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야사(宗廟野史) 26 ━ ‘공민왕(恭愍王) 신당(神堂)’에 얽힌 이야기
[공민왕 영정(恭愍王 影幀)의 비밀]
종묘(宗廟)에는 아주 특별한 공간이 있다. 고려왕조(高麗王朝) 제31대 임금인 공민왕(恭愍王)의 영정(影幀)을 모셔놓은「공민왕 신당(恭愍王 神堂)」이 바로 그곳이다.「고려공민왕영정봉안지당(高麗恭愍王影幀奉安之堂)」이라고도 한다.
이곳「공민왕 신당」은 그 동안 비공개 구역으로 항상 빗장이 걸려있어 그 내부의 모습에 대해 종묘를 찾는 많은 사람들의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였는데, 지난 9월1일부터는 신당(神堂) 안팎을 새롭게 단장하여 관람객들에게 공개(公開)하고 있다.
「공민왕 신당」입구에 놓여있는 안내판에는 “이곳은 고려 공민왕의 신위를 모신 신당이다.” 또 “봄, 가을 제사를 지냈다.”고 쓰여져 있는데, 실제는 그러치 않다. 신당(神堂) 안에는 신위판(神位板)이 없으며, 봄 가을에 제사(祭祀)를 지냈다는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다만 공민왕(恭愍王)*과 그의 왕비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의 영정(影幀)과 준마도(駿馬圖)*가 봉안(奉安)되어 있을 뿐이다. 바로잡아야 할 부분이다. 차라리「공민왕 신당(神堂)」보다는「공민왕 영당(影堂)」이라는 명칭이 더 어울리는 곳이라 생각된다.
<공민왕 신당 내부>
2칸 남짓 되는「공민왕 신당」안을 살펴보면, 복사본(複寫本)이라고는 하지만, 위의 사진과 같이 정면에 공민왕과 그가 사랑했던 왕비(王妃)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의 영정(影幀)을 비롯하여 왼쪽 벽에는 3점의 준마도(駿馬圖)가 봉안(奉安)되어 있다. 또한 영정 앞에는 제상(祭床)과 향상(香床)이 1개씩 비치되어 있다. 그런데 이 영정에 얽힌 이야기가 1963년 10월4일자 ‘조선일보’에 실려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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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대접 받는 恭愍王의 그림 / 宗廟 祠堂 속에 放置된 채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에게 왕조(王朝)를 빼앗긴 고려조(高麗朝) 왕이며, 환관(宦官) 최만생(崔萬生)에게 무참히도 죽음을 당한 불운한 공민왕의 그림이 종묘(宗廟)에 안치되어 ‘아이러니컬’한 화제와 함께 큰 주목거리가 되고 있다.
종묘사무소장(宗廟事務所長)의 말에 의하면 언제 어느 때부터 이 그림이 하필이면 종묘로 흘러 들어왔는지 잘 몰라도 사무실 옆*에 있는 도깨비가 나올 듯한 어둠침침한 사당(祠堂) 속에 공민왕(恭愍王)의 그림이 안치되어 있는데, 그림이 종묘에 들어오게 된 경위보다도 그 그림에 여러 가지 불길한 이야기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원래 공민왕의 그림이 귀중한 탓으로 일제(日帝) 때 어느 일본 사람이 그림을 자기나라로 가지고 갔다가 어떤 영문인지 일가가 모조리 참사를 당하여 귀신들은 그림이라고 다시 돌려보내온 그림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 뒤로는 누구나가 욕심은 나지만 이 그림을 가지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종묘(宗廟) 한 구석의 조그마한 사당(祠堂) 속에다 사장(死藏)되다시피 버려둔 것인데 어느 사이에 이것을 알고 종묘(宗廟) 주변의 토백인들이 이 사당(祠堂)에 와서 스스로의 액운(厄運)을 떼고자 고사(告祀)를 지내게끔 되었다는 것이다.
<1963년 10월4일자 ‘조선일보’>
厄運이 붙었다고 禁忌 / 入手 經緯조차 모호해
[燕山과 光海의 魂魄 들었다는 風說때문]
고사를 지내는 이유는 주로 집에 우환이 났을 때 공민왕(恭愍王)의 넋을 달래기 위해서 고사를 지내곤 한다는데, 최근에는 아들의 취직을 시키기 위해서도 여기 와서 고사를 지낸다고 한다.
정말 도깨비가 날것만 같은 두 평쯤 되는 조그마한 사당(祠堂) 정면에 문제의 공민왕(恭愍王)의 인물화(人物畵)가 걸려있는데, 이 그림은 이미 선(線)이나 채색(彩色)도 제대로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퇴색되어, 20호 가량의 화면(畵面)에 가까스로 원(元)나라 복장 같은 의상을 입은 늙은 왕(王)과 왕비(王妃)의 좌상(坐像)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 옆의 벽면(壁面)에는 또 하나의 그림이 있는데, 이것은 공민왕(恭愍王)의 작품인지는 신빙성이 희박하다 한다.
종묘사무소에 의하면 공민왕의 다른 소품(小品)이 현재의 국립박물관(國立博物官)에 한 점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 전형필(全衡弼)*씨 댁에도 한 점 [군양도(群羊圖)*]이 있어 모두가 역사적 유물로서 뿐 아니라 섬세하고 탁월한 솜씨로도 귀중한 고도(古圖)로 이름나 있는데 그 그림보다 몇 배나 큰 이 종묘의 인물도(人物圖)는 그 그림 속에 연산(燕山)과 광해(光海)의 두 왕(王)의 혼백(魂魄)이 들어있다는 소문 때문에 이렇게 방치되다시피 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기(史記)를 보면, 「공민왕은 회화(繪畵)에 능하여 제왕화가(帝王畵家)로서 유명하며 특히 단청화(丹靑畵)에 신묘(神妙)가 있다. 왕비 노국공주(魯國公主)가 하세(下世)한 후 왕은 친히 비(妃)의 초상(肖像)을 그리어 일야대읍(日夜對泣)* 하였다. 왕은 이렇게 인물화(人物畵)에도 능하여 일찍이 아방궁중(阿房宮中)의 인물(人物)을 묘사하여 파리의 머리만한 작은 인물에까지도 정교(精巧)를 극하였다. 왕(王)의 작품이라고 하는 소폭수렵도(小幅獸獵圖)* 수 폭이 현재 전래하여 구 왕궁 미술관에 봉장(奉藏) 되어있으나 확신 여부는 잘 알 수 없다.」····[이병도(李丙燾) 저(著) 「한국사(韓國史) 중세편(中世篇)」에서]
이처럼 종묘에 방치된 공민왕의 그림이 인물화(人物畵)로서 노국공주(魯國公主)와 나란히 앉은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이 아닌가 추측되고 있으나 역사소설가(歷史小說家) 박종화(朴種和)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알기에는 공민왕의 그림은 국립박물관에 있는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와 전형필(全衡弼) 소장(所藏)의 ‘군양도(群羊圖)’ 두 쪽만이 남아 있는 줄 알았는데 만약 종묘에 있는 그림이 공민왕의 작품이라면 문화재로서 커다란 발견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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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신문 기사에 대한 진위(眞僞)는 확인할 수 없지만, 종묘의「공민왕 신당」에 봉안된 영정은 어느 시대 누가 그렸는지 그 작가(作家)나 제작연대(製作年代)가 바르게 밝혀진바 없다는 것이 현재의 일반적인 견해다. 하지만 그 그림의 화풍(畵風)으로 보아 조선시대 초기의 도화서(圖畵署)*의 화가가 그린 것으로 학계에서는 추정하고 있다.
이 영정(影幀)은 매우 오래된 그림이어선지 색이 바래져 있으며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공민왕의 복장이 어색하다. 복두를 쓰고 둥근 깃에 소매가 매우 넓고 옷깃과 수구(袖口)에는 짙은 색 선(線)이 둘러져 있는 홍포(紅布) 단령(團領)을 입은 공민왕의 복장은 전통적인 고려왕(高麗王)의 복장이 아니며, 특히 조복(朝服)을 입은 신하가 들던 홀(笏)을 들고 있는 모습이 고려왕의 복식과는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이 모습은 왕의 복장이 아닌 사신(使臣)의 복장을 하고 있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영정>
어쨌든 종묘(宗廟)는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왕과 왕비들의 신주(神主)를 모신 곳으로서 왕조의 정통성(正統性)을 상징하는 곳이라 할 수 있는데, 비록 종묘 영역의 외진 곳에 위치한 자그마한 규모이긴 하지만, 특이하게 고려왕조의 임금인 공민왕의 영정을 모신「공민왕 신당」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가 없다.
야화(野話)에 의하면, 이곳은 태조4년(1395) 종묘(宗廟)를 창건(創建)할 당시에 지어졌다는데 ”종묘를 지을 때 어느날 북쪽에서 회오리 바람이 불어와 물건이 떨어져서 보니 공민왕 영정이었다. 모두들 신기하게 여겨 그 자리에 신당(神堂)을 짓고 영정(影幀)을 모셨다.”고 전해오고 있다.
설화(說話)적인 이야기이지만, 역설적으로 이런 이야기가 만들어진 자체가「공민왕 신당」을 조선왕조의 종묘에 조성해야 되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아쉽게도 이와 관련하여 현존하는 역사 자료 및 기록이 없어「공민왕 신당」이 언제, 어떠한 이유로 세워졌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어 안타깝다. 다만 종묘의 역사를 기록한 종묘지(宗廟誌:卷一)*에 의하면, ”태조(太祖)가 공민왕(恭愍王)을 태조묘(太祖廟)에 모시기를 명(命)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 고려 공민왕의 신당(神堂)이 종묘(宗廟)에 지어졌을까?
고려왕조(高麗王朝)는 공민왕(恭愍王) 이후 우왕(禑王), 창왕(昌王)과 공양왕(恭讓王)까지 이어지지만 조선(朝鮮)의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 회군(威化島 回軍)으로 실권을 잡은 것은 우왕대(禑王代) 이므로, 새로운 왕조의 명분(名分)을 위해서라도 고려의 정통성은 공민왕대에서 그쳐야 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태조 이성계와 조선의 건국자들은 정통성을 가진 사실상의 마지막 고려왕조 임금이라고 보았던 공민왕을 모시고, 그의 반원자주적(反元自主的) 개혁정치의 추구와 잃어버린 북방영토(北方領土)를 회복하고, 홍건적(紅巾賊)을 섬멸하여 민생(民生)을 안정시킨 등의 커다란 업적을 그대로 계승한다는 의미를 지엄(至嚴)한 종묘(宗廟)에 담아 조선왕조(朝鮮王朝)가 고려왕조(高麗王朝)를 정통적으로 계승하였다는 조선왕조의 정통성(正統性)을 표방하고자 하였던 것 같다.
이러한 뜻은 태조(太祖)의 즉위교서(卽位敎書)에 ”조선의 의장(儀章)과 법제(法制)는 한결같이 고려(高麗)의 고사(故事)에 의거한다”는 구절에서도 잘 읽을 수 있다. 여기에는 함경도(咸鏡道) 변방(邊方)에서 개경(開京)으로 진출하여 새 왕조의 기틀을 세울 수 있었던 기회를 준 공민왕에 대한 태조 이성계의 남다른 존경심이 그 근간이 되었을 것이라 본다.
또한 신당(神堂) 안에 사신(使臣) 복장을 한 공민왕(恭愍王)을 그림으로 표현하여, 조선왕조와 고려왕조의 차별화를 구체화 하려한 조선왕조 개국파(開國派)들의 의지를 나타내었다고 보인다. 따라서 국가 정통성의 명분과 새 왕조의 새로운 면모를 보이고자 한, 두 마리의 토끼를 한꺼번에 잡으려 했던 그들의 입장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한편 종묘에서 그를 추모하고 원혼을 달래어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인하여 희생된 많은 고려인(高麗人)들의 넋을 위로함으로써 백성들에게 그의 정치적인 아량을 보여주며 흐트러진 민심을 다독거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종묘 영역에「공민왕 신당」을 건립하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요즈음, 드라마 「신돈」으로 새롭게 조명 받고있는 공민왕(恭愍王)을 이 해가 다 가기 전에 새로이 단장한 종묘(宗廟)의「공민왕 신당」에서 영정(影幀)으로나마 만나보는 것도 특별한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되어 권해드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위의 내용들을 살펴보았다.
◎ 주(註)
1) 공민왕(恭愍王): 고려 제31대 왕(재위 1351-1374)으로 호는 이재(怡齋)·익당(益堂)이며 이름은 전(전)이다. 초명은 기(祺)로서 몽골식 이름은 빠이앤티무르[伯顔帖木兒]이다. 충숙왕의 둘째아들이며 충혜왕의 동복 아우이다. 비는 원(元)나라 위왕(魏王)의 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이며, 그밖에 혜비이씨(惠妃李氏), 익비한씨(益妃韓氏), 정비안씨(定妃安氏), 신비염씨(愼妃廉氏)가 있다. 충목왕이 즉위할 때 강릉대군(江陵大君)에 봉해졌다. 1341년(충혜왕 복위 2) 숙위(宿衛)하기 위하여 원나라에 가서 노국대장공주와 결혼하였다. 원나라의 지시로 충정왕이 폐위되면서 2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공민왕은 그림에 뛰어나 고려의 대표적 화가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고, 작품으로는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노국대장공주진(眞)》 《석가출산상(釋迦出山像)》 《아방궁도(阿房宮圖)》 《현릉산수도(玄陵山水圖)》 《동자보현육아백상도(童子普賢六牙白象圖)》 등이 있다고 전해진다. 또한 글씨에도 능하며 특히 대자(大字)에 뛰어났다고 알려져 있는데, 강릉 임영관(臨瀛館), 안동 영호루(映湖樓), 영주 부석사(浮石寺)의 현판도 썼다고 한다. 그리고 능은 현릉(玄陵)으로 북한 개성 봉명산 중턱에 쌍릉(雙陵) 형식으로 노국대장공주의 능인 정릉(正陵)과 함께 나란히 조성되어 있는데, 쌍릉 석실 사이에 통로를 만들어 혼(魂)과 혼(婚)이 오갈 수 있게 한 유혼혈(遊魂穴)이 있으며, 고려 왕릉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능으로 평가 받고 있다.
2)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 고려 공민왕(恭愍王)의 왕비로서 보탑실리공주(寶塔實里公主)라고도 한다. 중국 원(元)나라의 황족인 위왕(魏王)의 딸로서, 1349년(충정왕 1) 원나라에서 공민왕과 결혼하여 승의공주(承懿公主)로 책봉되었다. 1351년 12월 공민왕과 함께 귀국하였고 공민왕은 그 달에 즉위하였다. 1365년(공민왕 14)에 난산(難産)으로 죽었다. 그 해 4월 대신들은「인덕공명자예선안왕태후」라는 칭호를 올렸고 이듬해 원나라에서 「노국휘익대장공주」라는 시호를 내렸으나 공민왕의 명에 의해「노국휘의대장공주」로 고쳐졌다.
3) 준마도(駿馬圖): 공민왕의 애마(愛馬)를 그린 그림으로 전해지며, 원본은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짐.
4) 종묘지(宗廟誌): 종묘 안에서 일어난 일들을 자세하게 기록한 책으로 원고지에 기록한 필사본만 전해진다.
5) 사무실 옆: 신문 기사가 보도될 당시에는 지금의 망묘루(望廟樓)를 종묘사무소의 건물로서 사용하였었다.
6)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 고려 제31대 공민왕(恭愍王:1330∼74)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 그림이 너무 낡았고 몹시 훼손되어 필법을 자세히 파악하기는 곤란하나 호복(胡服)을 입고 말을 모는 무사의 모습과 북종화(北宗畵)적인 풀의 묘사가 눈에 띈다.
7) 전형필(全衡弼): 문화재 수집가. 호는 간송(澗松). 서울 출생. 증조부때부터 배우개(지금의 종로4가) 중심의 종로일대의 상권을 장악한 10만석 부호가의 상속권자로, 휘문고보를 거쳐 일본 와세다 대학 법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귀국하여 조선의 옛 미술품에 대한 깨달음을 얻어 사설박물관 건립을 추진하였다. 1934년 성북동(城北洞)에 부지를 마련, 1938년 한국 최초의 사설박물관인 보화각을 설립하고 그 뒤 문화재 수집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보화각은 뒤에 간송미술관으로 개칭되었다.
8) 군양도(群羊圖): 양 떼 그림으로 판단되나 정확한 그림이나 해설을 접해보지 못하였음.
9) 일야대읍(日夜對泣): 밤낮으로 바라보며 움.
10) 소폭수렵도(小幅獸獵圖): 수렵 장면을 묘사한 그림으로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으며, 공민왕의 작품이라고 전해지지만 확실치 않다.
11) 도화서(圖畵署): 조선시대 그림 그리는 일을 관장한 관청.
◎ 참고문헌
1) 조선일보 (1963년 10월4일자)
2) KBS (역사퀴즈/역사스페셜)
3) 두산대백과 사전
4) 일월오악도 (안 천/교육과학사)
5) 공민왕릉의 춤 / 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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