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목조건물 (木造建物)
덕수궁 중화전에서의 일이다. 저 앞에 앞뒤를 가리고 있는게 무엇 이예요 하고 문의한다, 저것은 궁궐에서 제일 중요한 건물인 중화전 인데 임금님이 공식적 의식을 행하는 곳으로 1906년에 지어졌고 현재는 대수리를 하고 있습니다. 올해 12월중에는 볼 수가 있을 겁니다 하니, 그래요 그럼 근 100년쯤 된 것이네요, 콘크리트 건물의 내용년수가 60년인가 된다는데 목조건물이 가능한 것인가요? 예! 가능 합니다 현재 고려시대의 목조건물이 국보로 지정 되여 있는 것도 5개나 됩니다. 콘크리트 건물은 중요한 기둥 부분이 손상 되면 수리가 대단히 어렵다고 하고 수리한들 수명이 60년을 넘지 못한다 하나 우리나라의 목조건물인 경우는 기둥에 금속 못을 안쓰기 때문에 기와와 써가래를 내리고 차례로 뜯어내면서 손상된 부분을 수리 혹은 기둥까지도 갈아 끼우고 다시 써가래와 기와를 올리면 새 건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우리나라 묵조건물은 천년을 기원하며 정성 드려 짖는다 합니다, 예를 들면 가까이 충남 예산에 있는 수덕사 대웅전에 가시면 옆면의 기둥이 갈아 끼운 것을 볼수 있을 겁니다, 다만 화재에 약한 것이 흠이지만 관리자의 말에는 천년을 기리는 마음으로 살피고 있다고 하니 고마울 따름이다.
국보 제 18호 부석사 무량수전 고려 우 왕 2년 1376년 원응국사가 중수.
국보 제 49호 수덕사 대웅전 고려 충렬왕 34년 1308년 대웅전 건립.
국보 제 15호 봉정사 극락전 고려 공민완 12년 1363년 옥개부분을 크게 수리.
국보 제 19호 부석사 조사당 고려 우 왕 3년 1377년 원응국사 중수.
국보 제 51호 강릉 객사문 고려 태 조 19년 936년 본부객사로 임영관 창건.
부석사 무량수전
오래된 이야기인데 94년도 쯤 된다 여름 휴가를 처가 식구들과 함께 경북 울진 평해의 백암온천에서 지내면서 포항 장기곶, 청송 주왕산, 병곡 고태불해수욕장, 남쪽 관동팔경인 평해 월송정, 울진 망양정, 울진 불영계곡과 불영사 등 남쪽 동해안을 두루 들리고 돌아 오는 길에 작년에는 안동의 도산서원을 들렸으니 올해는 붕화로 해서 영주 부석사를 들리지요 하며 조심스레 제의를 하고는 먼저 앞장을 섰다 8월초의 찌는 더위에 막 마라톤 골인 지점에 도달하여 쓰러지는 선수들 같이 모두가 피곤하기는 말 할수도 없고 먹는 것 까지도 귀찮아 빨리 돌아가 쉬고 싶은 눈치 인데다 차량만도 4대의 대식구들에게 그리쉬운 의견 일치는 아니였다.
태백산 부석사 일주문을 지나 양쪽의 사과 나무 숲을 지난다 아직 잘 익은 사과는 아니지만 우유에 잠시 담갔다 막 끄낸 듯한 흰색을 띤 사과 들이다, 당간지주를 지나 한참만에 안양루에 올라 앞을 바라보고 더위를 식히고 땀도 닦으며 최석우 선생님의 말을 생각한다 “산 뒤에 또 산 그 뒤에 또 산마루, 눈길이 가는데 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 듯 싶어진다, 이 대자연속에 이렇게 아늑하고도 눈맛이 시원한 시야를 터줄 줄 아는 한국인, 높지도 얇지도 않은 이 자리를 점지(占地)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층 그윽하게 빛내주고 부처님의 믿음을 더욱 숭고한 아름다움으로 이끌어 줄수 있었던 뛰어난 안목의 소유자, 그 한국인 !! ”
돌아서 보는 그곳! 흔히 우리들이 한 장의 옛 사진을 다시 보고 느끼는 맛 ! 정감이 가고 잘 어울리게 지어진 건물을 보게 된다, 무량수전 현판은 공민왕의 글씨라고 하는데 또다시 최순우 선생님의 말씀을 빌리면 “ 무량수전은 고려중기의 건축이지만 우리 민족이 보존해 온 목조 건축중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오래된 건물임이 틀림 없다, 기둥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결 하면서도 역학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것 만을 갖춘 필요미(必要美)이며, 문창살하나 문지방 하나에도 나타나 있는 비례의 상쾌함이 이를데가 없다, 멀찍이서 바라봐도 가까이서 쓰다듬어 봐도 너그러운 자태이며 근시안적인 신경질이나 거드름이 없다. ” 그렇다 현재 남아 있는 고려건물중 유일한 팔작지붕에다 고려인의 장인정신이 깃 드려진 주심포 방식의 교과서라 고도 하며, 건물 또한 65.7평으로 매우 크다, 배흘림, 안쏠림, 귀솟음 또한 같은 맹락이다, 1916년 해체 수리시 묵서에 의하면 1376년에 원응국사가 중창(重創) 곧 다시 지은 것이 아니고 중수(重修) 즉 고처 지었다고 하니 원래의 건물은 대개 100-150년 앞서 지어진 것으로 보고 있으니 나무중에 으뜸인 소나무, 그중에서도 수령이 600년이고 제일 크다는 영월 청령포의 관음송(觀音松)격이 아닌가 생각된다.
수덕사 대웅전
내고향 내포(內浦)를 통틀어 태안 반도라고도 하며, 오대산에서 뻗어 내려온 차령산맥 줄기가 속리산에서부터 관악산까지 치올라 가던 한남정맥이 천안 광덕산에서 분기하여 서남쪽으로 달리며 금북정맥을 이루어 내려가다 홍성, 청양, 보령의 3군 접경인 오서산에서 북으로 역주하여 가야산 연봉을 이루고 다시 문수산 팔봉산 백화산으로 서주 하면서 만들어 놓은 서해상의 돌출부로 태백산 정기가 뻗어 내려 응축된 한반도의 요긴 처 라고도 하며, 가야산을 둘러싼 예산 서산 홍성 태안 당진 아산 지방들을 이르는 말이다.
조선 지리학자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에 의하면 “ 산천은 평평하고 아름답고, 서울의 남쪽에 위치하여 서울의 세력있는 집안치고 여기(충청도)에 농토와 집을 두고 근거지로 삼지 안하는 사람이 없다….. 충청도는 내포를 제일 좋은 곳으로 친다. 가야산을 중심으로 하여 서쪽은 바다요, 북쪽은 큰 만(灣)이고, 동쪽은 큰 평야, 남쪽은 그 지맥이 이어 지는바, 가야산 둘레 열개 고을을 총칭하여 내포라 한다. 지세가 한쪽으로 막히고 끊겨 있어 큰 길목에 해당하지 안으므로 임진, 병자 두 난리의 피해도 이곳에는 미치지 안았다, 토지는 비옥하고 평야가 넓고 물고기 소금이 넉넉하여 부자가 많고 또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도 많다.”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나 힘이 쎈 인물이 많다 최영장군 사육신성삼문 충무공이순신 추사김정희 면암최익현 김대건신부 윤봉길의사 김좌진장군 개화당김옥균 상록수심훈 남로당박헌영 만해한용운 등등이 있다
백제가 한강유역을 상실(475년 개로왕)하고 금강유역으로 천도해와 제해권(制海權)을 회복하는 6세기경 (599년 혜왕) 해양 활동이 활발하면서 태안마애삼존불(보물제43호), 서산마애삼존불(국보제84호) 과 예산봉산화전리 사면불(보물794호)이 조성 되면서 중심지역이 되고 태안반도의 우두머리 격인 주류성(조선 홍주, 현재 홍성)과 가야산에 알맞은 장소를 물색하여 지어진 것이 바로 수덕사 였을 거라는 최완수 선생님의 이야기 이다
수덕사 대웅전, 현재까지 창건 연대(고려충렬왕 34년 1308년)가 정확히 밝혀져 있는 것으로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 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700년 쯤 된 목조 건물이다 언뜻 계산이 안 되는 아니 제일 오래 살수 있는 주목과 은행나무도 이정도 오래된 것은 몇 그루 정도 인데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죽은 나무로 지은 건물이 이렇게 오래도록, 이 사실만으로도 건물에 대하여 숙연해질 따름이다, 건물구조 또한 아주 단순하다, 화려한 장식은 많지 안으면서 단순성이 보여주는 간결한 아름다움 꼭 필요한 것 만 있는 필요미로 마치 묵묵히 지키며 사리에 어긋남 없이 문중의 기품이 배여 나는 종가댁 맏 며느리 같기도 하다, 건물 크기 또한 아주 크지는 안고 적다고 보기는 좀 큰 듯한 46.2평 이고 백제계 주심포 건물에는 기둥과 기둥사이의 간격이 넓어 위압감의 느낌이 있으나 본 건물의 중요한 특징인 배흘림 기둥의 탄력으로 우리가 보는 시각에 불균형 또는 무리를 느끼게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측면의 우미량(牛尾樑)을 볼수 있다 이것은 팔작이나 우진각집 또는 조선시대 중기 이후에는 볼수 없는 보의 한가지로 고려시대와 조선초기의 맞배집에서 볼수 있는 특징으로 도리(기둥위에 방 공포 보 그위에 도리 그위에 서까래)와 도리 사이를 연결 시켜주는 것으로 도리는 위치에 따라 서로 높이에 차이가 있어 아래와 위의 도리를 서로 연결 시키는데 직재로서는 해결되지 않으므로 반드시 곡재를 사용하여 역학적이고 아름다움을 보여주며 지붕의 무게를 기둥에 골고루 분산 시키주는 역할을 한다. 책에 따라 우미량의 미를 꼬리 미(尾)와 눈썹 미(眉)로 표현 되는데 모양으로 보아 꼬리 미(尾)가 맞는듯 싶다.
기둥에는 각형기둥과 원형기둥이 있다. 각형기둥은 방형기둥(4각기둥), 6각기둥, 8각기둥으로 나누어 지는데 방형기둥이 주로 사용된다, 원형기둥은 원통형기둥과 민흘림기둥, 배흘림기둥으로 세분한다, 원통형은 기둥머리 기둥몸 기둥뿌리의 직경이 동일한 크기의 기둥으로 민흘림 배흘림 보다 적게 사용 되고, 민흘림기둥은 기둥머리 직경이 기둥뿌리 직경 보다 적게 마름된 기둥으로 다포계 및 익공계 건물에 많이 볼수 있고 주심포 건물에는 드물다 한다, 마지막으로 배흘림기둥은 기둥머리와 기둥뿌리 보다 기둥몸을 배블린 형식으로 원형기둥중에서 가장 많이 볼수 있고 외국에서는 엔타시스(Entasis) 기둥이라고 부른다, 엔타시스형의 설명으로는 기둥을 탄력성 있게 보이며, 기둥 모양이 짓눌려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지 안은 채 지붕 무게가 기둥을 가볍게 누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며, 마치 살아 있는 물체가 힘 안 들리고 짐을 지고 있는 것 처럼 보이게 한다고 하며 이방식은 삼국시대 이래로 우리 목조 건축의 중요한 특징이다.
봉정사 극락전
安東 하면 우선 떠오르는 안동 김씨의 세도 60년 순조(1800년)의 순원왕후, 헌종의 효현왕후, 철종(1863년)의 철인왕후 까지의 정치, 하회마을, 병산서원, 도산서원, 전탑 과 고려때부터 이어온 명문가 삼태사묘(三太師廟)가 있는 역사와 전통을 두루 갖춘 유서(由緖) 깊은 고장이다, 고려의 왕건이 公山(팔공산) 전투에서 심숭겸 장군을 잃는 등 참패를 당하고 구사 일생으로 고창(지금의안동) 북쪽으로 도망하게 되고, 그 후 이 지방의 토호(土豪)인 권행(權行), 김선평(金宣平), 장길(張吉)이 이끄는 향군의 도움으로 진주, 상주, 고창을 연결하는 고창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되여 삼국통일의 기반이 된다, 그래서 왕건은 동쪽을 안정 시켰다(安於大東) 하여 고창에서 앞의 글자와 끝의 글자를 따서 安東이란 지명을 지어 주게 되고, 3호족에게 각 각 태사(太師)의 벼슬을 내려 안동 권씨, 안동 김씨, 안동 장씨의 시조가 되게 된 것이다, 물론 권태사묘, 김태사묘, 장태사묘도 이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고장에 봉정사 극락전이 위치하고 있으니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이 필요 하랴 다만 수식어만을 낳을 뿐이다, 1968년 8월 1일부터 8월 5일까지 맹인재(孟仁在) 전문의원에 의해 예비조사 보고서에 보면 " 후면 옥개 부분에 누수로 목재가 심하게 부식 훼손 되였고, 수리전에는 가옥개(假屋蓋)를 설치하여 수리공사 대비가 필요 하고, 암기와(女瓦) 약 90%, 숫기와(夫瓦) 약 70%를 교체 해야 된다 " 로 되여 있다 지금까지의 고려시대 목조건물은 모두 일제시대 때 수리 되었으나 이 건물만은 우리 기술로 완벽하게 1972년 7월15일 착공하여 1974년 1월 10일 해체 수리공사가 종료 되였다, 특이한 것은 수리하면서 원래의 형태대로 복원 한 것이다 해체 수리시 정면 3칸에는 띠살의 4분합문으로 되여 있었으나 이것은 조선시기 중수때 변형 시킨것으로 어칸(御間)에 신방목(信枋木) 과 신방석(信枋石)이 노출되여 있어 판문(板門) 형태로 밝혀져 원래의 모습인 고려시대 양식으로 되돌려 현재에는 판문과 살창으로 되여 있다.
1972년 8월 14일 해체 수리시 마루도리 받침 장혀에 파서 넣은 한지의 상량문에 天啓 5년, 조선인조 3년(1625년)에 중수, 至正 23년, 고려 공민왕 12년(1363년)에 옥개부문 크게 수리 하였다 한다, 1363년 이 년도은 매우 놀라운 것이다 지금까지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은 부석사 무량수전으로 1376년 중수로 되여 있으나 이보다 13년 이전에 중수 된 것이다. 목조 건물은 신축 후 옥개 부분을 크게 수리하게 까지는 통상적인 예로 100-150년이 지나야 하므로 1,200년대 초 까지로 건립 연대를 올려 볼수 있게 된 것이다, 1363년 수리후 1625년에 262년만에 수리 그로부터 1972년은 347년 만에 또 재수리라 할수 있지 안은가 물론 중간의 수리 기록이 있을수 있다고는 하지만 앞의 기록으로 보아 신축년도가 100년 정도는 좀 더 앞으로 볼수 있는 것은 아닌지 개인적인 의견이다.
또한 이 건물은 높지도 크지도 안다 무량수전은 65.7평, 10.08m높이, 9량집, 수덕사 대웅전 46.2평, 9.70m높이, 9량집 인데 비해 극락전은 24.7평, 6.90m높이, 9량집 으로 고구려식 건축이다 앞의 건물보다 작고 낮으면서도 고구려인의 특색인 간결하면서도 강건한 인상을 주고, 내부의 아름다움 또한 곱다 잘 다듬은 기둥, 유려한 곡선의 배흘림, 낱낱 부재와 연등천장에 뻗고 걸치고 얽힌 모습들이 견고하고 단단해 보인다, 또한 매력은 지붕이 높지 안고 낮게 내려 앉아 안정감을 줄 뿐만 아니라 아주 야무진 맛을 풍긴다는 점이다, 마치 공부면 공부, 노래면 노래, 웅변이면 웅변, 운동도 잘 해 아무도 감히 무시 못하는 야무지게 생긴 우리 반 키 작은 반장이 라고 할까 ? 다시 보아도 역시 작은 고추는 맵게 보인다.
부석사 조사당
부석사 조사당은 부석사 창건주인 조사(祖師) 스님인 의상국사를 모신 곳이다, 해체 수리시 발견된 묵서에 위하면 1377년 원응국사가 부석사를 중수 하면서 다음해에 다시 세운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앞에서 이야기한 전각에 비해 대단히 왜소한 11.3평의 면적에 5.52M의 높이인 당각 이면서 다소 무거운 듯한 맞배지붕 이지만 엄숙함을 풍기고 있으니 조사당으로서의 위엄을 갖추고 있다 정면 어칸에는 문이 있고 양 옆으로는 바람과 빛이 드나드는 살창문으로 되여 있으며, 온갖 정성과 공을 드려 지은 무량수전에 비해서는 한단계 낮은 건물로 평가 되지만 이곳은 의상국사가 부석사를 창건 후 수도 하였던 곳으로 본 건물이 세워졌다는 설도 있다.
삼국유사의 의상전교편에 의상은 경주 황복사에서 출가하여 수행하다가 당나라로 유학갈 뜻을 품고 열살 연상인 원효와 함께 길을 떠났다, 이때에 원효는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시고 깨닫은 바 있어 돌아 섰으나 의상은 처음에 세운 뜻을 굽히지 않고 바다를 건넜으니 661년의 일이다 당시 중국 당나라에 풍미하던 화엄학을 배우러 중국 화엄종의 제2조인 지엄(智儼)을 찾아가니 그가 “어젯밤 꿈에 그대가 올 징조를 보았다” 고 하며 정중히 맞아 들여 제자가 되였다 수학하는 도중 의상은 꿈에 신인(神人)에게서 비견을 얻고 깨달은 바를 간추려 “법도계”를 지었다, 670년에 이르러 당 고종이 신라를 치려 한다는 소식을 접한 의상은 이를 전하려 급히 귀국 하였다, 신라에 돌아 와서는 671년에 낙산사를 창건하고 산천을 두루 다니면서 화엄사상을 펼칠 터전을 찾다가 676년 마침내 부석사를 자리 잡았다고 한며,
또한 의상의 전기를 싣고 있는 송고승전에는 중국에 건너가 산동반도에 도착하여 그곳 유지의 집에서 묵으면서 자신이 공부 해야 할 마땅한 스승과 지역을 알아보고 있었다, 이 기품이 있는 이방의 수도자는 금세 인근의 화제 거리가 되고, 주인집 딸인 선묘(善妙)는 의상에게 눈길을 끌고자 했으나 전혀 변화가 없으니 의상의 태도에 크게 감명 받고 대사에 귀의하여 대사게 대업을 이룰수 있도록 뒷바라지 하겠다고 결심한다, 의상은 종남산으로 가 지엄 스승을 모시고 중국불교철학을 수학하고 최고의 사상체계인 화엄학의 정수를 체득하여 스승의 인가를 받고 10년만에 신라로 귀국길에 산동반도의 그 옛날의 신도집에 들려 후원해준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 배편으로 떠난다, 실제 뒷바라지 했던 선묘는 의상을 위해 옷가지가 든 바구니를 마련 했으나 배는 이미 떠나 하는수 없이 이미 결정한 마음대로 바다로 던지고 의상의 배에 닿기를 빌었더니 질풍이 갑자기 불어 상자를 배속에 넣어 주게 된다, 그리고 바다에 몸을 던저 선묘용이 되여 저 배를 보호하리라 맹세하여 무사히 도착하게 되고, 그 후 부석사을 지으려 할 때 5백여명의 무리들이 창업을 방해해 고민에 빠저 있는 의상의 마음을 알아 차리고 너비와 폭이 1리쯤 되는 거대한 바윗 덩어리가 갑자기 공중으로 솟구처 한참 방해하는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 떨어질 듯 말 듯 오르 내리는 선묘의 신변(神變)으로 방해 무리가 없어져 무사히 지었다는 김완수 선생님의 설명이고 그래서 이름도 부석사(浮石寺)라 하고 선묘각(善妙閣)도 있다고 한다.
강릉 객사문
잘 알려지지 안 했으면서도 아껴지게 되는 건물이 바로 강릉의 객사문이다, 강릉시청과 같이 있는 우체국 뒤의 골목에 위치하고 있다, 나이로 보아선 창건연대가 936년이니 당연히 으뜸 인데 건물이 아니고 건물의 일부분인 문이다 보니 좀 격을 낮추어서 그런지 아니면 종교적인 형식이 아니고 정치와 관련된 행정관서 였기 때문은 아닌지 아무튼 우등생 보다는 몇몇 과목을 특별히 잘하는 과목 우등생 임은 틀림 없다.
객사문 만이 있어 그런지 언뜻 보기도 좀 쓸쓸해 보인다 고려시대의 고건축물 인데도 주위의 산중 풍광이 어울려 보호해 주는 것도 아니고 도심의 현대식 건물 틈속에 그것도 주연격이 아니고 단역 정도로 취급 되는듯 보여 지기 때문이다, 2001년 4월 14일 출장길에 방문 하였을 때에는 한참 수리중에 있었고, 오죽헌에 있는 향토박물관에 들려보니 주위를 복원 한다고 한다, 그 후에 다시 보는 객사문의 의미는 다르리라 생각된다.
이곳은 고려 태조 19년 (936년) 관동지방의 본부격인 임영관(臨영館)으로 총 83칸을 창건 하였고 공민왕 15년(1366년) 9월에 이곳에 머물면서 임영관 현판을 쓰셨다고 한다 이곳은 중앙에서 파견되는 관리들이 이용하던 숙박시설로 본전에는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 이나 闕 같은 글자로 용을 비롯한 상징적 인 그림)을 모시고 관리들이 각종 의식과 더불어 유흥을 즐기기도 하였던 곳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단순하지만 강한 느낌을 주는 단층 맞배지붕 집이다, 화려하면서도 날카로운 첨차 구성이 뛰어 나고, 가운데 기둥에 3칸의 판문을 달고 기둥은 민흘림 사각기둥을 이용하고 앞뒤의 기둥엔 강한 배흘림을 주어 시각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효과를 내고 있다.
건물들은 모두 없어지고 대문 만이 홀로 서 있으니 내력 또한 기구 하다 일제 시대 때 1912년에 객사문을 보수하고 1929년네는 강릉공립보통학교가 설립 되여 운동장 확장 공사로 객사 건물이 모두 헐리고 객사문 만 남겼다, 그리고 1958년에는 학교를 이전하고 그 곳에 경찰서가 건립되었고, 1960년 9월 22일에 객사문 일부 부분을 교체하고 1966년 10월에 객사문 해체 보수하고 현재 또 보수 중에 있다. 남북 이산 가족은 남과 북으로 갈라져 못만다 하지만 이곳의 이산 가족은 무슨 연유로 왜 만나지도 못하고 있나, 현존하는 고려의 목조건물이 불과 5체 정도 인데 우선적으로 복원 되였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참고로 오래된 고려시대의 목조건물의 상세한 내용을 적어 본다.
1. 부석사 무량수전 (浮石寺 無量壽殿)
명 칭 : 부석사 무량수전. (현판 공민왕 친필)
분 류 : 국보 제 18호
소 재 지 :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 (태백산 → 봉황산 ← 소백산)
건 축 구 조 : 단층, 정면 5칸, 측면 3칸, 9 량. 바닥 전돌(현재 자리).
지 붕 : 팔작지붕, 연등천장, 닫집.
문 : 정면 어칸1개, 협칸 2개, 퇴칸 2개로 어칸과 협칸은 3개의 정자살문,
협칸2개는 정자살문 으로 들어열개 형식.
기 둥 구 조 : 배흘림, 주심포, 안쏠림, 귀솟음, 활주 4개.
건 립 년 도 : 고려 우왕 2년 (1376년) 원웅국사가 중수(重修) .
최 초 건 립 : 신라 문무왕 16년 ( 676년) 의상국사가 왕명으로 창건.
중 수 중 창 : 1916년 해체 수리시 귀공포에서 묵서(墨書) 발견.
고려 공민왕 7년 (1358년) 왜구가 침노하여 화재로 소실
고려 우 왕 2년 (1376년) 원웅국사가 중수
넓 이 높 이 : 정면 61.90척(18.76m), 측면 38.20척(11.58m) , 면적217.24제곱미터(65.7평).
평주 10.86척( 3.29m), 고주 14.45척( 4.40m), 총높이 33.27척(10.08m).
의 미 : 화엄사찰 10지 중 하나, 서방극락을 구제 한다는 아미타여래 모신 곳,
즉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지닌 분 다른 말로 무량수불(無量壽佛),
신변(神變)으로 너비와 폭이 일리쯤 되는 바위 덩어리가 갑자기 공중으로
솟구쳐다 머리 위에로 떨어 질듯 말듯 오르 내려서 창업 반대무리를 물 리 쳤다 하여 이름을 부석사(浮石寺)라 한다.
2. 수덕사 대웅전 (修德寺 大雄殿)
명 칭 : 수덕사 대웅전
분 류 : 국보 제 49 호
소 재 지 : 충남 예산군 덕산면 서천리 4-1 – 덕숭산 (德崇山)
건 축 구 조 : 단층, 정면 3칸, 측면 4칸, 9량, 바닥 마루.
지 붕 : 맞배지붕, 연등천장, 측면에 풍판(風板)이 없음.
문 : 정면 어칸 1개, 퇴칸 2개로 각각 빗살무늬문 세쪽의 분합문(分閤門)으로
어칸의 1개문 만을 출입문으로 사용, 측면에도 출입문 1개가 각각 있다.
기 둥 구 조 : 배흘림, 주심포와 우미량(牛尾樑-지붕의 무게를 골고루 분산 전달)이 첨가
되여 있다.
건 립 년 도 : 고려 충렬왕 34년 (1308년) 대웅전 건립.
최 초 건 립 : 백제 법 왕 1년 ( 599년) 지명대사가 건립.
중 수 중 창 : 1937-40년 완전 해체 수리시 화반하단(華盤下端)에서 묵서 발견.
조선 순조 3년 (1803년) 대웅전 후면 수리와 풍판 신조.
1937-40년 전면 해체 수리시 풍판 철거.
넓 이 높 이 : 정면 46.75척(14.16m), 측면 35.56척(10.78m), 면적152.65제곱미터(46.2평).
평주 11.50척( 4.49m), 고주 16.20척( 4.91m), 총높이 32.00척( 9.70m).
의 미 : 백제 말에 창건 되었다 하며 흥선대원군 시절인 19세기에는 가야사
보다 사세가 작았던 듯 하고, 대한제국 시절 경허(鏡虛)선사가 머물며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키고 제자 만공(滿空)선사의 중창으로 지금 우리
나라 불교계 4대총림의 하나이고, 德을 닦는 뜻으로 이곳을 삼덕(三德)
이라고 덕산(德山), 덕숭산(德崇山) 과 수덕산(修德寺)을 이르는 말이다
3. 봉정사 극락전 (鳳停寺 極樂殿)
명 칭 : 봉정사 극락전
분 류 : 국보 제 15호.
소 재 지 : 경북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 천등산 (天燈山).
건 축 구 조 : 단층, 정면3칸, 측면4칸, 9량, 바닥 전돌(현재 마루).
지 붕 : 맛배지붕, 연등천장, 닫집.
문 : 중앙 어칸에 만 문을 설치하고 양쪽에는 통충과 채광이 되는 살창설치.
기 둥 구 조 : 배흘림, 주심포, 전면에 툇마루 설치.
건 립 년 도 : 고려 공민왕 12년 (1363년)에 옥개부분을 크게 수리.
최 초 건 립 : 신라 문무왕 (661-668년) 때 능인 대덕이 창건.
중 수 중 창 : 1972년 8월14일 해체 수리 시 마루도리 받침 장혀에 파서 넣은 한지에
쓴 상량문을 발견 하였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조선 인조 3년 (1625년) 중수.
그리고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도 옥개 부분을 크게 수리 하였다.
해체수리시 정면 3칸에는 띠살의 4분합문 으로 되여 있었으나 이것은
조선시기 중수때 변형시킨 것을 고려시대 건축양식으로 되돌려 살창으로
하였다 한다.
소 실 : 절에 전해오던 사지(寺誌)나 경전이 한국전쟁 때 모두 불타버려 자세한
역사적 내력을 알수 없으나 다행이 극락전과 대웅전이 남았다.
넓 이 높 이 : 정면 38.46척(11.66m), 측면 23.08척(6.99m), 면적 81.50제곱미터(24.7평).
주고(柱高) 12.67척(3.84m), 총높이 22.77척(6.90m).
의 미 : 영주 부석사에 자리잡은 의상이 종이봉황을 만들어 도력으로 날려 보내
니 이곳으로 와서 봉황사 이름을, 그리고 의상이 기도 드리려고 산에
오르자 선녀가 햇불을 밝히고 청마(靑馬)가 인도 하여 천등산 이름으로.
4. 부석사 조사당 (浮石寺 祖師堂)
명 칭 : 부석사 조사당
분 류 : 국보 제 19 호.
소 재 지 :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건 축 구 조 : 단층, 정면 3칸, 측면 1칸, 5 량, 바닥 전돌(현재 자리).
지 붕 : 맞배지붕, 연등천장, 측면에 풍판이 없다.
문 : 정면 어칸에는 문이 있지만 양 옆으로는 바람 빛이 드나드는 살창.
기 둥 구 조 : 배흘림, 주심포.
건 립 년 도 : 고려 우왕 3년(1377년) 원응국사가 재건(再建).
최 초 건 립 : 고려 신종 4년(1201년) 3월에 조사당 단청하다.
중 수 중 창 : 1916년 해체 수리시 귀공포에서 묵서 발견.
고려 공민왕 7년 (1358년) 왜구가 침노하여 화재로 소실.
고려 우왕 2-3년 (1376-7년) 원응국사가 무량수전 과 조사당 중수중창.
조선 성종 21년 (1490년) 4월에 조사당 중수.
조선 성종 24년 (1493년) 4월에 조사당 단청.
조선 선조 28년 (1583년) 2월에 조사당 경연(更椽).
넓 이 높 이 : 정면 30.7척(9.3m), 측면 13.2척(4.0m), 면적 37.2제곱미터(11.3평)
주고 8.4척(2.55m), 총높이 18.2척(5.52m).
의 미 : 조사스님을 가리기 위한 당각 으로 바로 부석사 창건주인 의상국사를
모신 곳으로 의상국사가 초창하고 수도 하던 자리에 세운것으로 보인다.
5. 강릉 객사문 (江凌 客舍門).
명 칭 : 강릉 객사문. (현판 임영관 공민왕 친필)
분 류 : 국보 제 51 호.
소 재 지 : 강원도 강릉시 용강동 58-11
건 축 구 조 : 단층, 정면 3칸, 측면 2칸, 5량.
지 붕 : 맞배지붕, 연등천장, 풍판 없음.
문 : 3문 (板門).
기 둥 구 조 : 앞뒤 줄 기둥은 배흘림, 판문이 달린 가운데 줄은 민흘림의 사각 기둥,
고구려계 주심포.
건 립 년 도 : 고려 태 조 19년( 936년) 본부객사(本府客舍)로 임영관을 창건
중 수 중 창 : 고려 공민왕 15년(1366년) 임영관 편액을 친필로 썼다고 전함.
조선 인 조 5년(1627년) 대청 화재를 당함.
조선 인 조 9년(1631년) 집경전에 화재 발생.
조선 인 조 11년(1633년) 부사 유문화가 재축.
조선 고 종 18년(1881년) 부사 김병기가 전대청 중수.
조선총독부에서 1912-1926년에 객사문 보수.
1929년 2월 객사기지는 강릉공립보통학교가 되고 운동장 확장 공사로
모두 헐리고 객사문만 남게 됨.
1958년 학교를 이전하고 공지에 강릉경찰서가 건립됨.
1960년 9월 22일 – 1961년 5월 15일 객사문 일부 목부 교체.
1966년 10월 객사문 해체보수.
2001년 9월 현재 대수리 중.
넓 이 높 이 : 정면 38.54척(11.68m), 측면 15.38척(4.66m), 면적 54.43제곱미터(16.47평),
주고 10.84척(3.28m), 총높이 22.75척(6.89m).
의 미 : 중앙에서 파견되는 관리들이 이용하던 숙박시설로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
(전/殿 이나 궐/闕 같은 글자나 용을 비롯한 상징적인 그림) 를 모시고
관리들이 각종 의식과 더불어 유흥을 즐기기도 하였던 곳임.
< 순서는 큰 건물 순으로 그리고 부속건물은 뒤로 하였음.>
2001년 10월 31일
덕 수 궁 지킴이
김 근 성 쓰다.
참 고 문 헌 :
한국의 고건축 한국건축사 연구자료 제 3호 부석사 무량수전, 조사당.
(문화재 연구소, 대한공론사, 1976, 12, 30.)
한국의 고건축 한국건축사 연구자료 제 4 호 수덕사 대웅전.
(문화재 연구소, 중앙출판인쇄㈜, 1979, 11 ,26.)
한국의 고건축 한국건축사 연구자료 제 5 호 강릉 객사문.
(문화재 연구소, 연문인쇄소, 1982, 9, 10.)
봉정사 극락전 수리공사 보고서.
(문화재 연구소, 대한인쇄공업협동조합, 1992, 12, 29.)
명찰순례 1,2,3편 (최완수지음, 대원사, 1984, 8, 12.)
삼국 사기 (박석봉,고경식역, 서문문화사, 1987, 8, 30.)
한국목조건축의기법 (김동현지음, 도서출판, 1998, 6, 1.)
우리옛집이야기 (박영순외지음, 열화당, 1998, 2, 5.)
나의문화유산답사기 1.2.3편
(유흥준지음, 창작과비평사, 1994, 8, 20.)
무량수전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최순우지음, 학고재, 1996, 12, 20.)
-- 이 상 --
출처 : 사단법인 한국의 재발견
글쓴이 : 金根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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