁘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겠다. 그런데, 왜 화장이 전체주의 문화를 연상시키는지, 얼굴에 유니폼을 입힌 것처럼 거의 통일성/단일성이 있어서인지 모른다. 좋다면 너도나도 따라하니, 예쁘다는 사람이 하나같이 똑같다. 유행에 민감해서인지, 문화의 전체주의가 그렇게 우리를 이미 ‘단일민족’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독일 사람들은 다르다. 그들에겐 나의 변화가 곧 ‘나’의 변화는 아니었다. 그들과의 관계가 변한 것도 없고, 함께 일을 하는데 머리카락이 걸림돌도 또 거치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감지도 않은 머리처럼 하고 다니는 그들의 머리카락이, 대머리가 많은 그들의 처지가 그렇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그들은 외형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화려하게 옷을 입은 사람도 거의 없으며, 도리어 가급적이면 눈에 띄지 않게 옷을 입으려고 한다는 느낌을 준다. 아주 비싼 옷은 오히려 화려하지 않다. 외양은 일차적인 신분 판단의 기준이 되겠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거기에 의존되지 않는다. 또 ‘사람’과 그들의 ‘직업’ 사이엔 차이가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예외 없이 인격으로 대접받아야 한다. 물론 다른 이들에게 관심이 우리보단 적다는 것도 한 몫을 차지할 것이다. 그런데 그 관심이란 것의 실체는 무엇인가? 누가 무엇을 입었는지, 남들이 어떻게 입고 다니는지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또 내게 옷을 사주는 이가 아니라면, 내가 무슨 옷을 입고 다니든 뭐라고 할 권리가 있단 말인가? 내가 살고 있는 집도, 내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도 마찬가지다.
교회에 다니는 나는 예배시간에 정장을 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하나의 습관이다. 물론 예배드리는 태도와도 관련되어 있다. 정성이 꼭 옷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맞는 말이다. 구태여 그렇게 입지 않아도 단정하고 깨끗한 옷만 입으면 된다고 생각되지만 어찌 몸에 밴 나의 습성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는다. 머리는 그렇지 않은데 배(腹)가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를 놀라게 한 장면에 대한 경험이 있다. 마침 여자 목사님이 설교를 하는데, 가운은 입었는데, 자세히 보니 슬리퍼 비슷한 신발에 맨발이다. 여름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스스로 관대하게 이해하고 싶었지만, 도대체 예배를 맨발로 인도하다니... 예배 후 가운을 벗었는데 보니, 평상복처럼 가슴선이 푹 파인 옷이 가운 속에 숨겨져 있었다. 이것이 문화충격에 속하는 것인가? 또 이곳의 독일 목사님들은 자기가 예배를 인도하지 않는 때는 간단한 복장으로 온다. 넥타이도 없는 자유로운 복장이다. 나에게 정서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상이었다.
한국인들에게는 좀 달라 보인다. 큰 집과 자동차는 대표적인 ‘외향성’의 증거다. 돈이 있으면 우선 차부터, 그리고 집을 산다. 크고 고급스러운 자동차는 성공의 표시다. 그리고 그 ‘성공’이 그대로 인생의 ‘질’이자 ‘승리’가 된다. 인간승리는 외양으로만 증명된다. 껍데기 만능주의다. 껍데기와 실체가 곧바로 일치되는 사회는 그런데 참으로 일차원적인 저급한 사회다. 외양이 곧 그 ‘사람’과 동일화되어 버릴 때 인간은 호두나 밤 껍질로 맛을 결정해버리는 것이니 그 ‘맛’을 모르는 것인 까닭이다. 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의 통일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껍데기가 가치가 되고 판단의 기준이 되기 때문인가? 어느 정도 불가피한 부분이 있다. 분명 돈이 많은 사람이 아무래도 고급 자동차를 타고 다닌다. 그런데 돈이 있어도 적은 차를 탈 자유가 주어지지 않는, 돈이 많으면 의무처럼 큰 차를 타야만 하는 이른바 등식이 의심 없이 성립되는 사회는, 힘이 센 놈이 가장 먼저 먹을 것을 차지하는 짐승의 세계와 무엇이 다른가? 그럴 것이면 주먹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일이다. ‘문명’이니 ‘문화’니 하면서 스스로를 구별하는 것이 ‘자동차의 발명’이요 ‘큰 집의 건축’ 정도라면, 그것이 짐승과 구별할 기준일 수 있는가? 문제는 그것이 곧 그 ‘사람’이기 때문이다. “네가 어느 집에 사는지, 어떤 차를 타고 다니는지, 어떤 옷을 입는지 내게 말하라. 그러면 나는 네가 누군지 말하리라!”가 통념인 사회다. 대접이 달라진다. 일등 인간부터 몇 등까지 소위 외적 덩치로 구분되어 버린다.
내가 살던 동네엔 초등학교가 있는데, 우리 아이들이 이 학교를 다녔다. 학교 관리인을 제외하곤 모두가 여자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아버지’를 대표하는 남자 교사의 결여는 이곳 독일 초등학교에서도 겪는 문제다. 교장 선생님부터 예외 없이 여자다 보니 이 관리인 아저씨가 아주 인기다. 그런데 이 사람만 벤츠를 타고 다닌다. 아이들의 담임교사도, 또 교장도 작은 프랑스제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데, 이 사람만 큰 차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대학의 교수들도 일본차를 타는 사람이 많고, 심지어는 고물장수에게 줘도 안 가져갈만한 자전거를 타는 사람도 있다. 허름한 옷을 입었다고 대접을 달리하지도 않고, 서빙을 하는 사람이라고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작은 차를 타고 호텔에 들어간다고 ‘치우라고 손사래를 치는 경비원’은 없다. 본인이 해고당할 준비가 되어있거나 호텔을 문 닫게 할 의사가 되어있다면 모르지만 말이다.
어느 정도 외모가 사람이긴 하지만, 독일에선 껍데기가 전체가 아님을 안다. 거기엔 간극이 있고, 외양과 사람이 곧 일치될 수 없음을 아는 마음의 공간이 있다. 속을 모르는, 말하자면, 그들의 지식의 수준이나 직업 등에 관해서 잘 모르는 상대를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한국 사람들의 질문은 상대를 막대하기 위한 정보수집으로 보일 때가 있다. 우린 만나자마자 상대의 정보를 캐기 시작하지 않는가? 어디 살며, 또는 고향이 어디며, 나이는 얼마며, 무엇을 하는 사람이며, 즉 직업이 무엇이며, 결혼을 했는지, 그러면 아이는 있는지 등이다. 그리곤 그 정보에 기초해 사람을 대한다. 대화상대는 사실 기초적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통해 자신을 전부 노출한 상태가 되고, 그래서 이미 그렇게 관계가 형성된다. 불행하게도 그렇게 편리하게 만들어진 관계는 인간적 존중의 자리를 좁혀놓는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자기보다 좀 더 ‘낫다’고 여기는 사람에겐 물론 아니꼽더라도 그런대로 상응하는 대접을 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곧장 낮게 대하기 일쑤다. 물론 기초적인 정보를 교환하는 것은 서로에게 편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대답하도록 요구할 권리가 아니다. 독일에선 이런 질문들이 앞서지 않는다. 그래서 한국인들의 타인에 대한 관심이 그리 뒤틀리지 않은 순수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어찌 보면 그것도 껍데기다. 물론 지식의 정도가 껍데기일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람을 대하는 수단이 될 때 그것은 곧 외양이 된다. 우린 좀 심하다는 생각이다. 가급적이면 외양을 꾸민다. 옷이 날개라는 말은 어쩌면 외양지상주의의 가장 적절한 표현이다. ‘첫 인상’이 전체를 결정하는 것 때문인지 모른다. 무시당한다고 옷부터 사 입힌다. 말할 것도 없이 옷을 입으니 사람이다. 그 옷은 직업도 되고,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도 드러낸다. 꼭은 아니지만, 그 관계가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관계가 드러난 외향으로만 이루어져야 하는가? 인간으로서 대우받고 대할 여지는 없고 껍데기로 모두 대체되고 마는 것인가? 물론 ‘옷’을 입으니 인간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여기에 ‘주머니’가 달리고 계급장이 어깨위에 올려지고 높고 낮음으로 구분되는 ‘옷’이 사람 사이 관계의 전체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은, 조금 더 껍데기만 발달한 ‘짐승세계’ 외에 다름 아니다. 말하자면 여기에 ‘영혼’의 고결함이나 ‘영’(Geist)이라고 불리는 참 가치의 세계는 직립보행을 하는 짐승 인간의 세계 밖에 존재하는 셈이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지켜야 할, 유지해야 할 공간이 존재한다. 프라이버시다. 이 말은 많은 것을 포함한다. 그것은 보호받아야 할 영역이다. 미개척의 원시림처럼 캐내서는 안 되는, 모르는 것으로 남겨두어야 할 영역이다. 불을 밝혀서는 안 되는 어둠의 영역이다. 마치 밤처럼 활동이 없으나, 그러나 낮의 피로를 분해시켜주는 불가결한 삶의 구석인 건드릴 수 없는 잠과 같은 것이다. 그렇게 이 미지의 대상에 대해 조심스럽고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어쩌면 존중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일 수도 있다. 그러니 지나친 관심의 배후가 의심스럽다. 그 심리적 ‘호기심’의 상태를 꼭 긍정적으로 볼 수 없는 이유다. 길을 지나가면서도 독일인들은, 조금만 살펴보려고 하면 창문을 통해 안쪽이 그런대로 잘 보이는 다른 사람의 집안 내부를 들여다 보지 않는다. ‘프라이버시’의 영역은 지켜져야 하고 지켜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문을 열기까지는 들여다 보아서는 안 되는 ‘집안’이다. 그것은 직업일수도 있고 교육수준일 수도 있고 자녀나 결혼 유무 등 가정사일 수도 있다. 한국 사람들은 관심에 호기심에 내부로 향해 자꾸만 눈길을 던진다.
혹여 어떤 사람과 대화를 할 때 말이 소위 말해서 똑똑한 것으로 들리지 않는다고 무시하려 들었다간 낭패를 당할 수가 있다. ‘똑똑한 체’ 하지 않는 수수하고 순수한 사람들이 많다. 구태여 자신을 방어하지 않아도 되는, 상대를 경계의 대상으로 취급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의 산물일 것이다. 교수들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매우 많다. 언제나 ‘바보가 아니다’를 다른 사람들에게 증명해야 하는 영악한 한국 사람의 눈과 귀로 볼 때 도저히 저런 사람이 교수일 수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많다. 실력 있는 교수인데도 말이다. 그러므로 외모 혹은 외양이란 단순히 보이는 옷차림만이 아니라 포장하지 않은, 그래서 순진함이 그대로 노출된 순수한 인간됨도 포함된다. 그것으로 평가하려고 들었다간 낭패를 당할 수 있다.
외양이 중요치 않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껍데기가 내용이 되어버리는 순간, 포장이 알맹인 사회는 본말을 전도하기 때문이다. 진짜로 자꾸만 포장하는 사람들은 거짓일 가능성이 많다. 거짓이 거짓을 낳고, 거짓이 거짓을 덮는 사회는, 사람들끼리 마음이 통하지 않는 사회다. 말에도 그 말의 배경이나 배후를 물어야 하는 공동체는 스스로 속임의 희생양이 된다. 한번은 한국과 파트너쉽을 맺고 있는 교회의 대표자들을 통역한 적이 있는데, 가장 힘들었던 것은 독일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대로 듣지 않고,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나에게 그 배경을 물었던 사람들 때문이었다. 늘 ‘배경’을 두고 이야기하는 이런 사회엔 포장문화가 발달한다. 뻥튀기와 과장이 일상이 되어 버린다. 머리를 굴리는 기술을 늘지라도 부단히 술수에 빠지지 않으려는 피곤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가장 쉽고 단순한 길을 치워놓은 일이다.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담담히’ 할 수 있다. 구태여 ‘진짜로’ ‘정말로’라는 수식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예’와 ‘아니오’로 족하다. 자기 아버지를 부를 때 ‘정말 좋으신 친구인 우리 아버지!’라고 한다면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실제로 진실의 관계는 단순함과 순박함을 지나쳐 갈 수 없다. 자신감이 있는 사람이 겸손한 것과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이 구태여 아는 체, 그렇게 교만한 것과 비교될 수 있을까?
나는 이 껍데기에 치중하는 포장문화를 껍데기‘주의’(Formalismus)라고 부르고 싶다. 하나의 문화이자 의식의 저변이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뿌리내린 권위주의와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 제대로 된 계급혁파가 이루어지지 않은 우리 나라에선, 또 다른 형태로 여전히 왜곡되어 현존하는 이 권위주의는 ‘토론을 통한 실력의 차이’에서가 아니라 그들이 내세울 수 있는 무슨 ‘학위’에서, 소유하고 있는 주택을 통해서, 입고 있는 옷의 가격에서 여전히 세력을 떨치고 있다. 독일에서 좀 돈을 번 한국 사람들은 먼저 큰 집을 사거나 짓는다. 내부로 들어가 보면 문화의 빈한함이 불쌍하게도 코를 찌른다. 커다란 TV며 기가 막힌 장식일 값비싼 오디오에, 또 그 오디오에 손색없이 어울리는 한꺼번에 사들인 CD전집들 말이다. 자동차도 이에 상응한다. 졸부들의 시위에는 자동차가 최고인 셈이다. 사실 유럽에선, 내 느낌이지만, 카톨릭 교회의 하강식 직제(Hierarchie)를 제외하곤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그 전통적 계급의 표시를 쉽게 찾아볼 수 없다. 물론 그들은 그렇게 주장하지 않겠지만 직급에 따라 옷의 색깔이 다른 것은 그 권력역사의 찌꺼기다. 성직자의 옷 색깔이 검다는 것을 빼놓고는 - 요즘은 흰색도 교회력에 따른 대 축제일에 허용되긴 하지만 - 전혀 특정색깔에 따른 계급의식은 없다. 껍데기는 식별을 위해서도 내용과 피부의 보호를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지만,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몸이 의복보다 중요하고, 목숨이 음식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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