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e이야기

석사자상(石獅子像)의 미

깜보입니다 2008. 10. 7. 20:34

석사자상(石獅子像)의 미 [이숙희]

우리나라 사찰이나 고궁 어느 곳을 가든지 쉽게 만날 수 있는 석사자상은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친근감을 준다. 언제나 한쪽 구석에 보잘 것 없는 조형물로 외면당했지만 그 석사자상이 가진 조형감이란 우리 고대 불교조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생동감이 있으면서도 단순하고 익살스러운 미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석사자상은 일제강점기 때 대부분 도괴되거나 일본으로 반출되는 등 많은 수난을 거쳐 왔으며 지금까지 그 소재지조차 파악되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제 석사자상을 통해 소박하고 아름다운 미를 상기함으로써 우리 문화재의 소중함을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런데 이러한 사자상이 왜 불교의 사찰이나 불상, 석탑, 부도, 석등, 능묘, 궁궐 등에 쉼없이 나타나고 있고 지금도 여전히 표현되고 있는가? 그것은 어떠한 이유에서 연유된 것일까? 더욱이 언제부터 제작되었고 그 등장배경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등등 수많은 의문이 따르게 된다. 물론 사자가 불교의 여러 조형물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데에는 보다 근원적이고 구체적인 이유가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흔히 사자란 두려움이 없고 모든 동물을 능히 조복시키는 ‘백수(百獸)의 왕’으로서 신격화되거나 제왕으로 상징되었으며 또 한편으로는 그 용맹함 때문에 수호신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이유로 고대 인도에서는 제왕과 성인의 위력을 사자에 비유하여 불교경전에서도 석가를 ‘인중사자(人中獅子)’라 칭하고 그 설법 또한 모든 희론(戱論; 쓸모없는 이론)을 멸하는 것에서 ‘사자후(獅子吼)’라 하였다. 더욱이 『고승법현전(高僧法顯傳)』에서는 사자가 크게 울면 모든 마귀들이 두려워하여 따른다는 기록이 있으며 『화엄경』이나『법화경』에는 ‘사자분신(獅子奮迅)’이라고 하여 부처가 대비(大悲)를 일으키는 것을 마치 사자가 맹렬하게 활동하고 있는 모양에 비유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또한『대지도론(大智度論)』권 4에는 불상의 32길상 중에 ‘상신여사자상(上身如獅子相; 상체의 위용과 단정함이 사자와 같다)이라든가 ‘사자협상(獅子頰相; 두 볼의 통통함이 사자와 같다)’ 등 부처의 상징적인 존재로서 사자를 비유했을 뿐 아니라 석가불, 비로자나불 및 문수보살의 대좌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서울의 뚝섬에서 발견된 금동불좌상의 대좌 좌우 에 배치된 사자상에서 불교적인 성격을 엿볼 수 있다.
(그림1) 뚝섬 출토 금동불좌상, 삼국 5세기,높이 4.9cm, 국립중앙박물관

사자좌(獅子座)는 대좌의 형태에서 유래된 이름이 아니라 부처가 사자와 같은 위엄과 위세를 가지고 중생을 올바르게 이끈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이다. 이와 같이 대좌의 일부로 조형화된 사자상은 부처의 위엄을 상징하는 역할 보다는 점차 수호적인 성격이 강해지면서 석탑이나 석등, 능묘 주위에 환조상으로 표현되거나 석조물의 표면을 장식하는 장엄용의 부조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탑 주위에 독립된 사자상을 배치하는 형식은 신라시대의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에서 이른 시기의 예를 볼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불국사 다보탑과 의성 관덕동 삼층석탑, 광양 중흥산성 삼층석탑 등에서도 기단 위의 네 모서리에 4구의 사자상이 놓여 있었으나 그중 일부는 일제강점기 때 없어졌다. 특히 의성 관덕동 삼층석탑의 석사자상은 현재 2구만 남아 있는데 암사자상은 세 마리의 새끼를 품은 채 한 마리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형상으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예일 뿐 아니라 동아시아에서도 가장 오래된 귀중한 조각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림 2) 의성 관덕동 삼층석탑 암사자상,통일신라 9세기,
높이 50cm, 국립대구박물관

또 한편으로 석탑 주위에 배치되었던 석사자상들이 탑 구조의 중요한 일부가 되어 특이한 형식의 4사자석탑(四獅子石塔)이 나오게 되었다. 이 4사자석탑은 상층기단의 네 귀퉁이에 사자를 한 마리씩 배치하여 탑신부를 받치게 하고 그 중앙에 인물상을 안치했으나 시대가 내려오면서 인물상이나 4사자의 연화받침이 생략되는 등 형식화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석탑형식은 과연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일반적으로 4사자석탑은 불국사 다보탑의 상층기단에 5개의 기둥을 세우고 그 주위에 4마리의 사자를 배치한 형식과 관련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중앙의 기둥 대신에 인물상을 배치하고 4개의 기둥자리에는 석사자상을 두었다는 것이다.

(그림 3) 화엄사 4사자삼층석탑, 통일신라 9세기, 전라남도 구례 화엄사

불국사 다보탑에는 원래 4구의 석사자상이 배치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1구밖에 남아 있지 않다. 불국사를 최초로 방문한 일본인 학자 세키노타다시[關野貞]가 1902년 이 탑을 조사했을 때에는 기단의 사방에 3구가 있었으나 1909년에 다시 왔을 때에는 비교적 완전한 형태를 갖춘 2구가 없어졌다고 한다.

(그림 4) 일제강점기 때의 불국사 다보탑(『조선고적도보』 권 4, 1916)
불국사 다보탑 석사자상, 통일신라 8세기

전하는 말에 의하면, 석사자상 1구(또는 2구)는 일본 우에노[上野] 서양헌(西洋軒)의 정원에 진열되어 있고 나머지 1구는 파리박물관에 있다가 영국 대영박물관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다보탑의 석사자상에 대해서는 그동안 수차례에 걸쳐 한일회담 때 논의된 바 있으며 또 일본의 방송과 라디오까지 동원하여 수소문해 봤지만 아직까지 행방이 묘연할 뿐이다.
사자를 석조물의 장엄에 이용한 또 다른 예는 사찰의 법당이나 불탑 앞에 세워진 석등에서 볼 수 있다. 석등의 간주석 대신에 두 마리의 사자가 상대석을 받치고 있는 이른바 ‘쌍사자석등’이라고 부르는 독특한 형식이 통일신라시대에 크게 유행하여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만들어졌다.

(그림 5) 중흥산성 쌍사자석등, 통일신라 9세기, 국립광주박물관

이와는 달리 능묘의 사방을 지키는 석사자상은 독립된 환조상인 석수(石獸)로 나타나고 있다. 능묘 앞의 석사자상은 중국 당대(唐代)의 묘의제도(墓儀制度)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원래 석사자상은 능침(陵寢)의 문을 수호하는 것으로 들어오는 입구에 한 쌍을 마주보게 세우며 왕릉에만 가능한 것이었다.

(그림 6) 괘릉 석사자상,통일신라 798년 , 경주 괘릉

이러한 석사자상이 통일신라시대의 왕릉 앞에 배치된 것은 당시에 유행했던 탑의 사자 형식과 당대의 묘제가 혼합되어 독특한 능묘 형식으로 발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밖에도 경복궁 근정전 주변의 석조난간이나 계단, 다리 아래에 조각된 석사자상이나 석조 건축물의 모서리 기둥에 표현된 석사자상은 근엄하거나 용맹스럽기는 커녕 하나같이 장난끼 많은 앙징스러운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어 우리들의 흥미나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그림 7)사자입상, 통일신라, 높이 99cm,국립경주박물관

이렇듯, 우리가 그냥 지나쳐 버리는 평범하고 소박한 석사자상에서도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유심히 바라보게 되면 어느 새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와 옛사람들과의 어떤 미적인 공감대를 느끼게 되며 또 잊어버렸던 오래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여유로운 마음이 되어 이 석사자상의 앞을 쉽사리 떠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 문화재청 인천국제공항 문화재감정관실 이숙희 감정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