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배(胸背)는 왕, 왕세자와 관리의 상복(常服: 집무복)에서만 볼 수 있다. 왕과 왕세자의 곤룡포에는 용문(龍紋)을 수 놓은 둥근 흉배를 가슴과 등, 그리고, 양어깨 네 곳에 가식(加飾)하여 이를 특히 "보(補)"라 하였다. 관리의 상복에는 네모난 흉배를 가슴과 등 두 곳에 가식하였다. 그리하여 왕과 왕세자의 보의 용문이 오조룡과 사조룡의 구별이 있듯이, 백관 흉배에도 관과 품에 따라 문(紋)의 구별이 있었다. 보(補)의 둥근 형은 하늘을 상징하고, 흉배의 네모형은 땅을 나타낸다. 흉배의 제정과 그 변천 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 나라에서는 조선 세종 28년 흉배 사용에 대한 논의가 조정에서 있었으나 검약하자는 이유로 보류 되어 오다가 조선 단종 2년에 다시 흉배 문제가 제기 되었다. 같은 해 12월에 문무당상관(文武堂上官)만 품 수에 따라 명제(明制)를 따라서 사용하기로 하였다(당상관이란 정3품 통정대부 및 통훈대부 중 정3품 통정대부까지만 당상관에 들어간다.). 이 시기에는 대군은 기린(麒麟), 왕자군은 백택(白澤), 문관 1품은 공작(孔雀), 문관 2품은 운학(雲鶴), 문관 대사헌은 해태, 문관 당상 3품은 백한(白鷳), 무관 1품 및 2품은 호표(虎豹), 무관 당상 3품은 웅비(熊羆)등으로 문을 구별하였다. 연산군 11년에 또 다시 흉배에 대하여 논의가 있었다. 이 때까지는 문무관 3품 이상 당상관만이 착용하도록 되어 있던 것을 당하 3품 이하 9품까지도 흉배를 착용하도록 하였다. 이 전에는 명제를 따르던 것을 이 후로는 우리나라에 있는 동물을 사용하여 문관은 하늘을 날으는 새 종류로, 무관은 네 발 짐승으로 품질(品秩)을 정하도록 하였다. 흉배의 화양을 우리 나름의 것에서 찾으려 한 점을 엿볼 수 있다. 연산군대의 흉배 제도는 임진 및 병자 양란을 겪으면서 융복 착용으로 중단 되기도 했으나, 조선조 중기를 통해 습용 되었음을 추리할 수 있다. 이것은 조선 제19대 숙종 17년 3월 상신(相臣)이 진달(陳達)하여 무신의 단령과 흉배에 비금(飛禽) 혼용을 금하였고, 다음 해부터는 조신의 단령에 붙이는 흉배도 구제를 신명(申明)하도록 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리하여, 조선 영조 10년 12월에는 당시 당상 및 당하의 제도가 문란해져 계급이 혼동 되었고, 또, 대전에는 등급이 많아 번거로웠기 때문에 간편한 방법으로 문관 당상은 운학흉배(雲鶴胸背), 당하는 백한흉배(白鷴胸背)를 사용하게 하였는데, 이것은 "속대전"에 실려 그대로 대한제국 고종태황제 때까지 시행 되었다. 고종 8년 2월 흉배 제도가 논의 되는 가운데 "실록"에 명시 된 바는 없으나 실제로 문관 당상관은 쌍학(雙鶴), 당하관은 단학(單鶴), 무관 당상관은 쌍호(雙虎), 당하관은 단호(單虎)로 하여 국운이 다할 때까지 사용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헌의대원왕(흥선대원군)은 고종 32년 4월부터 그의 기린흉배(麒麟胸背)를 어디에 의거한 것인지는 모르나 구흉배(龜胸背)로 바꾸어 사용하였다. 흉배의 크기는 시대에 따라 달라졌는데 유물을 통하여 살펴보면 조선조 중기가 가장 커서 앞가슴을 덮고 있다. 일정하지는 않으나 길이와 너비의 차이는 1~2cm 정도이고 크기가 가장 큰 것은 30cm 안팎이었는데 조선조 말에는 17~18cm 정도로 매우 작아졌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태평 세월일 때는 크기가 커지고 비상 시국에는 작아진 것을 알 수 있다. 흉배의 수(繡)를 보면 그 전통성과 색채의 배색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치밀하고 정성 어린 기법과 깊이 있는 색채 조화의 아름다움에는 고귀함과 권위가 잘 표현 되어 있다. 조선조 말 문관의 학 흉배의 학은 예로부터 장수 길조로 알려져 왔으며 청렴 고결과 천년 수학 만년 수구라고 전해져 온다. 쌍학 흉배는 문관 당상관의 것이다. 날고 있는 두 마리의 학이 불로초를 물고 있으며 위로는 구름, 문 아래로는 물결, 바위, 불로초 등을 수 놓고 있다. 우리나라 전통 수의 특징 중 하나는 실을 굵게 또는 가늘게 꼭꼭 꼬아서 사용하여 수가 부풀어지지 않도록 하였다. 단학 흉배는 문관 당하관이 사용한 것으로 학이 불로초를 물고 하늘을 올라가는 모습이다. 도안은 쌍학 흉배와 그 구성이 거의 같다. 어느 흉배나 수 놓는 사람이 다르면 그 구성과 색 그리고 기법에도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쌍호 흉배는 무관 당상관의 것이다. 호랑이는 무(武)와 용기의 상징으로 예로부터 액을 막아주고 수호해 주는 영수(靈獸)로 알려져 왔다. 쌍호 흉배는 두 마리가 엇갈려 서 있으며 그 사이에 태극 무늬나 보주를 두기도 하고, 위로는 구름, 아래로는 물결, 바위, 불로초 등을 배열하여 수를 놓았다. 단호 흉배는 무관 당하관의 것이다. 호랑이는 서 있는 것도 있으나 대부분 왼쪽을 향하여 앉아서 고개를 정면으로 향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여러 가지 흉배 중에서 가장 많이 사용 되었던 조선조 말엽의 문무관의 쌍학, 단학, 쌍호, 단호만을 다루었다. 흉배는 상복(집무복)의 앞과 뒤에 붙여서 계급의 표시를 하였던 것이다. 상복은 시대에 따라서 색의 차이가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색은 현청색(玄靑色), 현록색(玄綠色) 또는 흑색(黑色)이라고 할 수 있다. 옷감은 주로 숙사(熟紗)를 사용했다. 문헌에는 사(紗), 라(羅), 능(綾), 단(緞)으로 한다고 기록 되어 있다. 안감은 청색사(靑色紗)를 사용했다. 왕족은 홍색 안감을 사용하고 신하는 청색 안을 받치는 법이다. 그러므로, 상복(常服)은 청색 사로 된 안감에 겉은 현청색으로 하였는데 이것을 입고 양지에 선 선비의 모습은 현청색을 통하여 남색이 비치는 오묘하고 품위 있는 아름다움을 보였다. 거기에 흉배를 달고, 띠를 두르고, 사모를 쓰고, 목화를 신은 선비의 모습은 여유 있고 품위 있는 모습이었을 거라 생각 된다. 아마도 조선조의 선비는 사치스러우면서도 한복의 오묘한 미를 충분히 표현할 줄 아는 멋쟁이였으리라 짐작 된다. 류희경 (한국복식문화연구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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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글쓴이 : 깜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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