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내변산 오솔길(펌)
내변산 오솔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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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부안에 살고 있는 핑계로 번번이 부안을 가게 되는데, 아마 올해 일곱 번 정도 갔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 열 번은 채울 생각입니다. 제가 사는 곳에서 그리 멀지도 않지만 달력만 보면 언제 갔다 왔는지 잊어버리고, 금단현상처럼 다음 주에 한 번 가야지 하고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아마 변산반도를 한번이라도 가본 분들은 부안의 색다른 풍경을 쉽게 잊지 못할 것입니다. 끝없이 펼쳐지는 변산의 갯벌, 곰소의 염전, 채석강, 내소사 등등... 작년에 우리나라 국민들이 세 번째로 많이 간 곳이라고 하니 아름답기 그지없는 곳입니다. 바람이 차가워지는 가을의 초입에는 전어와 쭈꾸미를 먹고, 사시사철 백합죽을 먹을 수 있습니다. 운이 좋으면 값싸고 맛있는 한정식을 먹을 수도 있습니다. 아마 제가 사는 곳에서 바다를 즐길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가 부안에 가게 되는 이유는 바다 때문이 아닙니다. 내변산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변산은 역사적으로 보면 진표율사가 몸을 바위에 던지는 망신창법이라는 수행법을 개발하고, 유식사상과 미륵신앙을 기반으로 하는 법상종을 개창하게 되는데 그때가 6세기입니다. 미 륵신앙은 부처님을 이 땅으로 끌여들여, 이 세상을 불국토를 만들려는 지극히 현세 중심적 신앙입니다, 이러한 면 때문에 미륵신앙은 새로운 질서 혹은 개혁을 갈망하는 수많은 민중에게 깊숙이 침투하게 됩니다. 민중들에게 있어서 현실생활에서 겪는 신분제, 가혹한 수탈 등의 핍박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미륵이 재림해서 고통, 모순, 탐욕 등의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내변산의 오솔길을 걸으며 명상과 사색을 하고 수많은 민중을 위한 새로운 질서나 개혁을 갈망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미륵불의 현신이나 불국토를 만들고자 염원하는 순례자는 아닙니다. 오히려 지극히 세속적인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 내변산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갑니다. 아드레날린, 알도스테론 심지어 도파민 까지 분비하기 좋은 곳입니다. 이러한 쾌락은 지극히 자연적인 것인데, 내변산에서 보다 깊은 쾌락을 느끼는 이유는 아마도 내변산의 원시적인 송림 때문일 것입니다. 혹시 내소사를 가보신 적이 있다면 그 앞길의 전나무 숲을 보면서 입이 벌어졌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소나무로 만들어진 내소사 경내의 건물을 보면서 입을 다물지 않았다면 정말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수 백년된 소나무로 만들어진 절집 앞에서 백년도 안 된 전나무들..., 고개를 들어 먼 산을 봤다면 오히려 전나무가 이상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택리지에 보면 ‘높은 봉우리와 깍아 자른듯 한 산꼭대기, 평평한 땅이나 비스듬한 벼랑을 막론하고, 모두 큰 소나무가 솟아나서 하늘을 가렸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 많던 수백년 묵은 소나무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이 소나무들을 일제에 빼았겼다는 사실은 무척 슬프게 합니다. 이 산의 소나무도 아직 100년을 살지 못했습니다. 내소사가 아름다운 것은 수수한 건물. 그리고 사찰의 건물과 뒷산의 배치가 너무 편안하기 때문입니다. 내소사 뒷산은 지독한 악산인데, 그 기운을 내소사가 부드럽게 흡수하기 때문입니다. 내소사에 가본지는 아주 오래 되었는데, 내소사의 부처님이 눈을 두 번 감았던 부끄러운 사건 때문입니다. 첫번째는 부안군수가 군민들에게 몰매를 맞았을 때고, 두 번째는 제가 대웅전 불상 뒤편의 벽화로 그려진 관음보살의 사진을 찍었을 때, 부처님이 눈을 감았으리라 하는 생각입니다. 내 변산은 전형적인 소나무 숲이기 때문에 단풍이 별로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실망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소나무 숲과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내변산은 겸재의 산수화나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실물로 본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또는 화투의 솔광의 배경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는데, 내변산의 숲속에서 화투를 친다면, 아마 또 다른 신선놀음일 것이고, 직소폭포의 위쪽의 평탄한 오솔길, 몸속으로 스며드는 피톤치드, 그리고 산위에서 바라보는 바다와 부안호의 부수적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울창한 송림에 가장 아쉬운 것은 그 많은 소나무 중에 매창과 유희경이 손잡고, 가끔 뽀뽀도 하면서 걸었을 이 오솔길에 그 현장을 목격했던 소나무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손잡고 걷기엔 좋은 길입니다. 아마 매창과 삼각관계에 있던 허균도 이 숲길을 걸면서 작품구상을 하였을 지도 모릅니다. 사회 개혁을 실천하고자 하는 인물로서 홍길동을 내세우고 위도를 보고 유토피아로서 율도국을 창조면서 호부호형을 하지 못하는 것, 매창에 대한 짝사랑을 삭였을 지도 모릅니다. 혹시 홍길동전에 나오는 도적들의 소굴이 이곳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내변산을 감상하는 길은 직소폭포쪽으로 올라가거나, 어수대에서 쇠뿔바위를 거처 장군봉으로 가거나, 또는 개암사 뒷산을 통해 올라가는 길이 있는데, 직소폭포에서 내소사 가는 길을 많은 사람들이 이용합니다. 그 길이 가장 아기자기 하고 내변산의 운치를 가장 잘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직소폭포 초입에서 월명암에 이르는 길은 짧은 산책코스로도 아주 좋습니다. 어수대를 거처서, 쇠뿔 바위에 올라 장군봉으로 가면 부사의 방 이라는 망신참법 체험 코스가 있습니다. 밑으로는 부안호가 보이고 호랑가시나무나 꽝꽝나무의 숲이 있기 때문에 상당히 좋아하는 길입니다. 언젠가 장군봉으로 가서 하산한 적이 있었는데 부안호수의 물길에 막혀 어둠속에서 되돌아 온 적이 있습니다. 해가 진후 오솔길은 어둠보다 더 깜깜합니다. 이 깊은 어둠은 라이터 불빛, 휴대전화 불빛, 그리고 카메라 불빛까지 우리가 소지하고 있는 빛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알게 하고, 가장 중요한 사실, 사람도 깊은 어둠 속에서도 볼 수 있는 들짐승과 같은 지위라는 걸 깨닫게 줍니다. 정말 동물적인 감각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라고 할까요. 그리고 그 어둠은 부안호의 수면에 별이 총총 떨어지게 합니다. 수면에 새겨진 우주의 별들과 은하수, 하늘을 보기가 겁이 날 정도 아름다운 광경입니다. 그런 광경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이런 세상이 또 다른 곳에도 있겠지만, 그 순간 우주는 나의 것이 됩니다. 정황상 인적이 없는 호수에 접한 숲속은 월든이나 Yeats의 Innisfree 인데, 오두막 하나 만들어 놓고 해가 뜨면 일어나서 호수의 물에 몸을 씻고, 낮에는 칡뿌리 캐면서 한 1년 살면 좋겠다 싶은 곳이기도 한데, 아쉽게도 칡넝쿨이 없습니다. "내가 숲속으로 들어간 것은 내 인생을 오로지 내 뜻대로 살아보기 위해서였다. 이런 소로우의 자연 철학과 사회개혁 사상이 월든 숲속에서 탄생한 걸 보면 반계 유형원이 내변산에서 칩거하면서 반계수록을 저술했다는 게 새삼스러운 일은 아닙니다. 노비제의 혁파와 노비세습의 금지, 소농경제에 기반한 국가체제를 완성, 일부 계층이 대토지를 소유한 데 사회 모순대한 대안으로서 균전제(均田制)를 내세워 실제 경작자에게 토지를 주어 기본생활을 보장하며, 세제를 소농민 상인등 피지배층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한층 자유롭고 평등하게 보장하는 혁명적 구상인데, 유형원이 MB의 실용정부에 제안하는 개혁안 인 것 같습니다. MB가 새겨야 할 부분입니다. 내변산의 종주는 개암사에서 시작하는데, 산길을 따라 내소사 뒷산을 거처 격포까지 가는 여정인데, 지난 7월 종주에 도전했습니다. 이틀은 걸릴 것 같은데, 아침일찍 출발하면 해질 녘 쯤이면 격포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따뜻한 오솔길을 밟고, 부드러운 하늘을 보면서 6시에 출발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길이 없습니다. 가다가 길이 막히면 되돌아와서 다시 길을 잡고, 어느 곳에서는 두 시간쯤 가다가 되돌아오곤 했습니다. 친구는 종주가 끝나면 픽업해주기로 하고 같이 동행하지는 않았는데 점심쯤에 친구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내소사 뒷산인데’ 하면서 불통이 됩니다. 바로 저 앞산인 것 같던데, 가보니 아닙니다. 산들의 높이가 대략 4~500 미터 되지만 촘촘히 붙어 있고, 봉우리 마다 100~200 미터 정도를 오르락 내리락 해야 하기 때문에 보통일이 아닙니다. 큰 산맥의 능선을 따라 가는 게 아니라 작은 산을 열 몇 개 올라야 하는 일이고, 행여 산을 잘못 올라왔다면.... 내려가서 다시 올라가야 됩니다. 쪼그려 뛰기 같은 건 데, 결국 쪼그려 뛰기 하다가 산에서 친구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 친구는 부안의 백산 사람입니다. 만약 유형원의 개혁안이 어느 정도 실현 되었으면 어땠을까요. 경자유전의 토지제도와 불합리한 신분제, 그리고 가혹한 세제 등이 어느정도 개선이 되었다면, 고창, 부안, 정읍, 김제의 1만 여명의 농민들이 낫과 죽창을 들고 백산에 모이지 않았을 겁니다. 백산에서 농민군들은 不殺生 不盜物, 忠孝雙全 濟世安民, 逐滅洋倭 燈凊聖道, 驅兵入京 滅盡權貴의 4대 강령을 발표하고, 동학혁명의 이념인 보국안민실천과 반외세 반침략에 대한 전쟁을 선언하게 됩니다. 농민들이 죽창을 들고 봉기하면서 불살생을 외쳤다는 건, 낭만적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역사와 현실은 치열합니다. 120년 전에 일어났던 갑오농민전쟁이 결국 외세를 불러들이긴 했지만 봉건시대에 막을 내리게 하는 민중혁명입니다. 물론 인내천을 기본 철학으로 하는 동학의 사상은 모든 인간이 미륵이라는 진표의 사상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최초의 중주 시도는 쪼그려 뛰기 하다가 지쳐서 실패를 했습니다. 해지기 1시간 전부터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는데, 내려오는 길도 여전히 길은 오리무중입니다. 산에서는 물길을 따라 내려오는데 일반적인데, 내변산의 광범위한 면적을 생각하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날씨가 흐려서 빨리 어두워지면 더욱 초조해 집니다. 어두워지면 초조해 지고, 초조해지면 무서워지는데, 한낮에도 어두운 이 숲길을 해를 먼 산으로 넘겨버리고 불빛도 없이 걷고 있다면 간첩이거나 미친놈이지요. 그래도 이런 분위기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아무도 없는 짙은 어둠속에서 명상을 하듯이 한참 걷다 보면, 계곡의 바위를 치면서 흘러가던 물소리도 사라지고 차가운 산의 공기가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부드럽게 스치는 바람을 맞으며, 고요한 산을 마치 기도하듯 걸으며 느끼는, 살아 숨 쉬는 고요한 산의 아름다움은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하나의 환상이고 빨리 산을 탈출해야 한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열심히 걷다보면 현실은 코앞에 다가옵니다. 현실로 돌아와 배낭에서 랜턴을 꺼내고 휴대전화를 켜고 친구에게 픽업해달라고 문자를 보냈더니, 친구도 산에서 바로 내려온 듯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전화가 옵니다. 그 친구도 오후 내내 혼자서 산속에서 헤맸다고 합니다. 같은 산에 있었는데도 반나절 동안 만나지 못하고 헤맨걸 보면 허균하고 매창이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이듭니다. 몇 년 전부터 동학 동민군의 후손들인 고창, 부안, 정읍의 농민들은 해마다 가을이 되면 봉기를 합니다. 생존기반인 농업을 지키고 농민들이 생존할 수 있도록 국가가 나서서 농업보호정책을 시행하라고 봉기를 합니다. 이 지역의 농민들은 죽창대신 만장을 들었지만 농민군의 후손답게 호남선을 점거하고 쌀가마니를 불사르며, 국가나 국민들이 농민들의 고통을 해아려 주기를 바랍니다. 손수 농사지은 쌀가마니를 태운다는 것 무슨 의미인지 다 아실 겁니다. 순박한 부안의 농민과 어민들이 2004년 농사를 접고 6개월동안 봉기를 한적이 있습니다. 위도에 방사능폐기물 처리장유치를 반대하기 위해서 였는데, 아름다운 고향을 지키기 위해서 입니다. 그 청정지역에 방사능물질 폐기장이 지어진다면, 그곳의 주민들은 새만금의 갯벌이 막혔을 때처럼 고향을 떠나야 할지도 모릅니다. 원자력 발전이 가장 값싸고 친환경적인 에너지라고 하는데, 방사능 폐기물을 수 만년동안 후손에게 물려주고 누출 위험성과 처리비용을 감당하게 해야 한다면 결코 경제적이거나 친환경적이지 않습니다. 또한 부안과 갯벌이 새만금의 뚝에 가로막혀 썩어가고 있는 것을 보면, 과연 우리가 눈앞의 이익 때문에 얼마나 많은 부담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조금 불편하더라도 조금씩 에너지나 다른 자원의 소비를 줄인다면 우리의 후손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미래의 기회마저 빼앗기 위해 미쳐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부안이 주민들이 핵 폐기장 설치를 좌절 시킨걸 보면서 동학의 후예답다고 자랑스러워 하지만, 이런 고통이 경주나 다른 곳에서 재현되고 있는 걸 보면 양심에 자유로울 순 없습니다. 현재로서는 원전을 중지시키고 그 안에 핵폐기물들을 보관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부안의 군민들이 새만금의 갯벌은 지키지 못했지만, 변산의 아름다움을 지켜준 것에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갯벌을 막아 농토를 만들고 공장을 짓는 것이 삶을 더 풍요롭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나 산림과 농토, 갯벌에 공장이 하나 더 지어질수록 몸과 마음이 썩어가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보다 수십배 많은 대가를 치르고 비용을 들여 복원을 하려 하지만, 이미 피폐해진 자연과 인간의 본성은 되살릴 수 없습니다. 내변산 종주에 실패한후 서너번 더 부안에 갔습니다. 부안에 가면 내변산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변산에 가면 몸과 영혼이 맑아지는 오솔길이 있고, 그 오솔길을 걷다보면 숲속의 나무와 계곡의 물, 사람이 우주의 일부라는 것을 알게 될 지도 모릅니다. 숲속의 물과 공기를 마시고 바위에 앉아 쉬다보면 아주 작은 자연의 일부가 됩니다. 사람이 자연의 일부고 또 교감하기 때문에 자연이 더욱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것이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즉 생명을 구성하고 생명을 유지시켜주기 때문에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소중함을 쉽게 잊는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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