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세계문화유산 종묘 해설서
일자 : 2008년 12월 28일
세계문화유산 종묘
종묘는 사적 제125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정전(국보 제227호), 영녕전(보물 제821호), 종묘제례악(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가 있으며, 종묘는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종묘제례와 제례악은 2001년 무형유산걸작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유교사당으로서 가장 정제되고 장엄한 건축물 중의 하나입니다.
종묘의 ‘종(宗)’은 마루, 근본, 으뜸을 뜻하고, ‘묘(廟)’는 신주를 모신 사당을 뜻하는 것으로, 종묘는 태묘 혹은 대묘라고도 불리웁니다.
역사적으로 현재 사적 제 125호로 지정되어 있는 종묘는 고려시대에는 태묘(太廟)로 지칭되었는데, 조선을 건국한 태조 고황제(在位 : 1392∼1398)는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지금의 서울)으로 옮기면서 먼저 궁궐의 위치를 정하고 그 동쪽에는 종묘를, 서쪽에는 국토의 신과 곡식의 신을 모시는 사직단을 세우도록 하였습니다. 종묘는 왕가의 조상을 모신 곳이고, 사직단은 국토의 신을 모신 곳이어서 이 둘은 나라의 역사와 뿌리를 상징하는 곳이기 때문에 수도를 정한 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죠.
따라서 우리가 사극에서 많이 듣는 종묘사직이란 말도 결국 나라의 기틀을 의미하는 말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랍니다. 종묘는 앞서 말한 것처럼 조선조 태조 3년 12월에 건축이 시작되어 이듬해 9월에 완공되었고,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신주를 모셨습니다. 이후 세종대왕 때에는 종묘의 부속 건물을 지어 영녕전이라 이름하고 신위를 모시기 시작하여 현재 정전에는 19실에 49위, 영녕전에는 16실에 34위의 신위가 모셔져 있습니다. 현재는 종묘라 하면 정전과 영녕전을 모두 포함하는 말로 쓰이지만, 본래의 종묘는 지금의 정전만을 의미합니다.
종묘의 정전은 건평이 1,270㎡로서 동 시대의 단일 목조 건축물로는 세계에서도 그 규모가 가장 큰 사묘 (祠廟) 건축물이며, 종묘의 건축 양식은 궁전이나 불사의 건축이 화려하고 장식적인데 반하여 유교의 검소한 기품에 따라 건립되어 소박한 아름다움이 있답니다.
그리고 종묘는 한국의 일반 건축물과 같이 자연에 순응하는 구조를 가지는 비대칭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대칭을 이루어 의례공간의 위계질서를 반영하고 있으며 정전과 영녕전의 기단과 처마, 지붕의 높이, 기둥의 굵기를 그 위계에 따라 달리 하고 있습니다.
그 밖에 역사적인 특징을 든다면 중국 주나라에서 시작된 종묘제도는 7대까지 모시는 제도로 시작되어 청나라 때에 와서 9묘 제도로 확대 되었는데, 중국의 태묘에서는 태실이 9실에 불과하나 한국의 종묘만은 태실이 19칸인 매우 독특한 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면이 매우 길고 수평선이 강조된 독특한 형식의 건물모습은 종묘제도의 발생지인 중국과도 다른 건축양식으로 서양건축에서는 전혀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건축유형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조상신을 위한 제례
지금도 매년 5월 첫째 주 일요일에 종묘제례를 거행합니다. 종묘제례는 종묘에서 행하는 제향의식을 일컫는 말로 유교에서는 기본적으로 사람이 죽으면 혼과 백이 분리되어 영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육신은 땅으로 돌아간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시신은 무덤을 만들어 모시고 영혼은 사당에 모시고 제사를 드렸지요. 그리고 그 조상을 받들어 모시는 것을 예의 으뜸으로 삼아 효의 근본으로 생각했지요. 따라서 왕실의 제사인 종묘제례는 늘 나라의 중대사로 인식되어 왔답니다.
종묘제례는 봄․여름․가을․겨울의 첫달(1월, 4월, 7월, 10월)과 납일(12월에 날을 잡아 지내는 섣달제사)에 지내는 정시제와 나라에 흉한 일이나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지내는 임시제가 있었답니다. 또한 계절에 따라 햇과일과 햇곡식이 나오면 간단한 방식으로 종묘에 고하는 천신제(薦新祭)가 있었는데, 광복 이후 잠깐 폐지되었다가 현재는 다시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의 주관아래 다시 종묘제례를 거행하고 있어요. 종묘제례는 국가의 길흉을 조상신께 여쭈고 화복을 비는 기능과 1년을 무탈하게 보내고 풍년이 들도록 기원하는 기능을 기본적으로 하고 있었구요, 왕실의 사당이자 국가의 상징인 만큼 모든 제례의 모범으로 더 없이 웅대하고 존엄하게 거행되어 왔습니다.
종묘라는 극도로 절제된 건축양식에 엄숙한 제례의식은 그 신성함을 더욱 돋보이게 해 주는데요, 화려하고 웅장한 제례의식과 이 종묘의 단순한 건축양식은 한편으로 대비 되면서 한편으로는 그 엄숙함이 잘 어울리는 듯 합니다.
구체적인 절차를 잠깐 살펴보면 유교식 절차에 따라 크게 神을 맞는 절차, 神이 즐기도록 하는 절차, 神을 보내는 절차로 진행되는데, 제례의식 중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인 종묘제례악이 연주되며 각 절차마다 편경, 복고 등 전통악기의 연주와 노래, 그리고 64명이 추는 팔일무(八佾舞)가 함께 이루어진답니다.
종묘제례악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로서 세종대왕이 만들고 세조 때 채택된 것으로 종묘에서 제사드릴 때 연주하는 음악과 노래와 춤의 총칭이에요. 종묘제례 의식에는 각 절차마다 여러 음악을 연주하며 동시에 종묘악장(宗廟樂章)이라는 노래를 부르고, 보태평지무(保太平之舞)와 정대업지무(定大業之舞)라는 일무(佾舞)를 추어 제례의 분위기를 고조시킨답니다.
종묘의 정문인 외대문은 단아하면서도 검소한 느낌을 주며 세 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종묘에는 외대문 이외에 종묘를 출입하는 문으로 북신문(북쪽)과 외서문(서쪽)이 있는데, 외대문은 남쪽으로 난 정문답게 정면 세 칸의 평삼문(平三門)으로 되었고, 정문 좌우로는 종묘외곽을 두르는 담장과 연결되어 있답니다. 그리고 정문 안 서쪽으로는 본래 종묘를 지키는 관리들이 숙직하던 부장청이 있었습니다.
종묘의 대문은 종묘 정전 및 영녕전의 내문(남신문, 동문, 서문)에 반해 외대문이라고 합니다.
외대문은 종묘의 정문으로 매우 단아하면서도 검소한 느낌을 주며, 궁궐의 정문(궐문)과는 그 구조형태가 다르답니다. 단청은 화려하지 않게 석간주 가칠로 단순하게 처리하였고, 단층으로 두터운 판문 위에는 홍살을 설치하여 이곳이 종묘의 대문으로서 신성한 곳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종묘의 외대문은 삼문 형식의, 정면 3칸, 측면 2칸, 맞배지붕의 오량가이며, 홑처마에 연등천장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용마루에 양성회칠을 하여 용두를 얹고, 내림마루에 잡상을 설치하였습니다.
잠깐! 어정? 하마비?
정문 밖에는 하마비(下馬碑)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된 어정(御井)이 있습니다 .
“어정”, 말 그대로 임금님의 우물이지요. 하지만 임금님만이 쓰시던 우물은 아닙니다. 이 곳 주위 모든 사람들이 마시던 우물이지요. 임금님께서 역대 왕들께 제사를 지낸 후 나오면서 꼭 이 물을 드셨다고 합니다. 이 물은 심한 가뭄에도 항상 물이 솟는다고 해서 그 영험함을 믿고 주민들이 용왕제를 지내기도 하였다는 곳입니다.
“하마비”
혹시 하마비(下馬碑)라고 들어보셨나요? 말에서 내려서 걸어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종묘 건립 당시 태종은 종묘에 담을 두르고 하마비(下馬碑)를 세워 종묘의 격식을 갖추게 했답니다. 태종 12년(1412) 11월 5일 종묘와 궐문을 지나는 사람은 모두 말에서 내리게 하고, 다음해 정월 21일 종묘 및 궐문 입구에 “대소 관리로서 이곳을 지나는 자는 모두 말에서 내리라”고 쓴 푯말을 세우게 해서 종묘의 격식을 차리게 한 것이지요.
하마비라고 적혀있는 이 비석은 별 볼품 없이 보이지만 이것이 상징하는 의미는 정말로 크답니다. 이 곳에 오는 사람들이 말이나 가마에서 반드시 내려야 한다는 명령의 표시로 그곳의 권위를 상징하는 비석입니다. 종묘는 역대 제왕들의 신위를 모신 곳이기 때문에 어떤 곳보다도 그 권위와 위엄이 높은 곳입니다. 따라서 모든 왕들도 이곳에 오게 되면 가마에서 내려 고개를 조아렸을 것입니다.
어로, 신로가 나뉘어진 삼도
정문을 들어서면 종묘의 본전이라 할 수 있는 정전까지 박석이 깔려있는데 이를 삼도(三道)라고 부른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가운데는 조금 높고 좌우는 조금 낮게 깔려있는데 일반적인 궁궐의 경우 가운데는 임금이 걷는 어로(御 路)라고 하는데 이곳에서는 가운데 길이 신로(神路)이고 우측길이 어로, 좌측길이 세자로입니다.
가운데 길은 혼령들이 다니는 길이고 좌우가 왕이나 세자가 이동하는 길인 셈이죠. 박석으로 포장된 이 어로는 울퉁불퉁해서 걷기에 불편한데, 이는 엄숙한 제례를 위해서 천천히 걷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랍니다. 아무튼 이 박석을 따라 가면 도착하는 곳이 정전이고, 다시 왼쪽으로는 영녕전으로 이어지며 정전에 가기 전에 재궁, 즉 제례 시 임금이 대기하는 곳을 거쳐 가게끔 이어져 있답니다.
종묘를 바라보며 마음을 기리는 망묘루(望廟樓)
망묘루는 임금이 종묘에 들어와 정전을 바라보며 쉴 수 있는 공간으로 조상들의 업적과 지혜를 기리며 그리워하는 왕의 마음과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을 담아 지어진 건물이지요.
건물의 특징을 살펴보자면 팔작 지붕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이, 맞배지붕의 소박한 종묘의 다른 건물과는 구별된다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망묘루 바로 앞으로 연못이 있는데, 이를 중지라고 한답니다.
천원지방(天圓地方)의 기운을 담은 중지
중지는 네모난 형태의 못 한 가운데에 둥근 모양의 섬이 하나 있는 형태를 하고 있어요. 이것은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 하여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고 믿었기에, 둥근 섬은 하늘을 상징하고 네모진 못은 땅을 상징하는 의미로서 표현 되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둥근 섬 가운데는 소나무를 심는 궁궐과는 달리 향나무를 심어 종묘가 제사를 지내는 장소임을 두드러지게 표현하고 있답니다.
고려의 왕이나 조선의 왕과 어깨를 나란히…
공민왕 신당 恭愍王神堂
망묘루 옆에는 1.5칸 규모의 공민왕신당이 있습니다. 본래 명칭은 ‘고려공민왕영정봉안지당(高麗恭愍王影幀奉安之堂)’이랍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라는 나라가 만들어졌지만 고려 공민왕의 개혁정신만은 그 당시까지 높게 평가되고, 태조이성계와 조선개국신하들도 그의 음덕을 추모해 왔던 지은 것으로 봅니다. 하지만 이와 관련된 역사자료 및 기록이 없어 확실하지 않답니다.
내부에는 공민왕과 노국공주가 한자리에 있는 영정과 준마도가 보관되어 있습니다. 공민왕릉과 노국공주릉이 북한 개성 봉명산 자락에 쌍릉형식으로 나란히 조성되어 있으며, 현재 북한 국보 39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고 합니다.
향대청은 제례에 사용하는 향, 축, 폐를 보관하는 곳이죠. 제례에 나가는 제관들도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는 교육홍보관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제1전시실은 종묘제례에 관한 영상물을 상영하고, 제2전시실에는 신실 모형과 제기들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몸과 마음을 청결히 하는 재궁(齋宮)
외대문 안에서 삼도를 따라 나아가면 재궁(齋宮)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곳은 왕이 목욕재계하며, 제례 의복인 면복(冕服)을 갖추는 등 제례를 행할 준비를 하는 곳으로, 종묘 제례를 앞두고 임금과 세자가 하루 전에 종묘에 도착하여 머물며 재계(齋戒)를 행하는데, 종묘 제례를 시작하기 칠일 전부터 임금은 궁궐의 별전과 정전에서 재계를 시작하고, 마지막 1일은 종묘의 재궁에 머무르며 최종 준비를 한 것이에요.
재궁은 건물 3개가 ㄷ자 모양으로 배치되어있습니다.
북쪽에 왕이 머무는 어재실(御齋室), 동쪽에는 세자를 위한 세자재실(世子齋室), 서쪽에는 왕이 목욕을 하는 어목욕청(御沐浴聽)이 있어요. 담장을 따라 다섯 개의 문이 있어 각각의 문으로 드나드는 사람이 달랐음을 알 수 있지요.
어재실(御齋室)은 임금이 종묘에서 머무를 때 사용하는 건물입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홑처마의 맞배지붕 형식을 보이고 있으며, 지붕의 용마루에 취두와 용두를 두었습니다. 그리고 건물 오른쪽에 큰 쇠솥이 보이나요? 이것은 ‘드므’라고 부르는 물을 담아놓은 솥입니다. 불을 내는 불귀신이 찾아와선 드므에 담긴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라서 도망치도록 하여 화재를 예방한다는 주술적 의미가 있죠.
어목욕청
어목욕청은 어재실 서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임금과 세자가 종묘에 머물면서 목욕 재계할 때 사용하던 건물이에요.
재궁에서 재계(齋戒)를 한 후 제례 준비를 마친 왕이 정전의 동문 앞에 다다르면 커다란 돌판이 있는 곳에 도착하게 됩니다. 이곳은 임금과 세자가 정전으로 들어서기 전 제례의식을 위해 서있는 장소로 판위(版位)라고 부른답니다.
판위는 제향 시 실수함이 없도록 표식을 해 둔 것으로 임금의 판위와 세자의 판위가 있습니다. 임금과 세자는 이 곳에 잠시 멈추어 제례를 올릴 예를 갖춘 후 제사의식을 행하게 된답니다. 이러한 판위대는 정전 동문 밖과 정전 안에도 있습니다.
제수를 준비하는 전사청(典祀廳)
전사청은 종묘제례에 사용하는 제사 음식을 장만하는 부엌으로 신주(神廚)라고도 불리우지요.
정면 7칸, 측면 2칸의 맞배형식으로, 앞뒤로 판문을 두어 출입이 용이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부엌의 좌우측으로는 각각의 창고와 제수간을 배치하여 제수 준비에 어려움이 없도록 하였습니다.
이 곳에는 제물, 제기 등을 관리하고 제사에 관한 일을 맡아 처리하던 전사관이 사용하던 방도 있었습니다.
마당에는 제사 음식을 만들 때 사용하던 돌절구 같은 4개의 큼직한 돌이 남아 있습니다.
전사청 앞에는 전사청에서 만든 제수를 진설해 놓고 잘못된 것이 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만든 널찍한 검사장소인 찬막단이 있습니다.
찬막단 앞에 낮은 단은 성생위라고 하는 단이 있습니다. 이 곳에서는 대제에 사용할 삼생(소, 양, 돼지)를 놓고 제수로서 적합한지 여부를 살펴보기 위한 곳이지요.
성생의식을 거친 희생을 도살하던 공간(재생방)도 따로 있었는데 현재는 존재하지 않아요.
제사에 사용되는 우물을 말하는데 정전 전사청(典祀廳) 동쪽에 위치하고 있답니다. 4m 깊이의 둥근 원형으로 돌을 다듬어 만든 형태의 우물이에요.
사면에 담장을 쌓고 남쪽에 문도 따로 설치하였으며, 우물 주변에 전석을 깔고 서쪽 담장 밑에 배수구를 마련하여 항상 청결을 유지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정성 때문인지 이곳 제정에는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았으며 물이 늘 차갑게 유지 되었다고 합니다.
종묘의 중심 정전(正殿)
정전은 종묘 안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곳으로, 현재 종묘 영역은 사적 제125호, 정전은 국보 제227호로 지정되어 있어요. 창건 당시에는 종묘(宗廟)라고 하면 정전 일곽만을 지칭하였는데. 1421년(세종 3년)에 영녕전(永寧殿)이 세워지면서 영녕전과 구분하여 정전(正殿)으로 불리기 시작했답니다.
정전은 쉽게 말하면 역대 임금님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종묘의 핵심적인 공간입니다. 종묘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물론 이렇게 역대 왕들을 모시는 제사 문화가 우리나라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중국으로부터 전해 내려온 것들이죠. 하지만 현재 중국보다 종묘의 가치가 더 높을 뿐만 아니라 조선 500년 역사 동안 꾸준히 재건되고 보수되어온 흔적이 남아있기에 우리에게 더 소중한 문화유산인 것이죠. 특히 지금도 매년 5월 첫째 주 일요일에 종묘대제를 꾸준히 지내는 등, 조선의 시작부터 내려온 전통이 지금 현대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기에 세계가 주목하는 문화재가 된 것이죠.
정전의 기능을 살펴보면?
사당 건축물이므로, 크게 두 가지 용도를 가지고 있어요. 그것은 먼저 임금과 왕비(王妃)의 신주를 모셔두기 위한 시설로써의 용도와, 정기적으로 나라에서 지내는 큰 제사[제향(祭享)]의 의례[제례(祭禮)]를 행하는 용도이지요.
정전의 제례는 신(神)적 존재인 조상의 신명을 기쁘게 하는 것으로써 길례(吉禮)에 속한답니다. 제사를 올리는 주체에 따라 임금이 직접 올리는 친행(親行)과 세자(世子)나 대신(大臣)이 임금을 대행하여 올리는 섭행으로 나뉘는데, 종묘 정전의 대제(大祭)로는 일년에 모두 다섯 번을 올렸으며, 그 밖에도 향사, 기고제, 천신제, 기우제 등의 크고 작은 제사의 의식을 행하는 곳이지요.
현재 정전의 감실은 총 19개로, 조선 왕조의 임금 중에서 19분의 신주와 왕비(王妃) 30분의 신주가 모셔져 있어요.
돌아가신 왕에게는 서쪽을 높은 위치로 한다는 서상제도(西上制度)에 따라 신실 19칸의 제1실인 서쪽 첫 번째 칸에 태조의 신주를 비롯하여 차례대로 태종(3대), 세종(4대), 세조(7대), 성종,(9대), 중종(11대), 선조(14대), 인조(16대), 효종(17대), 현종(18대), 숙종(19대), 영조(21대), 정조(22대), 순조(23대), 문조(익종, 추존), 헌종(24대), 철종(25대), 고종(26대), 순종(27대)의 신주 19위와 각 왕의 왕비(王妃)의 신주 30위를 합쳐 모두 49위의 신주가 19신실에 모시고 있어요.
정전에서 열리는 제례를 조금 자세히 살펴 봅시다.
정전의 신실은 제사 때가 되면 열린답니다. 평소 신실 내부의 신주장(神主欌) 위에 편히 모셔져 있던 왕과 왕비들의 신주는 제사 시 신주장 조금 앞에 마련되어 있는 신탑(神榻)으로 내어 모셔진다. 신탑 바로 앞의 제상 위에는 60여 기의 제기(祭器)에 소, 양, 돼지 등 3가지 육류의 익힌 내장과 날고기를 포함하여 곡류, 떡, 과일, 채소절임, 젓갈류 등 정성스럽게 준비한 제사 음식과 술, 축, 폐도 함께 올려 제사지내지요.
박석이 깔려 있는 정전의 하월대에는 가운데 신로(神路)를 중심으로 동쪽에는 제관들과 종친들, 서쪽에는 춤을 추는 일무원들이 위치하고, 신로 좌우와 상월대에 악공들이 자리해요, 또한 하월대 밑 뜰에는 동서로 문반(文班)과 무반(武班)의 백관들이 도열하여 제사를 지낼 준비를 하게 되지요.
하월대에서 상월대로 오르는 3군데의 계단이 있는데, 가운데 계단은 태계(太階)라고 하여 제례의식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축과 향이 들어있는 축함을 모실 때와 익힌 고기를 받들어 올리는 천조례와 같은 신(神)을 위한 의식 절차 때 이용하며, 동쪽 계단인 동계[조계(阼階)라고도 함]에는 왕을 비롯한 헌관과 제관들이 이용하게 되며, 서쪽 계단인 서계(西階)는 제사에 쓰였던 축과 폐를 태우는 망료례 때 제관들이 이용해요.
조선시대에는 새벽 1시경에 행해졌고, 현재는 매년 5월 첫 일요일에 영녕전 제례는 오전에 정전의 제례는 오후에 지내고 있어 조선시대의 웅장한 종묘제례를 일반인들도 관람할 수 있답니다.
그럼 이번엔 정전의 건축물적 특징에 대해서 알아봐요.
기둥과 기둥 사이를 한 칸이라 하며 신실이라고 합니다. 건물의 구성을 보면 우선 제일 뒤에 신위를 모신 감실이 있고 그 앞에 제사 지낼 공간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건물은 화려한 장식을 거의 가미하지 않은 단순한 형태를 취하면서 크고 웅장한 맛을 풍기는 것이 특징입니다.
건물은 울긋불긋한 단청을 칠하지 않고 주칠(붉은색 칠)로만 마감하여 마무리 부분은 녹색으로 칠하여 색깔의 사용도 극도로 절제하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렇게 모든 부분이 단순하면서도 절제된 엄숙함을 갖고 있습니다. 지붕은 검소한 맞배지붕이며, 용마루는 하얀색 회칠을 한 흰 선이 긴 수평선을 이루고 있습니다.
정전 앞의 돌계단과 그 일대를 월대라고 하는데 2층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아래 하월대는 그 크기가 동서가 109미터, 남북이 69미터로 우리나라 건물의 월대 중 가장 큰 것입니다. 월대 바닥을 한 변 약 45센티미터 정도의 거칠게 다듬은 박석이 빽빽히 깔려져 있습니다. 월대 중앙에 남북으로 나 있는 신로와 통하는 계단은 사람이 오르내릴 수 없고 혼백만이 오르내릴 수 있다고 합니다.
영녕전의 ‘영녕(永寧)’은 ‘조종(祖宗)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으로 세종 3년(1421) 정전에 모시던 태조의 4대조 목조, 익조, 도조, 환조와 왕비의 신주를 옮겨 모시기 위해 중국 송나라 때 따로 별묘(別廟)를 세웠던 예를 채택하여 짓게 된 것이지요.
정전 vs 영녕전
임금의 신위를 모셨으므로 영녕전의 기본 구성 형식은 정전과 유사하게 ‘ㄷ’ 자형 건물로 되어 있습니다. 전체적인 형상을 살펴보면 중앙이 높고 점차로 낮게 되어있으며, 정면은 총 16칸으로 60미터에 이르지요. 하지만 정전과는 달리 내부에 공신당이나 칠사당은 포함시키지 않고 있습니다.
영녕전은 정전보다 약간 작고 전체 건물 규모도 정전보다 작기 때문에 정전에서와 같은 장대함보다는 오히려 공간이 한눈에 쉽게 들어와 친근감을 느낄 수 있어요.
영녕전은 정전에 모신 임금보다 공덕이 크지 않은 임금의 신위를 모셨기 때문에 위계상으로는 낮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작게 건축한 것이지요.
건축상의 특징을 좀 더 살펴볼까요?
영녕전도 맞배지붕에 용마루가 하얀 양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잡상의 수가 정전보다 적어 정전에 비해 위계가 낮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왕들이 모셔져 있나요?
영녕전에서 모셔진 왕은 중앙 4칸에는 서상제도(西上制度)에 따라 서쪽부터 목조, 익조, 도조, 환조와 그 왕비들의 신주를, 서협실(西狹室) 6칸에는 정종(2대), 문종(5대), 단종(6대), 덕종(추존 왕), 예종(8대), 인종(12대)과 그 왕비들 신주를, 동협실(東狹室) 6칸에는 명종(13대), 원종(추존 왕), 경종(20대), 진종(추존 왕), 장조(추존 왕)와 그 왕비들의 신주를 모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 칸에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태자였던 영왕과 그 비(妃)를 모셔, 모두 34위의 신주를 16칸의 신실에 모시고 있답니다. 결국 영녕전에는 종묘의 정전에서 4대봉사가 끝나고 영녕전으로 조천 되어진 왕과 왕비의 신주가 모셔지게 되었지요.
영녕전 부속건물 제기고
영녕전 제기고는 제향에 사용하는 제기를 보관하는 창고랍니다. 예전에는 매 임금마다 사용하는 제기가 따로 있었고, 각 실의 제기는 별도로 제기함을 만들어 보관한 것이지요.
일곱 신을 모신 칠사당(七祀堂)
칠사당은 정전 울타리 안 월대 남쪽의 왼쪽에 있던 것으로 봄에 모시는 사명과 사호, 여름의 사조, 가을의 국문과 공려, 겨울의 국행 등 일곱신에게 제사 지내는 곳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칠사는 사명(司命)은 인간의 운명을, 사호(司戶)는 문의 출입, 사조(司竈)는 음식을 주관, 중류(中霤)란 거처를 관장, 성문의 출입을 관장하는 국문(國門), 형벌에 관여하는 공려(公厲), 그리고 도로의 왕래 등을 관장하는 국행(國行)을 이야기 하는 것이랍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종묘제례 때와 음력 6월 정한 날에 둘 또는 하나의 신에게 제사를 지냄으로써 나라와 백성들의 평안을 기원하였죠.
건축형태를 살펴보면 ?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정면에는 판문과 격자창을 두고 나머지 3면은 전돌로 벽을 마감하고 있습니다.
정전에 들어가기 전에 오른쪽(북쪽)에 있는 건물로 정전을 관리하던 수복(제사를 준비하던 관노(官奴)와 하급 관원들)들이 거처하던 곳이랍니다.
정면 4칸, 측면 1칸의 맞배집의 형식입니다.
아름다운 숲속의 악공청(樂工廳)
악공청은 이 악사들이 대기도 하고 연습하기도 하는 건물로 하나의 정자나 누각을 보는 듯 소박한 모양새로 지어져 있습니다.
정전과 영녕전의 악공청이 별도로 있으며 마루와 방이 있던 간소한 건물이지요.
정전과 영녕전의 악공청은 원 상태로의 복원이 되어 있지 않고, 특히 정전에 부속된 악공청의 경우 지금은 개수하여 정면 6간 측면 2간을 이루는 기둥만 남아 있기 때문에 내부 구조는 자세히 알 수 없기에 무척 아쉽습니다.
영녕전 악공청
그리고 영녕전에 딸린 악공청은 정전의 악공청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 규모가 더 작습니다. 정면 3간 측면 1간으로 정전에 부속된 악공청에 비해 1/4 규모에 불과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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