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가 존경을 받으려면 대체로 세 가지의 조건이 필요하다. 먼저 재산을 모으는 방법에 있어서 정당성이 있어야 하며, 둘째 그 재산을 행사하고 지킴에 있어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하며, 그 재산을 처분함에 있어서 사회적으로 유익한 가치가 있어야 한다. 10대 300년간 만석꾼의 부를 지켜오면서 수많은 이웃과 함께 ‘나눔’을 실천하여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모범이 된 ‘경주 최 부자’는 바로 이러한 조건을 만족시킨 사람이다.
‘경주 최 부자’는 조선시대 1600년대 초부터 경주 지방에서 가문을 일으킨 정무공 최진립에서 부터 광복 직후 모든 재산을 바쳐 대학을 설립한 최준에 이르는 12대간의 사람을 말한다. 오늘에 다시 경주 최 부자를 들먹이고 존경의 뜻을 표하는 것은 단순히 오래토록 부를 지켰다는 이유만은 아니다. 그들에게는 다른 가문에서 찾기 어려운 덕德이 있었고, 그것이 독특한 가훈 속에 녹아 있어 의義를 지키려는 정신과 이웃을 사랑하는 따뜻한 정情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이 집에는 크게 세 종류의 유훈이 있었는데, 그것은 집안에서 지켜야할 ‘가거십훈家居十訓’이란 것과, 이웃과의 관계를 강조한 여섯 가지의 ‘가훈家訓’ 그리고 특수 상황에서의 개인의 행동 요령을 제시한 ‘육연六然’이란 것이다. 임진·정유·병자 삼란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병자호란 때 공주 영장을 지내며 69세의 노구를 이끌고 장렬히 전사한 영웅인 정무공 최진립이 가문을 세워 자손에게 남긴 유훈 중에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독특한 여섯 가지의 가훈이다. 그 첫째가 ‘진사는 하되 벼슬은 하지마라’는 값진 가훈이었다. 그의 후손 중에는 조상의 뜻을 받들기 위해서 58세의 고령에도 갖은 고초 끝에 진사시에 합격한 최언경이라는 이도 있다. 최 부자들은 이렇게 정치와 멀찌감치 거리를 둠으로써 정쟁의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이것은 오늘날의 의미로 해석하면 정치적 중립 즉, 정경분리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흉년에는 땅을 사지마라’는 또 다른 가훈에 따라 남의 약점을 이용하여 재물을 축적하지 않았다. 조선시대에는 4년마다 한 차례 꼴로 흉년이 들었고, 이때는 땅을 내놓는 소농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 땅을 사지 않고 오히려 양식을 꾸어주었다. 남의 약점을 전략적으로 이용하는 적대적 M&A가 횡횡하고 있는 오늘의 사례를 볼 때 이는 재산 축적의 사회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것으로 참으로 본받을 윤리경영의 한 측면이라 하겠다.
적정이윤으로 중용의 도를 알았다 경주 최 부자, 그들은 재물을 지킴에 있어서도 남달랐다. 조선시대의 재산 개념은 정태 개념이 아니라 동태 개념이었다. 그래서 ‘만석재산’이라 함은 1년에 만석의 소작료를 받는다는 것이었다. 또 하나의 가훈인 ‘재산은 만 석 이상 지니지 마라’는 유훈에 따라 최 씨 가문에서는 1년의 소작료를 만 석 이상 받지 않았다. 경주지방 항간의 이야기로 ‘경주 최 부자는 2만석 맞잡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은 경주 최 부자가 병작반수(지주와 소작인이 반반씩 나눔)로 소작료를 거두면 2만석은 족히 거둘 수 있는데 실제로는 1만석 밖에 안 걷는다는 말이다. ‘가진 사람이 더 무섭다’는 말도 있지만 최 부자가 욕심의 한계를 정하고 적절히 지킨 것은 참으로 놀라운 지혜요 인내라 할 수 있으며, 『공자가어孔子家語』에 나오는 노나라 환공의 ‘의기’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공자가 노환공(魯桓公)의 묘에 있는‘의기(倚器 한쪽으로 기운 그릇)’를 보고 묘지기에게 물었다. “이것은 무엇이오?” “이것은 유좌(宥坐 앉는 걸 돕는)란 그릇입니다.” “내가 듣건대 이 그릇은 속이 비면 기울게 되고, 중간쯤을 채워 놓으면 반듯하게 되고, 가득 차면 뒤집어진다고 하였다. 그래서 현명한 임금은 이것을 지극한 교훈으로 삼아서 늘 좌석 옆에 둔다고 하였다.” 이렇게 말하며 공자는 제자들을 돌아보면서 ‘물을 부어 보라!’고 말했다. 제자가 물을 붓자 과연 중간 정도를 채웠을 때 그릇이 바르게 서고, 가득 채웠을 때 그릇이 뒤집어졌다. 공자는 탄식하며 이렇게 말했다. “아아! 세상에 어떤 물건을 막론하고 가득 차고서 기울어지지 않는 것이 있겠는가.”
경주 최 부자도 이처럼 재물을 가득 채우지 않음으로써 중용의 도를 실천한 사람이라 하겠다. 최 부자의 소작인들은 소작료를 적게 내므로 누구나 최 부자가 더 많은 땅을 사서 더 큰 부자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들은 만석꾼 부자로써 한 도에 한 사람 있을까 말까한 큰 부자였다. 그러나 그 집의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에는 무명옷만 입도록’ 하는 가훈을 따라 근검절약 정신을 몸에 배도록 하였으니 만석꾼 며느리가 이럴진대 그 집 하인이나 이웃은 감히 사치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이웃의 흉년구제 위해 곳간을 활짝 열다 이러한 절약 가운데서도 최 부자는 ‘과객을 후히 대접’하고 ‘사방 백 리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여 ‘나눔’의 정신을 실천하여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경주 최 부잣집의 과객 대접은 소문이 났었다. 만석 소득 중에서 10분의 1인 천석 가까이를 접빈에 썼다고 하니 이 집의 손님 수를 짐작할 수 있다. 하루에 수십 명의 손님이 사랑채에 유숙하며 마음대로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며 담론을 하였으니 최 씨는 가만히 앉아서 지식을 넓히고 정보를 얻으며 고급 교제를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가훈 중에서도 단연 두드러지는 것은 ‘사방 백 리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이다. 흉년구제는 나라에서도 어쩔 수 없었다. 이 때 최 부자는 과감히 곳간을 열고 굶주린 이웃을 구했던 것이다. 왜 하필이면 ‘백 리’라고 했을까 에 의문을 품은 필자의 조사에 의하면, 최 부자의 논밭이 사방 백 리에 걸쳐 있기도 하였고, 하루에 걸어 왔다가 갈 수 있는 거리가 백 리라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인 것으로 추정되었다. 어쨌든 최 부자는 사방 백리에 걸친 주민을 생활공동체인 ‘이웃’으로 생각하였고, 어려울 때 이웃과 함께 사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부자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상징적 사례라 하겠다.
재물을 옳게 쓸 줄 아는 부자 중의 부자 경주 최 부자는 10대 300년 동안 부를 지켜오다가 최준(1884~1970)에 이르러 마감한다. 나라가 망하는 불우한 시대를 살았던 마지막 최 부자 문파 최준은 망한 나라에서 어떻게 돈을 써야 좋을지를 여러 모로 검토해보았다. 그는 부산에서 안희제와 함께 백산무역주식회사를 운영하면서 많은 돈을 상해 임시정부로 보냈으며, 그 결과 회사는 어려워지고 부채를 사장인 자신이 몽땅 떠안는다. 일제는 여러 벼슬을 제시하며 갖은 방법으로 유혹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고, 우여곡절 끝에 버티면서 해방을 맞았다. 그는 나라가 망한 것이 부족한 교육 때문임을 깊이 깨닫고 300년 묵은 그의 재산을 아낌없이 던져 대학(영남대학교 전신인 대구대학)을 설립하였다. 경주 최 부자는 결코 망하지 않았다. 다만 대학의 주춧돌로 변신했을 뿐이다. 최 부자의 손때 묻은 5천 여 권의 서적은 현재 영남대학교 도서관 문파문고에 남아있고, 그가 살던 교동의 아흔 아홉 칸 집은 이제 새롭게 단장되어 우리에게 값진 교훈을 준다. 이것이야 말로 재물을 옳게 쓴 표본이 아닐까! 경주 최 부자의 이러한 훌륭한 선행의 뿌리는 독특한 ‘가훈’에서 볼 수 있는 ‘의義와 중용中庸’의 철학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 가훈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고 매우 구체적이어서 실천할 목표를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는 데 특징이 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철학이라도 후손들이 지키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고 싶은 벼슬을 참고, 하고 싶은 사치를 참고, 하고 싶은 외입을 참고, 이웃과 함께 나누면서 묵묵히 조상의 뜻을 지키며 실천한 후손들의 노력 또한 잊어서는 안 될 덕목이다.
▶ 글_ 전진문 영남대 경영학부 겸임교수 ▶ 사진_ 이지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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